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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5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전생이란 건 가혹한 삶에 지친 소녀가 현실을 잊기 위해 하는 망상 아닐까.

망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기억이라서 금방 지우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내 모습을 볼 때면 종종 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에델을 만난 나는 내 기억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걸 알게 됐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지기라도 해?

에델과의 대화는 나에게 내가 불순물이라는 사실을 더 강하게 일깨워 줄 뿐이었다.

저쪽 세상의 기억을 갖고 있지만 저쪽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쪽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오롯이 이쪽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불순물.

그런 내가, 누군가 다가와 주길 원했다고?

“…아니야.”

그런 걸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아니.”

그러나 저니는 나의 말을 단박에 부정했다.

“말로 한 적은 없었지만, 카나는 분명 그걸 원하고 있었어.”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한 목소리.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기억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카나가 내 목숨을 구해줬잖아.”

“…그건 코카트리스를 사냥하려고 한 것뿐이야.”

“그런 거였다면 코카트리스가 나를 죽이는 걸 기다렸어도 됐잖아?”

“…시간이 끌리는 게 싫어서 그런 거야.”

“알았어. 그건 그런 거로 하고 넘어가고, 그러면 내가 따라가는 걸 알았는데 왜 막지 않았어?”

“그건… 그라닉을 쓰는 걸 보면 가리드가 좋아할 거 같아서….”

카나라면 분명 알았을 텐데.

맞는 말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녀가 내 뒤에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니가 한 발짝 더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그녀를 피해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검술을 가르쳐 준 것도, 제국군에게서 구해준 것도.”

“….”

검술이랍시고 검을 휘두르는 폼이 형편없어서 보다못해 가르쳐 준 것뿐이다.

제국군은 애초에 나를 잡으러 온 놈들이니, 따지고 보면 그들이 나를 도와줬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하 마디 한 마디.

저니의 입에서 한 마디씩 흘러나올 때마다 나는 한 걸음씩 물러났고.

저니는 그런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같은 한 걸음이지만, 그녀와 나의 거리는 분명히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나와 손을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정말로 다가오는 게 싫었으면 내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거절했겠지. 하지만 카나는 그러지 않았어.”

혼자 가는 게 훨씬 편하고 빨랐을 게 분명한데.

“….”

숨이 턱 막혔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다.

‘내 추측이 옳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혹은,

‘말이 안 통하면 곤란하니까.’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떠올릴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구차하고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느꼈다.

추측이 옳았는지 검증할 방법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많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생기는 귀찮음도, 그녀와의 동행으로 생기는 귀찮음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와락!

“…아.”

갑자기 와닿는 온기에 말을 잃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와닿은 이 온기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

“….”

나를 끌어안은 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뜨거운 무언가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서웠어.”

저니에게 꼭 끌어안긴 채로, 나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그대로 입 밖에 내었다.

“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기분을 다시 느낀다는 게.”

가리드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오롯이 받아줄 사람도 없겠지만, 설령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날 것이다.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순물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또 모든 것을 잃고 이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을 느껴야겠지.

그 사실이 나는, 미친 듯이 두려웠다.

게다가 저니는 이 세계를 게임으로 알고 있는 플레이어.

흥미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존재였다.

혹여 흥미가 떨어지지 않아도 현실에서 무슨 일이 생겨 게임에 접속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계속 기다리겠지.

왕자를 기다리는 사막여우처럼, 계속.

처음에는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다음에는 버려졌다는 생각에 슬플지도 모르지.

그러나 결국엔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끝없는 허무감과 공허함이 나를 잠식할 것이다.

“…응, 그랬구나.”

나를 끌어안은 모습 그대로, 내가 생각하기에도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는 말을 듣던 저니가 부드럽게 나의 등을 쓸었다.

그녀가 나를 품에서 살짝 떼어 놓자, 몸 가득 느껴지던 온기도 함께 멀어졌다.

그사이에 스며든 싸늘한 밤공기에 몸을 떨고 있을 때, 그녀가 내 눈앞에 꽃을 내밀었다.

아까 그녀가 내 머리에 꽂았던 바로 그 꽃이었다.

“이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

“….”

“‘떠나간 이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허리를 숙인 그녀의 눈과 나의 눈이 맞았다.

저니의 눈에 담긴 내 얼굴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새로 찾아올 만남에 대한 기대’래. 신기하지 않아? 상반된 두 말이 하나의 꽃에 있다는 게. 아마도 처음 이 꽃말을 생각한 사람은-”

저니가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어느새 나의 손에는 그녀가 들고 있던 꽃이 쥐어져 있었다.

“만남과 이별은 결국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안 게 아닐까? 새로운 만남이 있다면 새로운 이별 또한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언젠가 찾아올 이별이 무서워서 만남을 꺼린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거야.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외롭게 살겠다는 거잖아. 그건 너무 슬프지 않아?”

“…모르겠어.”

돌이켜 보면….

가리드와 살 때를 제외하면 난 언제나 혼자였다.

빈민가에서 나와 비슷한 아이들과 모여 다닐 때도.

가리드가 떠난 후 기사단을 이끌 때도.

항상 누군가와 같이 있었지만, 같이 있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카나도 느끼지는 못했지만, 분명 속으로는 ‘혼자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야.”

저니의 엄지손가락이 살며시 다가와 나의 볼을 훑었다.

볼에서부터 눈 밑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훑은 저니가 빙긋 웃었다.

“난 카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저니의 목소리 너머로 굵직한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립지만,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거야?”

모든 것엔 끝이 있고, 저니와의 만남도 끝이 난다는 건 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나의 물음에 저니가 다소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언니가 동생을 버리고 떠나겠어?”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절대로.”

멀어졌던 온기가 다시 가까워졌다.

“절대로 카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게.”

과연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그녀는 알까.

아마 모르겠지.

이 세계가 게임이자 곧 실제 세계라는 것도, 이 세계 사람들이 프로그래밍 된 대로 움직이는 한낱 NPC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라는 것도.

내가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나는 따스한 온기에 몸을 내맡겼다.

그리고 저니의 품에 안긴 채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카나리아 그라시스.”

아니,

“카나리아. 그냥, 카나리아야.”

“응. 카나리아.”

“…앞으로 잘 부탁해, 다은.”

“…! 응! 나야말로, 잘 부탁해!”

다은이 활짝 웃으며 다시 한번 나를 꼭 끌어안았다.

답답해.

그래도….

“….”

따뜻하네.

* * *

“으….”

다은과 아침 인사를 나누던 나는 문득 떠오른 지난날의 기억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잔뜩 꼬여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안 잡히던 매듭을 끝끝내 풀어낸 그날 밤.

나와 다은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어린 시절, 기사단에서 있었던 일들, 가리드와 함께한 나날.

처음이 어려웠지, 막상 털어놓기 시작하니까 거리낌 없이 술술 나왔다.

다은도 그런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중간중간 말하면 안 되는 것을 골라내느라 흠칫하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얘기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게 눈에 보여서 나는 그녀가 흠칫할 때마다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른 게 있었으니.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전생에서는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방송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지나치게 많던 혼잣말과 빠른 전파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그런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그날 밤은 왠지 모르게 방송을 켜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다은도 우리 둘이 나누는 진솔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닐까?

애초에 그런 거를 떠벌리고 다닐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가까워지지 못했을지도.

주춤거리는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다은이 나에게 물었다.

“응? 왜?”

“…아무것도 아니야.”

혼자 있고 싶다느니, 무서웠다느니, 떠나지 말아달라느니….

그땐 나도 감정적으로 몰려있던 때라서 괜찮았지만, 내가 했던 말들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하나 같이 부끄러운 것들뿐이었다.

…물론 그때 일을 후회하는 건 아니야.

그때의 일이 있었기에 다은과 내가 꼬인 매듭을 풀고 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었으니까.

분명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는데도 다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간지러운 시선에 나는 애꿎은 볼을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의 일정 말인데….”

“어?! 벌써 떠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속에서 조용히 썩어 가던 케케묵은 감정을 털어놓았지만, 축제에 대한 흥미가 다시 생긴 것은 아니다.

그라시스의 영토였던 곳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 며칠 쉬었다 가자는 마음이었다.

…음, 그리고.

“…보고 싶어 했잖아.”

강림제를.

왠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려니 부끄러워져서 슬쩍 눈을 피하며 말했다.

“….”

“…?”

금방 반응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선 아무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명백히 이상한 상황에 다시 다은을 바라보자, 넋을 놓고 멍청하게 나를 보고만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러는 걸까, 하는 마음에 고개를 갸웃.

그러자 그녀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뭐지? 이 귀여운 생명체는…?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가?”

“…뭐래.”

주접부리기는.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튼, 강림제가 끝난 후 이야기야.”

따라올 거지?

그런 의미를 담아 다은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연히 따라가야지! 이번엔 어디로 갈 거야?”

여행을 가는 게 기쁜 걸까, 아니면 나와 같이 가는 게 기쁜 걸까.

어느 쪽이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네.

“‘락시아’로 갈 거야.”

“…응? 어디로 간다고?”

“마대륙 락시아.”

내 말에 다은이 선 채로 쩌저적 굳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뻐할 만한 곳은 아니긴 하지.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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