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5
“어떻게 날 공격할 수 있는 거지?!”
“네가 허접이라 그런 게 아닐까?♡”
게임 속의 존재인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성기사이기는 해도 아직은 약하니까.
레벨 차이가 극심한 사령술사에게 제대로 된 데미지를 줄 수는 없는 게 정상이다.
그렇지만 고인물이라는 건 그 사이에 있는 허점을 노리는 존재거든.
사령인 이 곳의 보스는 본래라면 물리공격이 그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 회피의 메커니즘은 면역이 아닌 무효다.
이 두 개의 차이는 크다.
데미지를 아예 입지 않는 게 아니라, 데미지를 받고서 그를 무효화 시키는 거거든.
여기서 얼마 전 내가 불쌍한 3학년 선배를 쓰러트리고서 얻은 스킬 언더독이다.
레벨 차이가 20이상 날 경우에 트루데미지를 먹이는 이 스킬은 본래라면 건드릴 수도 없는 사령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준다.
물리 공격이 무효되면 뭐해.
고정뎀은 바뀌지 않는다고!
퍼억.
또 다시 사령술사에게 내 메이스가 적중한다.
사령술사는 물리 무효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가지고 있는 탓에 비슷한 레벨 대의 다른 보스에 비해 기본적인 스펙이 낮은 편에 속한다.
여러 숙련도 스킬을 한계치까지 쌓은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사령술사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한 던전의 주인답게 최선을 다해서 발악을 했다.
허나 이 전투에 참가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알른 가문의 기사로써 수많은 전투를 경험해 보았던 칼은 사령술사의 모든 발악을 차단하며 내게 공격을 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사령이 쓰는 마법을 떨어트리고, 무덤에서 기어 나오는 시체들을 처리하고, 사령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까지 막아내 주었으니.
어찌 보면 탱커보다 더 탱커답다고 할 만 했다.
“저…주 할테다…”
그렇게 일방적인 폭력 끝에 싸움이 끝나고 사령술사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안심하지 않았다.
비슷한 상황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경험이 있었기에.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정상적으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몸에 힘이 차올랐다.
다행이다.
아 진짜 아그라의 저주가 너무 거슬리네.
이게 게임일 적에는 아그라가 개입하면 환호성을 질렀었는데 이제는 겁을 먹어야 한다니.
빨리 강해지고 싶다.
저주로 인해 무언가가가 생기기를 바랄 수 있을 정도로.
아그라의 저주로 생기는 변수는 던전의 레벨보다 높아서 괜찮은 보상을 준단 말이야.
뭐어. 그건 나중 이야기고.
이 던전에서 얻은 보상은 뭐지?
문 앞에 생겨난 탁자를 살피니 검은색의 구슬 하나가 있었다.
이거 사령술사의 흔적 맞지?
그를 확인하니 위해 감정을 써보니 내 앞에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올랐다.
[사령술사의 흔적]
[사령술사가 죽으며 남긴 원한이 담긴 구슬입니다.]
사령술사로 플레이할 때나 필요한 아이템을 줘서 어쩌라는 건지.
이거 나한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잖아.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보상으로 받은 걸 바꿀 수도 없었다.
난 일단 그 아이템을 주머니에 넣었다.
‘칼…’
“허접. 돌아가자.”
“예. 아가씨.”
비가 추적거리던 던전의 바깥으로 나오니 내가 물귀신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입고 있는 교복은 한 번 물에 담갔다가 꺼낸 것 같은 상태고 머리카락은 물을 먹어서 목에 부담을 줄 지경이었다.
으. 찝찝해.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서 씻고 싶다.
일단 그 전에 챙길 것부터 챙겨야겠지만.
던전이 공략됨에 따라 방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던 던전의 문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다시금 빛을 만들어 내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그 방은 일종의 창고 같은 장소였다.
던전으로 인해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일까.
그 안의 물건들은 세월에 따라 낡았을 뿐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긴.”
‘이 저택에…’
“옛날에 이 낡아빠진 저택에 살던 허접들이 보관해둔 물건이야.”
꽤 큰 규모의 저택에서 살던 이들이 쓰던 창고답게 이 곳에 보관된 물건들은 다들 꽤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안에 있는 것들만 다 팔아 넘겨도 금화 열 댓 개는 가뿐히 벌 수 있을 걸?
그렇지만 내 목적은 이 곳에 있는 재물이 아니었다.
백작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 나에게 재화 같은 건 얼마든 쓸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하니까.
입구에 서서 창고 안 쪽을 둘러보던 나는 찾던 물건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창고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칼이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저 겁쟁이의 말은 이럴 때에 한해서 들을 가치가 없으니까.
정말 위험했더라면 할배가 한 마디를 했겠지.
창고 한켠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리본을 집어든 나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다.
“찾던 게 이거지? 가져가.”
그러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본이 재로 변하더니 형체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 고마워요.
그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 앞에 메시지 창 몇 개가 떠올랐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주어집니다.]
[스킬 : 이제 한은 없으니.]
좋아.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잘 해결 됐네.
‘이제 한은 없으니’라는 스킬은 간단히 말해 대 사령전을 위해 만들어진 스킬이다.
사령을 상대할 때 받는 데미지 감소. 입히는 데미지 증가 등등 잡다한 기능이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이 스킬의 진면목은 따로 있다.
바로 일정 레벨 이하의 저주는 차단해 버린다는 거지.
앞으로 아그라와 상대를 하게 되면 여러 저주를 덕지덕지 달고 다녀야 할 텐데.
이 스킬이 없으면 어디서 비명횡사를 당하게 될 지도 모르거든.
원하는 스킬을 얻어서 기분이 좋아진 내가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창백해진 칼이 보였다.
“아…아가씨. 방금… 방. 전에. 목소리가.”
얘 진짜 겁 많네.
*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칼과 함께 소울 아카데미에 돌아오고 나서 다음 날.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들러리 영애가 있는 곳을 찾았다.
왜 나까지 그 NPC를 들러리 영애라고 부르냐고? 나 걔 이름 모르거든.
물어보더라도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메스가키 스킬이 그러는 것처럼 들러리 영애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차피 호감도 시스템과는 관련도 없는 NPC의 이름을 알아봐야 뭘 하겠어.
들러리 영애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다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잠을 자는 체를 했다.
팔 아래로 감춘 손가락이 초조하게 움직이는 것이 제발 좀 꺼져주기를 바란단 게 훤히 보였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들러리 영애를 만나러 온 거였으니까.
들러리 영애가 앉은 탁자 반대편에 내가 앉자 들러리 영애의 어깨가 움찔 거렸다.
얘는 내가 진짜 자기가 자는 줄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저기요.’
“들러리 영애.”
아무런 대답이 없다.
흐응.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언제까지 버티나 볼까.
‘야. 일어나.’
“들러리. 일어나.”
이번에는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들러리 영애는 고갤 들지 않았다.
“들러리♡ 존재감이 아니라 귀가 없는 거였나?♡ 일어나♡”
그제서야 들러리 영애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벌게진 것이 도발 때문에 열이 받은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시죠?”
그럼에도 욕지거리를 하질 못하는 게 루시의 악명이 얼마나 드높은 지를 알려줬다.
괜히 건드렸다 자기만 피해를 볼 게 뻔하니 울분을 꾹 참고 있는 거다.
아마 내가 떠나고 나면 뒤에서 친구와 같이 날 욕하지 않을까.
칼을 만났을 때도 나를 망나니 영애라고 부르면서 뒷담화를 까고 있었다 했으니 뻔하지 뭐.
“알른 영애?”
‘이걸…’
“이거 주려고 왔어. 들러리 영애.”
내가 품 안에서 꺼낸 건 들러리 영애가 찾아달라고 칼에게 부탁했던 물건과 저택의 열쇠였다.
들러리 영애는 그 두 물건을 가만 보다 미간을 찌푸린 채 내 얼굴을 살폈다.
“…이건 제가 칼 선생님께 부탁드린 건데요.”
‘심부름이에요.’
“딱 보면 몰라 들러리? 심부름으로 온 거잖아.”
사실은 들러리 영애에게 한 마디 할 겸 직접 찾아온 거지만.
“알른 영애는 칼 선생님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건가요.”
나를 노려보는 게 궁금한 게 참 많아보였지만 난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내 할 말만 내뱉었다.
‘잘 있어요. 사령술사님. 남 뒷담화는 적당히 하시고요.’
“잘 있어. 들러리 사령술사. 또 뒷담화하면 어떻게 될지 알지?”
들러리 영애의 표정변화는 극적이었다.
화가 났다가 의아해했다가 이제는 창백하게 물들었으니까.
그녀의 얼굴을 가지고서 신호등을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네.
들러리 영애는 더듬거리면서 무어라 변명을 하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령술사라는 약점을 잡았다고 경고해 뒀으니까 더 이상 뒷담화는 하지 않겠지?
*
소울 아카데미의 저녁.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거리를 맘대로 나다닐 수 있는 시간에 비시 벨은 뒷골목의 저택에 발을 들였다.
유령이 산다는 소문이 난 탓에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저택은 오늘도 조용했다.
비시 벨이 저택의 문을 열고서 안에 들어서자 나무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 비시! 왔어?
그 순간 그녀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도 뭣도 없는 상황에서 들려온 목소리이니 놀랄 법도 했지만 비시 벨은 태연했다.
“그냥 정상적으로 인사하지?”
– 재미없어. 비시는 너무 무덤덤해.
“네가 놀래키는 걸 잘 못하는 거야.”
비시가 그리 대답을 하고 나서야 천장에서 반투명한 무언가가 내려왔다.
해진 잠옷을 입고 있는 그것은 여자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 아냐! 나 엄청 잘 놀래키는 걸!
“그래? 그것 참 믿음이 가네. 아드리.”
저택에 거주하고 있는 유령이자 과거 저택에 살던 사람 중 하나였던 아드리는 볼을 부풀리며 따졌다.
– 진짜라니까! 어제도 한 명을 까무러치게 만들었다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겁쟁이…”
어제? 어제라면 그 빌어먹을 망나니 영애가 왔다 갔을 때 아닌가?
“저기. 혹시 그거 얄밉게 생긴 진분홍 머리칼 여자애 아니었어?”
아하. 그 오만해 보이는 망나니도 여자아이긴 하구나?
귀신을 무서워하나 보네?
– 아니? 겁 낸 사람은 금발의 기사님!
금발의 기사라면.
칼 선생님인가?
그 분도 내 부탁을 듣고서 여기에 왔었나 보구나.
아드리 때문에 겁을 먹어서는 바들바들 떠는 칼의 모습을 상상하던 비시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렇게 멋진 사람한테도 약점은 있구나.
– 같이 온 여자애는 내가 있는 걸 알고서도 겁 하나 안 냈어!
“분홍머리 여자애 말하는 거지?”
– 응!
역시 그 두사람은 어제 같이 이 저택에 들린 건가.
두 사람은 무슨 관계지?
이런 구석진 곳에 같이 올 정도란 걸 생각해보면 가까운 사이인 것 같긴 한데.
뭐. 사령술사라는 약점을 잡힌 이상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안다 해도 아무런 말도 못하겠지만.
“아드리. 혹시 그 여자애한테 나에 대한 이야기 했어?”
– 아니? 나 걔랑 대화는 한 마디도 안했어.
그렇겠지.
사령술사도 아닌 사람이 귀신인 아드리랑 대화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도대체 내가 사령술사라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아드리. 어제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
– 물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