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51
아니 얘 왜 같이 뛰어 들고 지랄이냐!?
내가 너 뒤에서 덮친 다음 강제로 끌고 가려던 계획도 포기했는데 왜 따라붙냐고!
넌 저 위에서 일을 해야지! 썅년아!
자유낙하를 즐기리라도 하는 건지 살풋 미소 짓는 네베라의 모습에 난 복장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이 도시에 머무는 네베라는 내가 아는 것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이었다.
오만하고 거만한데다 갑질을 즐기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썅년은 어디로 간 건지, 이 도시의 네베라는 타인을 위할 줄 아는 귀족이 되어 있었다.
겨우 하루밖에 지켜보지 않았지만, 지금의 그녀가 내가 이를 갈며 조져버리겠다고 마음먹었던 상대가 아니란 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혼자서 이 안으로 들어간 다음 초속으로 던전을 공략하고서 나오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이 여자가 굳이 날 따라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럼 결국 문제 없는 것 아니냐? 당초 계획했던 대로 하면 되잖으냐.>
‘문제 있어요! 제가 앞으로 할 행동을 납득시키기가 빡세다고요!’
찍어눌러도 무관한 상대라면 ‘허접한 너 따위한테 알려줄 거 없거든? 내 발치에 엎드려서 납작 기기나 해. 넌 그러기 편하겠다. 튀어나온 곳이 없잖아.’ 라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줄 수 있지만 협력을 요청해야 하는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라!
앞으로 내가 할 고인물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
메스가키 스킬이 없어도 빡센 일을 메스가키 스킬의 왜곡을 단 채로 할 수 있겠냐!
하아악! 생각하면 할수록 열 받네!
그래! 떨어지려는 날 보고 놀라서 붙잡은 것까지는 그렇다 쳐!
그럼 마법사답게 뭔가를 했어야지!
마법의 사도쯤 되면 하늘을 나는 거라던가 단거리 텔레포트라던가 뭐 많을 거 아냐!
왜 아무것도 안 하고 나랑 같이 떨어지려 그러냐고!
자살동반지망자야!? 내가 역겨운 변태새끼들을 여럿 만나봤지만 그건 처음이네! 대단해!
속으로 성질을 내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보였다.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 있는 불완전한 던전.
내가 기억하는 것과 별 다를 것 없는 모습이네.
“앞잡이. 마법 쓸 줄 알지?”
네베라는 입을 여는 대신 나무막대를 휘둘러 마법진을 그렸다.
중력을 따라 낙하하던 우리의 몸이 가속을 잃었다.
“처음 떨어질 땐 왜 아무것도 안 한 거야? 나랑 단 둘이 되어서 뭘 하려고?”
“그건 사고였습니다. 저도 무언갈 하려 했지만…”
“풉. 속 보이는 거짓말이네. 추해.”
“갑자기 마법이 안 써진 걸 저보고 어쩌라고요!”
바닥에 자리 잡은 난 주변을 둘러보며 방패와 메이스를 들었다.
무기를 쓸 일은 보스전을 제외하곤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
<루시야. 걱정할 필요 없다. 그냥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대충 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나도 아직 네가 벌이는 기행을 납득한 건 아니거든. 그냥 네가 하는 일이니까 믿고 바라볼 뿐이지.>
‘…어. 그랬어요?’
<네 친구들도 똑같을 거다. 단지 너이기에 믿을 뿐이다. 머리로 이해한 건 아니지. 애초에 이해할 수 있는 종류도 아니고.>
중요한 건 기행을 납득 시키는 게 아니다. 내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한다는 걸 믿게 만드는 거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난 한숨을 푹 내쉬고서 네베라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신록의 빛을 품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 나의 얼굴이 들어온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졸개한테 미리 말해둘게. 뭘 봐도 나한테 물어보지 마. 너 같은 똘마니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 걱정하지 마시죠! 전 마법의 사도입니다! 온갖 이적을 본 제가 당신 같은 꼬맹이 때문에 놀랄 리 없잖아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놀란다고 네 입으로 직접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배려 안 하고 무작정 달릴게.
걱정마. 죽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놀라서 기절할 수는 있겠지만.
네베라의 허리를 붙잡아 어깨에 들쳐업은 나는 내 옆에 있던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만들어지고 있던 거대한 방에는 나 따위 손가락 하나로 짓뭉갤 수 있을 크기의 골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저기요?”
골렘은 우리를 포착하자마자 손을 치켜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밝았던 방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운다.
“지금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요정들이 아직 안 깨어난 게 아쉽네. 이거 삼인칭으로 했으면 진짜 즐거웠을 것 같은데 말야.
“아 진짜!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무것도 하지 마. 졸개 노릇에 익숙할 거 아냐. 구경이나 해.”
타이밍을 잴 필요도 없다. 트루 엔딩 스피드런을 할 때 지겹도록 경험했던 풍경이니까.
그 때로부터 시간이 꽤나 흐른 지금도 내 몸은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을 따라 움직였다.
*
골렘은 차라리 자그마한 동산이라 부르는 게 낫겠다 싶을만큼 거대했다.
그 손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 하나의 크기가 어지간한 인간과 비견되는 손은 휘둘러지는 것만으로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천재지변이 이 곳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네베라는 바로 앞까지 다가 온 손을 보고서 눈을 감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따라오지 말 걸 그랬어!
내가 죽음을 각오한 건 진심이지만 그 죽음이 이런 개죽음이 되길 바란 건 아니었다고!
손을 꾹 쥔 네베라는 벌벌 떨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귓가에 청아한 울림이 들려왔다.
잘 관리된 종이 울릴 때처럼 몸을 전율케하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비웃음을 흘리는 여자아이와 위로 치켜들어진 그녀의 방패와 중심을 잃은 채 뒤로 넘어가는 골렘을 보고 자신의 뺨에 약한 전기를 쏘았다.
“아얏!”
찌릿한 통증은 이 광경이 모두 다 현실이라는 걸 알려줬다.
“입 다물고 있어. 혀 깨물고 귀여운 체하지 말고. 그 얼굴로 그딴 소리를 내니까 토악질이 나와.”
“내가 뭐 어때… 꺄아악?!!”
네베라가 따지려던 순간 루시가 앞으로 가속하더니 땅에 넘어진 골렘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골렘의 머리 위로 내달리더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벽의 틈으로 뛰어내렸다.
어둠과 함께 또 다시 낙하가 시작된다.
뭐야!? 뭐야?! 왜 또 뛰어내리고 난리야?!
혼란 속에서 네베라가 어찌할 줄을 몰라 하던 그 때 저 멀리에서 빛이 날아들었다.
“공격! 공격이 와요!”
“나도 눈 달려있거든?”
루시의 방패에 닿은 불꽃이 터지며 화끈한 열기를 선사한다.
피부가 따가운 느낌에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끼던 네베라는 폭발의 충격에 낙하속도가 상쇄 되었단 걸 깨달았다. 이걸 노린 거야?
– 하하하! 저주스러운 주신의 사도와 패배자를 모시는 병신이 함께라니!
네베라가 경악을 감추기도 전에 저 아래에서 성대를 찢어가며 내는 듯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치. 죽음을 거부한 대마법사.
평범한 녀석이 아냐.
수준이 상당해.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대!
“마법의 신이 패배자면 넌 뭐야?♡ 살아선 아무것도 못 이룬 채 뒈져버린 병신?♡ 죽어서도 이름 하나 못 날린 머저리?♡”
“…네 녀어어언!”
리치가 마력을 끌어올리는 걸 본 네베라는 바둥거리며 내려달라 소리쳤지만 루시는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아악! 이 꼬맹이 왜 이렇게 힘이 쎄! 뼈밖에 없어 보이는 꼬맹이주제에 완력이 무슨!
“입을 나불거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저 미친놈! 이 방 채로 지워버릴 생각이야?!
막대한 마력이 담긴 마법에 네베라가 기겁하던 순간 루시가 웃으면서 살짝 위로 뛰어 올랐다.
마법이 쏘아지고, 루시의 방패에 마법이 처박히더니, 두 사람의 몸이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저 멀리로 날아간다.
이대로라면 어디 벽에 얼굴을 박겠단 생각에 눈을 떨던 네베라였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날아간 곳에 벽은 없었으니까.
또 다시 낙하가 시작된다.
“따까리. 이제 준비해.”
하늘 위로 치솟는 머리카락 사이로 루시가 목소리를 냈다.
“제가 할 일이 있기는 해요?! 어차피 제멋대로 하실 거잖아요!”
“이제는 그럴 일 없어. 이 허접 던전도 끝이거든.”
“…끝이라고요?”
얼마가 지나 바닥에 착지한 루시는 신성을 네베라를 바닥에 내려줬다.
원래 같았다면 투정이라도 부려 보았을 터이나 네베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녀의 앞에 자리한 존재가 선사하는 위압감이 너무도 거대했다.
저게… 뭐지?
거대한 몸 이곳저곳에 선명한 핏줄이 피부 바깥으로 튀어 나와 있다.
그리고 그 핏줄의 끝엔 날카로운 발톱 비스무리한 것이 튀어나와있는데 그 끝마다 저주가 새겨진 채다.
침이 줄줄 흐르는 입에는 상어의 이빨이 이중으로 박혀 있었으며 붉은 색으로 점멸하는 눈동자는 도저히 생명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른 시간에 찾아 온 손님인가.”
금속을 긁어대는 듯 기분 나쁜 목소리와는 달리 괴물의 어투는 점잖았다.
그 괴리가 네베라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곤란한 일이야. 아직 가게의 문이 열리지 않았거든.”
“푸하핳♡ 여태 쳐잤으면서 아직도 게으름을 부리게?♡ 바깥에서 사람 만나는 게 그렇게 무서워?♡”
허나 네베라의 앞에 선 자그마한 아이는 몸을 떨기는커녕 비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두려워해야 할 쪽은 그대 같은데.”
“뭘?♡ 흉측한 괴물새끼가 날 덮치려는 거?♡ 풉♡ 해보던가♡ 그럴 용기 없잖아. 괴물 새끼야♡”
고간을 가리는 천 끝자락을 잡아올리며 비아냥거리자 괴물이 입을 다물었다.
그로부터 약 2초가 지났을 무렵 청량한 소리와 함께 네베라의 머리가 휘날렸다.
괴물이 내지른 발톱은 하얀 방패에 상처조차 새기지 못한 채 튕겨났다.
“내 속살이 그렇게 보고 싶어?♡ 다급한 게 웃기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여자아이는 그리 듬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외견이나 말하는 어투나 불안하기 그지없어야 했다.
헌데 묘하게 네베라는 그녀의 자그마한 등이 너무도 믿음직스러웠다. 잠시나마 그녀를 장악했던 공포를 잊게 만들 만큼.
“박살내면 되죠?!”
“얼음 계열로 해. 저 징그러운 괴물이 바들바들 떠는 걸 보고 싶거든.”
“하! 재밌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