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53
루시와 네베라가 지하에서 움직이는 동안 지상에선 난리가 났다.
제국에서 존경받는 마법사인 마법의 사도가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 저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자신들이 존경하던 이의 위험에 여러 마법사들이 그녀를 따라 뛰어내리려 했고 당장 기사들을 불러오라 소리쳤으며 그들 사이에 도사리던 혼란이 시민들에게까지 전파되어 도시를 혼란으로 이끌었다.
냉정을 지닌 몇 사람이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리를 쳤지만 이미 전염되어버린 혼란을 물리치기엔 그들의 힘이 너무도 부족했다.
사실 그들이 어느 정도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다.
도시에 자리한 혼란은 단순히 사람들의 당혹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불온한 기운이 사람들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이상 누구라 한들 도시의 혼돈을 진정시키긴 어려웠겠지.
“아가씨.”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구멍 쪽을 바라보던 에린은 두 손을 끌어모아 기도를 올렸다.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저희의 선하디 선한 아가씨를 지켜주소서.
그 때였다. 여태 잠잠하던 대지에서 갑작스레 진동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서있는 것조차 힘든 격동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뒤섞인다.
“에린님!”
두 팔로 에린을 들어올린 칼은 인파를 뛰어 넘어 인근의 건물 위에 올라왔다.
“아가씨께서 무언가를 하신 걸까요?!”
“필시 그럴 것입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실패할 리 없으니까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을 뚫고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와 네베라. 주신의 사도와 마법의 사도가 저 아래에서부터 쏘아지듯 나타난 것이다.
칼과 에린은 자신의 주인이 무사하단 사실에 안도하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둘의 모습을 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 뭐죠?”
“글쎄요. 아가씨이시니 무언가 뜻이…”
“꺄악!?”
점점 격해지는 진동에 넘어질 뻔한 에린을 붙잡은 칼은 괜찮냐고 물으려다 어둠을 뚫고 나온 괴물의 모습에 입을 헤 벌렸다.
저건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였다. 대지에 서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야 할 괴물이었다.
“에린님! 잠시 여기에 계십시오!”
“칼님!?”
“니아!”
– 활약할 시간이닷!
니아가 일으킨 바람을 딛으며 허공을 내달린 칼은 주변의 인간을 향해 손을 뻗으려하는 괴물의 촉수를 베어 넘겼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움직이십시오! 당장!”
칼의 고함소리에 마법사들이 저마다 마법을 펼친다. 허나 늦다.
저 괴물이 지닌 강함에 비해 대처가 너무 허술하다.
저들이 정비를 갖출 때까지 버텨야해! 최소한 아가씨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라도!
두려움을 억누른 채 칼이 결의를 다지던 그 때 저 드높은 하늘 위에서 태양이 생겨났다.
본래 하늘에 자리하던 태양보다도 더욱 커다랗고 뜨거우며 밝은, 주신의 기적.
앞서 했던 모든 결의를 잊어버린 채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보던 칼은 태양이 점차 커지는 것을 보다 그 아래에 선 자신의 주인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아가씨에게 따라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가씨에게 뒤처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저 분의 뒤를 따라갈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하늘에서 떨어진 태양이 대지에 드리운 어둠을 향해 내리꽂힌다.
악의 하수인은 빛을 밀어내기 위해 발악하지만 그 때마다 태양은 더 밝은 빛을 낼 뿐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어둠과 빛의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크기를 키우길 거듭하던 빛이 터져나가며 도시의 하늘에서 따스한 눈송이들이 떨어진다.
방금 전까지 괴물이 존재감을 넘실거리던 구멍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광장의 한 가운데엔 오롯이 자그마한 여자아이 한 명만이 서 있었다.
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보석 같은 눈동자로 세상을 둘러보다, 자신의 하얀 피부를 매만지고는, 신마저도 홀려버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누가 저분을 의심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존재가 저 분이 주신이 택한 영웅이란 걸 부정할 수 있겠는가.
아가씨야말로 이 세상을 구원할 사람이고 먼 과거의 용사를 이은 영웅이며 위대한 주신이 선택한 사도다.
저 분이 나의 주인이다.
주변에 흩날리는 신성 속에서 홀로 선 루시가 너무도 아름다워 눈물을 흘릴 뻔 했던 칼은 그녀의 옆에 떨어진 무언가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흙먼지 사이에서 얼굴을 든 마법의 사도, 네베라는 퍼뜩 일어나선 루시에게 달려들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놓아버리면 어쩌란 거에요!”
“하늘을 날지도 못해? 따까리 수준이 많이 낮네.”
“최소한 대처할 시간을 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 머리가 하얘진 상황에서 뭘 어쩌란 말인가요! 죽을 뻔 했잖아요!”
“아깝다. 죽지. 패배자도 슬슬 따까리를 바꾸고 싶어 했을 것 같은데.”
“그게 저한테 할 말인가요!?”
“왜? 긁혀? 너도 네 수준이 낮은 게 느껴지나봐?”
“아악! 당신! 절대 용서 못 해요!”
네베라가 루시에게 달려드는 걸 본 칼은 허탈한 숨을 내뱉고서 루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호기롭게 달려들었다가 루시에게 짓밟힌 네베라는 칼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고, 무시당했다.
*
마법의 신을 모시는 교회의 접견실.
나한테 달려들었다가 짓밟힌 게 마음에 안 드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네베라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당신 같은 꼬맹이가 주신의 사도라니. 믿기 힘드네요.”
“너처럼 빈곤한 여자가 패배자의 졸개인 건 믿음이 가.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많잖아.”
“입 좀 그만 나불댈 수 없어요!? 하아. 진짜. 괴물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나 멋있었는데.”
“흐응. 그렇게 반해버린거야? 너무 허접한 여자네.”
“저 남자 좋아한다고요! 남자!”
얘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네. 툭툭 건드릴 때마다 바락바락 달려드는 게 귀여워.
모니터 너머에서 볼 때는 때려주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중간에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하아. 아무튼 당신께서 말한 게 모두 사실이라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대륙 각지에서 이 곳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뇨.”
교황이 아그라를 부활시키려 하는 이상 이와 같은 재앙은 곳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단순히 아그라의 수하들 뿐만이 아니다.
대형던전에 봉인되어 있는 악신들도 알을 깨고 나올 것이고 그들의 수하들 또한 대지를 박차고 등장할테지.
신화의 시대가 돌아온다는 건 신들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된다는 것이고, 전쟁이 시작된다는 건 수많은 희생이 생긴단 의미다.
다만 아직 대륙에 있는 이들은 이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
어쩌겠는가.
수백년 동안 신이란 존재는 우리와 한없이 멀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악신이 부활할 것이라 소리쳐봐야 누가 들어줄까.
신들의 사도가 하나 같이 목소리를 내는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건지는 알겠습니다. 저 또한 무의미한 희생을 바라진 않습니다. 당신의 대업에 참여하도록 하죠.”
“다른 멍청이들 설득할 수 있지?”
“프레테님과 연결만 해주십시오. 다른 사도분들의 위치는 파악하고 있으니 설득해보도록 하죠.”
이걸로 도시에 온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했네.
“그런데요. 당신은 왜 직접 움직이지 않으십니까? 주신의 사도인 당신이 설득을 한다면 누구라도 수긍을 할 텐데요.”
“푸핳.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허접새끼들이 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이해했습니다. 역효과가 나겠네요.”
메스가키 스킬을 지닌 내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설득(물리)라면 가능하겠지만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근데 또 간단히 수긍하니까 그것대로 기분이 나쁘네!
마음에 안 들어!
고갤 주억거리는 네베라를 보며 툴툴거리던 중 네베라가 말을 멈추더니 히죽 웃음을 지었다.
뭐야. 쟤 왜 갑자기 웃고 난리야. 마법의 신이 너한테 뭐라도 말을.
위 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갤 든 나는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친구들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귓가에 울리는 새된 비명소리를 들으며 팔을 뻗은 나는 한 팔에 하나씩 조이와 페이비를 받아냈다.
이렇게 올리니까 확실히 무게 차이가 있단 게 느껴지네.
페이비 쪽 몇 키로 정도는 더 무거운 것 같아.
신성주머니만으로 이만한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은데.
페이비 진짜 살 찐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프레이는 가뿐히 바닥에 착지했고 아서는 안면으로 낙법을 한다는 기예를 선보였다.
얼빵이랑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다보니 얼빵균이 전염된 게 분명해.
“루시이이이!”
“영애니이이임!”
“루시.”
조이와 페이비가 양 쪽에서 날 끌어안는 통에 숨이 막혔다.
남자라면 누구나 이런 행복한 죽음을 꿈꿀 것이고 나 또한 그랬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삭막했다.
아니 숨을 못 쉬겠다고!
실시간으로 질식당하는 상황에서 부드러운 감촉이니 뭐니하는 게 느껴지겠냐!?
행복이란 감정도 여유가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거라고!
“두 사람. 그러다 루시 알른이 죽을 것 같습니다만.”
“앗! 루시!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영애님! 제가 감히 당신께 이런 짓을!”
아서의 중재 덕분에 풀려난 나는 숨을 가다듬다가 허리춤에 원숭이마냥 매달려있는 프레이를 발견했다.
이 꼬맹이는 대체 뭘 하는 거야? 떼어내려고 해봤음에도 완고히 버티기에 그냥 내 쪽이 먼저 포기했다.
그리 무겁지도 않고 이러다 질리면 떨어지겠지.
한참이 지나 진정한 친구들은 그제서야 내 앞에 네베라가 있단 걸 깨달았다.
“…마법의 사도님”
“잠깐만요. 페이비. 이 분의 마법의 사도시라고요!?”
“맞다. 조이. 예전에 공식석상에서 뵌 적이 있어서 기억한다.”
“예에.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마법의 사도. 네베라라고 합니다.”
떨떠름한 티를 내면서 고갤 숙인 네베라는 가늘게 뜬 눈으로 페이비를 바라봤다.
“성녀님께 이처럼 소녀스러운 모습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못 본 걸로 해주시겠습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흐뭇한 풍경이었는걸요.”
“으으으.”
귀까지 붉어진 페이비가 고갤 숙이자 네베라가 자그마하게 웃음을 흘린다.
내 앞에선 아무것도 못하던 녀석이 감히 내 친구를 건드려?
어떤 식으로 울려줄까 생각하며 그녀의 약점을 찾던 중 프레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저기. 마법의 신이 에르기누스님보다 대단해?”
바보가 폭탄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