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54
신화시대가 끝을 맺은 그 순간부터 마법사들 사이에는 결코 풀리지 않는 한 가지 난제가 있었다.
길거리에 나앉은 무명의 마법사부터 시작해서 마탑의 주인 자리에 오른 대마법사까지 저마다의 의견을 지닌 채 치열하게 논쟁하는 주제가.
‘마법의 신이 위대한가.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위대한가.’
이 논쟁의 중점은 과거 신화시대 당시 대마법사 에르기누스가 마법의 신조차 모르던 내용을 밝혀냈다는 언급에서 시작된다.
성기사 루엘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서적에 관련 내용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이 언급이 거짓일 가능성은 없다.
그래서 에르기누스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신의 오만함이 인간의 앞에 무너졌노라 외치며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우위를 주장한다.
반대로 마법의 신이 더 뛰어나다 이야기하는 이들은 먼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백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을 주요한 논지로 삼았다.
당시 마법의 신께서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지혜에 감탄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건 수백년 전의 일에 불과하다.
마법의 신께서는 그 뒤로 자신의 권능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확인하셨고 지금에 이르러선 한층 더 높은 경지에 이르셨으니 마법의 신께서 더 위대한 마법사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법의 신을 지지하는 이들마다 어느 정도 의견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중심이 되는 내용은 대개 이러했다.
그리고 이 지지자들의 대표격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바로 네베라. 마법의 신을 모시는 사도이며 제국의 대마법사 되는 존재다.
“어둠의 신과 싸워 본 여러분들이라면 아시겠죠. 신이란 존재는 그 개념이 직접 택한 존재입니다. 마법의 신께서는 마법을 대표할 자격을 마법이란 개념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헌데 이 분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어찌 세상에 존재하겠습니까!”
프레이의 질문을 듣자마자 목에 핏대를 세운 네베라는 몇 십분에 걸쳐 마법의 신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평소에 얼마나 에르기누스 관련으로 공격을 당했으면 에르기누스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저렇게 발광을 하는 걸까.
네베라의 귀기 어린 목소리는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자를 죽여버릴 것처럼 살벌했기에 우리들은 무어라 하지 않고 얌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쿠울.”
프레이. 너 지금 자냐!? 발악패턴을 이끌어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왜 폭탄을 터트리고 너 혼자 빠져나가는데!
“아시겠습니까!?”
“예. 네베라님.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마법의 신을 부정할 이는 어디에도 없답니다.”
맨 앞에서 이야기를 듣던 페이비가 부드럽게 말하자 네베라가 살짝 웃고는 헛기침을 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더 이상 떠드는 것도 별 의미가 없죠. 조금 있으면 모든 게 명확해질 테니까요. 후후. 설마 에르기누스님께서 다시 지상에 나타나실 줄이야. 운이 좋아요.”
패배를 의심하기는커녕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는 참 꼴보기 싫었지만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저거 건드렸다간 또 몇 십 분 동안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잖아. 그것보단 지랄하는 걸 조금만 들어주는 편이…
“당신께서 에르기누스님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나요?”
…조이? 여태 잘 참다가 왜 마지막에 와서 그러는 거니!?
그럼 네베라의 헛소리가 인심 좋게 추가된단 말야! 드디어 끝날 기미가 보였는데에에에!
“그 분께 무력으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격이 다른 분이니까요. 허나 마법의 지식이라면 다릅니다. 마법의 신께 직접 배움을 얻은 저라면 능히 굴욕을 되돌려줄 수 있겠죠.”
“세상이 개판이 나는데 여태 침묵하면서 복수만을 준비한 치졸한 분 말이죠? 훌륭한 스승님이시네요. 존경받을만한 분이에요.”
“하. 그러는 영애의 스승은 누구시기에 그러죠? 마법의 신께 대들 정도면 필시 훌륭한 분이시겠죠.”
“예. 무척이나 훌륭한 분입니다. 분에 넘치게도 진정 마법의 신이라 불려야 할 에르기누스님을 모시게 되었으니까요.”
“…예?”
“어머나. 이것도 모르고 계셨나요? 연구에 몰두하시느라 바깥세상에 무관심하셨나보군요.”
품 안에서 부채를 꺼내 촥하고 펼친 조이는 자신의 날카로운 눈으로 네베라를 내려봤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촌스러운 꼴을 하고도 당당할 수 없겠죠.”
악역영애다! 완벽한 빌런의 모습이야!
저런 조이의 모습이 대체 얼마만이지!?
얼빵이로 지낸 세월이 너무 길어서 기억도 안 나!
“파트란 가문의 영애. 사교계에서 상당히 유망하신가 보네요.”
…응? 왜 갑자기 칭찬? 비꼬는 것 같긴 한데 뭔 의미야?
<유망하단 건 어려서 뭘 모른단 소리다. 사교계를 언급한 건 바깥의 세상을 좀 보라는 비꼼이고.>
음습한 귀족 느낌의 말다툼인가! 난 절대 못 하는 방식이네!
“마법에 오랜 기간 귀의하신 분께서 칭찬해주시니 기쁘네요.”
<그 나이 먹도록 마법에 몰두하느라 결혼도 못 한 노처녀가 그리 말하니 웃기다는 소리다.>
“곧 알게 되시겠지만 마법의 길이 참으로 길고 길어서요. 지금도 끝을 모르겠다니까요.”
<뭣도 모르는 꼬마가 나대는 꼴이 가소롭다.>
“후후. 마법의 사도나 되는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무게감이 남다르네요.”
<여태 시간 낭비한 게 그렇게 자랑하고 싶으냐?>
어투만 고풍스러울 뿐 서로를 향해 직설적인 비난을 내리꽂던 두 사람을 실핏줄을 세운 채 서로를 노려봤다.
우아아. 여자들의 기싸움 무서워! 페이비! 빨리 이 두 사람 좀 말려봐! 이러다 칼부림 나겠다!
내 간절한 눈빛을 알아차린 페이비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분?”
“…죄송합니다. 성녀님.”
“미안해요. 페이비. 스승님께 관계된 이야기다 보니.”
한 마디로 소란을 멈춰 세운 페이비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두 사람에게 기다리라 말하고서 내게 다가왔다.
“설교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요.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오시겠어요?”
“그럴게. 네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지루하니까.”
고…맙다!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탈출하려던 순간 페이비가 날 붙잡았다.
뭐. 뭔데. 나 잔소리 들을 만한 일 한 거 없어!
“켄트 영애는 남으세요.”
“…쿨.”
“자는 척하셔도 소용없어요.”
“싫어. 성녀님 재미없잖아.”
“켄트 영애.”
페이비의 미소가 굳는 게 보이자마자 우악스럽게 프레이를 떼어내고서 방을 탈출했다.
저 안에서 탈옥을 꿈꾸는 이들의 소란이 잠시 울려퍼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고요로 물든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난 아서는 무슨 죄를 지은걸까 생각하다 몸을 돌렸다.
미안하다. 아서! 일단 나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
친구들이 여기에 왔다는 건 카리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곧 여기에 왔단 거겠지.
일단 카리아를 만나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들어봐야겠어. 한 번에 몰아칠 준비를 해야하니까.
교회 바깥으로 나온 나는 때 이른 어둠에 놀라 고갤 들었다.
밤이 된 건 아니구나. 그냥 커다란 사람이 해를 다 가리고 있을 뿐이었어.
“바보 파파. 뭐해?”
문 앞에서 우물쭈물거리는 베네딕에게 말을 걸었더니 그가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이상하다? 평소 같았으면 두 팔로 날 끌어안고서는 추하게 울음을 터트렸을텐데.
“우리 딸. 어디 다친 곳은 없니?”
“대접이 극진했거든. 어느 페도새끼 때문에 토할 뻔 했던 걸 빼면 나쁘지 않았어.”
“…미안하구나.”
하이고. 뭔가 했더니 또 그 소리야?
내가 지난 번에 말했잖아. 난 혼자서도 괜찮다고.
이번 일도 그래. 교황의 개입은 모두 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어.
그 자식이 악신의 권능을 대놓고 뿌릴 것도 몰랐지.
모두가 멈춰버린 건 불의의 사고야.
게다가 최악에 이른 상황 속에서도 발악하지 않고 얌전히 상대방을 따라간 건 나야.
내가 한 선택이라고.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내가.”
우물거리는 파파가 거슬려서 꽤 힘을 담아 배를 후려쳤다.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아 할 거라 생각했는데 베네딕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루시?”
“기운 빠지게 바보 같은 소리 할거면 꺼져. 파파. 찌질한 개허접파파는 필요 없으니까.”
“그. 내가.”
“진짜 계속 허접처럼 굴 거야?”
눈가를 찌푸리며 소리쳤더니 파파가 어색하게 웃고는 조심스레 난 끌어안았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멋진 파파가 되도록 노력하마.”
“풉. 여태 허접이었단 건 인정하는구나?”
“인정해야지. 바보같았던 걸 어쩌겠느냐.”
숨을 삼키며 베네딕이 뒤로 물러서자 흐뭇한 미소를 짓는 카리아와 목줄에서 벗어나 내게 달려들고자 발악하는 얼빠여우가 보였다.
“놔아라! 너 같은 아줌마한테 이런 일을 당해봐야 기분 나쁠 뿐이다!”
“이 개 년… 크흠. 오랜만이야. 고용주님. 잘 지낸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네.”
얼빠여우의 간절한 눈빛이 날 향했지만 가뿐히 무시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애완동물 취급 당한다. 최고의 굴욕이잖아?
우후훟. 아주 보기 좋네.
다음 번에는 칼한테 산책을 시키라고 해볼까.
“루시이이이! 날 버리지 말아다오오오!”
“일단 고용주님이 없는 동안 최대한 전력을 끌어모아 두긴 했어.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잘했어. 연애를 할 때도 이렇게만 하면 될 텐데 왜 아직도 결혼을 못 한 걸까. 아! 연애를 못하지 참?! 미안해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야.”
“진짜?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해주는 남자가 있다고? 어느 정신나간 놈이야?”
“…왜 하는 말마다 진심인거야?”
이런. 들켰네.
혀를 베에 내밀면서 카리아를 놀렸더니 그녀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더 이상 하면 진짜 폭발할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
퍼어엉!
저 위에서 들려온 폭음에 놀라 고갤 들었더니 건물의 벽 일부가 날아간 게 보였다.
“오냐! 꼬맹아! 주제파악을 시켜 주마!”
“나이도 있으신데 그렇게 열을 올려도 괜찮으시겠어요. 아주머니?”
페이비의 중재가… 실패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