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6
아드리는 어젯밤 두 사람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야기를 해주었다.
잔뜩 겁을 먹은 기사와 여유로워 보이는 여자아이가 들어온 일.
두 사람이 저택의 길을 외웠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하로 향한 일.
열쇠로 문을 열고서 아래로 향한 일.
그리고 던전을 찾아내 안으로 들어간 일.
– 두 사람 다 엄청나게 대단했어!
던전의 안으로 따라 들어간 아드리의 묘사는 와아!니 사삭!이니 파바박!이니 하는 의성어가 잔뜩 섞여 있어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 내용을 정리하면 이랬다.
무덤에서 좀비가 기어 나왔지만 그를 상대하지 않고 안으로 돌파.
아직 이승에 남은 사령인 적을 쓰러트렸다고.
“사령? 그걸 어떻게 쓰러트린 거야?”
비시는 다른 몬스터는 몰라도 사령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던전의 보스급 몬스터인 사령은 보통 물리적인 공격 자체가 먹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느 쪽이건 물리공격이 주력인 기사이지 않나.
아카데미의 교수인 칼 선생님이니 무언가 방법이 있었던 걸까?
– 응! 여자애가 메이스로 퍽퍽하니까 억!하고 죽었어!
그 망나니가 메이스로 퍽퍽 하니까 죽었다고?
그러고 보면 저번에 입학식 때 보니까 신성마법을 썼었지.
그걸로 사령을 쓰러트린 건가.
보스급 사령을 쓰러트릴 정도면 루시가 지닌 신성력이 꽤 강한가 보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을 모욕하던 사람이 그런 신성력을 지닐 수가 있나?
진짜 신에게 사랑받기라도 하는 거야?
– 그리고 나서 던전에서 나오더니 나한테 이 리본을 선물해줬어!
아드리는 그리 소리를 치면서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리본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리본이 생겨났네.
– 예쁘지?!
“예쁘긴 한데. 그걸 대체 어떻게 받은 거야?”
아드리는 유령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현실 세상에 개입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죽었던 그 상태에서 변화할 수도 없어야 한다.
보통이라면 리본을 받아서 머리에 착용할 수 없어야 한단 말이다.
– 몰라! 주니까 받아졌어!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기대 하겠니.”
– 내가 뭐 어때서!
비시는 아드리가 투정을 부리는 걸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생각했다.
이것도 그 망나니가 뭔갈 한 거겠지.
루시 알른. 그 사람은 도대체 뭐야?
일 년 전쯤에 사교계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평소의 망나니였잖아.
그런데 요 일 년 사이에 왜 이렇게 많이 바뀐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펜을 잡지도 않던 사람이 소울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질 않나.
지난 번 입학식에서 있었던 소란에서 최전선에 서지를 않나.
겨우 1년 만에 이렇게 많이 바뀔 수 있는 거냐고.
이게 재능이라는 거야?
그 망나니는 그저 성격 더러운 게으른 천재였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게 있는 걸까.
– 으음. 근데 그 여자애 신기하긴 했어! 내 정체도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던전에 대해서도 다 아는 것 같았고. 이 저택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고. 도대체 뭘 하는 아이인 걸까?
“몰라.”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아드리의 물음에 대충 대답을 한 비시는 뒷목을 주물렀다.
사령술사라는 약점을 잡혀버린 이상 난 그녀에게 대들 수 없어.
금기를 건드려버렸다는 게 들키는 순간 교회에 찍혀 버릴 테니까.
나 같은 중소 귀족의 자제는 그대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릴 걸.
그걸 입 다물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마당에 이 저택에 존재하던 던전까지 없애줬으니.
망나니 영애는 그 자체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당분간 뒷담화를 나누는 건 조금 자제할까.
*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눈을 뜬 비시는 수련장을 찾았다.
그녀에게 사령술을 알려 준 이가 반드시 이른 시간 수련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기에 비시는 되도록 새벽에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어제는 늦잠을 자서 수업을 들으러 가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묶은 채 새벽의 수련장에 도착한 비시지만 수련장에는 그녀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은 수련장의 외각을 전력질주하고 있는 루시와 프레이였다.
거의 말에 비견될 정도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허접 검사. 슬슬 힘들지 않아? 숨이 차는 데?”
“전혀. 네가 힘든 거 아냐?”
“풋. 나한테 발린 허접 검사가 날 도발하다니. 가소롭네.”
“으으으.”
어떻게 저런 속도로 달리면서 대화를 나눌 수가 있는 거지?
두 사람을 질린 듯이 바라보는 건 비시뿐이 아니었다.
수련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자그마한 어린 아이 둘이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속도로 달리는 풍경은 너무도 신기했던 것이다.
다만 둘 중에 하나가 온갖 악명을 떨친 루시 알른이기에 보다가도 시선이 닿을 것 같으면 고갤 돌릴 뿐.
비시는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둘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비시와 루시의 악연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때는 마력학의 수업시간이었다.
아직까지 소울 아카데미에 익숙하지 않아 여기저기를 헤매다 간신히 교실에 도착한 비시는 손을 흔드는 친구를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지각인데.”
“시끄러.”
길치인 그녀를 비웃는 친구에게 일갈을 한 비시는 자리에 앉아서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교실의 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텅 빈 공간이 있었다.
바로 루시 알른의 주변이었다.
사교계를 돌아다니며 루시 알른에게 호되게 당했던 귀족들은 당연스레 그녀의 주변을 피했고.
몇 안 되는 평민들도 눈치를 보고서 그 주변에 다가가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루시 알른은 혼자가 된 것이다.
보통 저런 상황에 처하면 기가 죽거나, 우울해 할 법도 하거늘 루시 알른은 태연히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는 것처럼.
“비시. 이젠 저 사람을 망나니 영애가 아니라 외톨이 영애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
피식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친구에게 무심코 대답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제 루시 알른이 했던 경고가 떠올랐기에.
분명 칼 선생님이 저 망나니한테 말을 해 준 거겠지.
잘생긴 사람이라 착한 줄 알았는데 소인배마냥 그런 거나 꼬박꼬박 일러바치고.
그 사람한테 도대체 루시 알른은 뭐인 거야?
“그?”
“아니 그냥. 외롭겠다 싶어서.”
할 말이 없었던 비시가 되는 대로 이야기를 하자 그녀의 친구가 가볍게 웃었다.
“외롭긴 무슨. 지가 만든 건데. 3왕자님한테 불쌍하단 소릴 지껄이는 년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쓰겠어?”
비시의 친구가 하는 말은 옳았다.
입학시험과 입학식의 일 때문에 생긴 그녀가 바뀌지 않았을까라는 여론을 박살낸 것은 루시 본인이었으니까.
감히 3왕자님을 불쌍왕자라고 부르다니.
비시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진짜 미친 거 아니냐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지만.
비시가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의 친구가 눈을 좁혔다.
“뭐야. 비시 오늘은 착한 척하기로 한 거야?”
“착한 척이라니. 난 언제나 착했어.”
“가식적인 년.”
두 사람의 대화는 마력학 교수가 교실에 찾아옴에 따라서 끊어졌다.
“마력의 흐름은…”
그렇게 한창 수업이 진행되던 중 교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알른 영애님.”
그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루시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루시 알른은 엎드려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엎드려 있던 루시가 다급히 고갤 들자 마력학 교수가 약간 날 선 목소리를 냈다.
“방금 전에 제가 설명했던 게 무엇인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그 물음에 루시가 입을 다물었다. 대답 못 하겠지.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으니까.
“완전 망신 당하겠다.”
고소하다는 듯 옆에서 비시의 친구가 웃었지만 그녀가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허접 교수. 당신이 방금 한 설명은…”
루시 알른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교수의 물음에 답했다.
그 대답이 얼마나 완벽했던지 한 소리를 하려던 마력학 교수마저도 말을 더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잘… 잘 했어요. 앉으세요.”
자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대답을 한 거야?
설마 칠판에 적힌 걸 보고 대충 추측을 한 거야?!
하. 저래서 천재라는 족속들은.
비시는 그 모습이 질투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수업이 끝난 후 비시가 다시금 루시의 이름을 듣게 된 건 점심 무렵이었다.
사교계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 베인즈 영애가 분통을 터트리면서 식당에 들어온 것이다.
웅성이는 소리에도 베인즈 영애는 자신의 울분을 감추질 못했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망나니 영애한테 져서 저러시는 거일 걸.”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 준 것은 대련 수업을 듣고 온 비시의 친구였다.
“알른 영애한테?”
“그래. 망나니가 다른 건 몰라도 싸움 하난 진짜 잘하거든. 베인즈 영애가 손 하나 못 댔다니까?”
“대단하네.”
“이건 놀랄 것도 아냐. 저번엔 켄트 영애를 이겼다니까.”
켄트 영애라면 왕국에서 개최되었던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실력자.
차기 검성으로 지정될 거란 예상이 자자한 괴물 중의 괴물이잖아.
그런 사람을 대련에서 이겼다고?
“진짜로?”
“그래.”
소울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1등을 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데다가,
켄트 영애를 이길 정도의 무까지 갖추었다는 거야?!
거기에 더해서 사령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의 신성을 가지고 있고?
“불공평해.”
한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재능이 집중 되어도 되는 거야?
“진짜 신의 사랑을 받는 건가.”
“야. 무슨 불경한 소리를 하는 거야.”
비시가 중얼거리자마자 그녀의 친구가 한소리를 했다.
“신의 사랑을 받는 분은 성녀님같은 천사지. 저딴 성격의 망나니가 신의 사랑을 받는 걸 리가 없잖아.”
그것도 그런가.
성녀님의 새하얀 성격을 생각해보면 망나니 같은 사람을 신이 좋아 할 리가 없지.
“차라리 악마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모를까.”
비시는 친구의 말을 듣고서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러다 식당에 들어 온 루시를 보고는 입술을 굳혔다.
어. 음.
방금 한 말 못 들었겠지?
*
하루가 길다.
그게 최근에 내가 가장 자주하는 생각이었다.
이 세상이 게임일 당시에 하루라는 시간은 빠르면 10초만에도 넘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수업을 들었다는 건 대충 텍스트로 넘기고 이후 저녁과 밤에 무얼 할지만 선택하면 족했으니까.
그렇지만 이게 현실이 되니 체감이 달랐다.
24시간을 온전히 보내야 한다는 게 이렇게 길 줄이야!
차라리 가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루 종일 수련을 할 수 있었다면 지루하진 않았을 텐데.
여기서는 졸리고 재미없는 수업을 꼬박꼬박 들어야 하니까 그게 너무 힘들어.
애시당초 소울 아카데미의 체험기간은 할 거 몇 개 하고 나면 넘기는 게 국룰인 구간이라고!
왜 이 기간을 스킵할 수가 없는 건데!
퀘스트라도 할 수 있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요즘 들어서 내가 말을 걸기만 하면 다 도망가 버리니까 그것도 못하고.
아아. 빨리 이 기간이 지나가면 좋겠다.
일주일이 지나서 정식으로 학기가 시작돼야 소울 아카데미의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