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60
대표격을 맡은 신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킨 덕분일까.
그 아래에 있는 신들은 내가 따로 말을 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간슈나 에르기누스를 통해 협력의 의사를 전달했다.
역시 사람이고 신이건 간에 말로하는 것보다는 본보기를 보이는 게 빠르다니까.
지들이 좆될 것 같은 상황에 처하니 그제서야 빠릿빠릿 해지잖아.
차례차례 올라오는 보고를 듣고서 만족스러워하던 나는 얼마가 지나고 나서 커다란 난제에 봉착했다.
“알른 영애가 다른 사도들의 앞에 서야 할 것 같다.”
나, 간슈, 변태 사도, 페이비 등 신과 관계된 이들을 불러 모은 에르기누스는 당당하게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였다.
“닭장냄새에 중독되기라도 했어? 뭔 정신 나간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어지간하면 그대를 공식석상에 내세우고 싶지 않다. 다수가 선 곳에서 연설을 시키고 싶지도 않아! 그대가 모두의 앞에 서면 어떤 소리를 지껄일지 아는데 미쳤다고 이러겠나!”
“풉. 머저리다운 사고방식이네. 수백년 동안 썩은 여자 하나 안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
“잘 들어라! 루시 알른! 난 그대에게 동정찐따라는 소리를 들었고 나의 하나뿐인 연인은 네게 닭장냄새가 난다며 비난당하고 있다! 이런데도 내가 그대의 혀가 불러올 재앙에 대해 모른다고 단언할 수 있나!?”
울분이 묻어나오는 에르기누스의 외침에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니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굳이 나를 앞세우려는건데.
자칫 잘못하면 교황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니까?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종교 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게 실로 비참하다만 현실이 이렇다. 루시 알른. 그대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일단 이야기 좀 들어봐. 고용주님. 빌어먹게도 납득이 될 테니까.”
카리아의 말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나는 어디 한 번 지껄여보란 의미에서 눈썹을 까딱였다.
에르기누스는 카리아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탁자 한 가운데에 대륙의 지도를 띄웠다.
“얼마 전 알른 영애가 활약을 해 준 덕분에 대개의 신격은 협력을 약속했다. 그 속내가 어떤가에 대해서까지 알 수는 없다만 최소한 겉으로는 협조적인 체를 하고 있지. 헌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신의 의견이 곧 지상의 의견이 될 수 없단 점이다.”
과거 신들이 인간의 옆에 머물던 시절과 달리 작금의 신은 일반적인 신도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사도를 비롯한 몇몇 이들을 통해 뜻을 전하는 건 가능하지만 신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제할 수는 없다.
“세상의 위기 앞에 뭉치자는 명분은 좋다! 그렇지만 명분이 좋다 하여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아!”
신화의 시대가 끝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종교에 귀의한 이들은 현실감각이 부족한 경향이 있었다.
항시 신들이 곁에 있어 주며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현실에 대해 고민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허나 신화의 시대가 끝남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다.
돈이 부족했다. 땅이 없었다. 기도를 할 곳이 사라졌다. 신도들이 줄어갔다.
신들이 대지에 머물 때만 하더라도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변한 것이다.
이 속에서 신앙을 유지하는 일은 독실함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하나 둘 종교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상업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저들이 살아남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가 상업화가 되면서 다른 종교를 경쟁자로 보기 시작했단 게 문제야.”
신들이 사라진 충격으로 혼돈이 자리한 대지에 상생이란 단어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한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종교를 짓눌러야만 했다.
“현재 대지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아. 특히 비슷한 지역에 머무는 이들은 갈등의 수준이 심각해. 서로를 이단이라 소리치며 어떻게든 없애려 들고 있지.”
수백년에 걸쳐 이어져 온 종교의 갈등을 신의 한 마디로 해결할 수는 없다.
신의 사도가 제 아무리 필사적으로 평화를 주장한다한들 하루 아침에 갈등이 봉합되는 건 불가능하다..
이 세상이 위험하다고?
악신이 부활해서 대륙을 멸망시키려 든다고?
수백년 동안이나 이어져 온 평화가 하루아침에 깨져버릴 거라고?
그 누가 이런 말을 믿겠는가.
그들이 사는 곳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평화로울텐데 하루 아침에 일상이 뒤집어질거란 소리를 왜 믿어야 하는가.
“인간이란 존재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영민하고 또한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둔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눈 앞에서 벌이지지 않는 한 결코 세상의 위기를 믿지 않을 것이야. 예를 들어서, 주신의 사도라도 갑자기 등장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이 위기에 빠졌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내가 전면에 서서 모두를 설득해야 한다.
루시 알른이라는 인간과 설득이라는 단어가 동떨어져 있는 것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르기누스의 설명을 모두 다 들은 나는 얼굴을 쥐어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오. 신이란 작자들이 하나 같이 허접들밖에 없는 거야!?
왜 자기 신도들 하나 설득을 못 하는데!
너 새끼들이 그러고도 신이야!? 그따위로 하고도 칭송받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그런 말을 하면 그대로 되돌아온다. 주신께서도 제대로 설득을 못하시지 않았나.>
‘그거야 주신이 허접변태새끼니까 그렇죠!’
<…어. 어어어?>
생각해보면 이 신화고 저 신화고 신의 대리인이 박해받지 않는 걸 본 적이 없네!?
자기 뜻을 대행하는 사람한테 왜 시련을 내리냐고!
사람을 고용했으면 제대로 일을 할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왜 등에 짐부터 올리냔 말야!
“…허접성녀가 대신하면 안 돼? 얘도 쪼끄마하게 허접주신의 신성을 가지고 있잖아.”
“영애님. 저도 당신의 고생을 줄여드리고 싶습니다만 작금의 저는 주신교회의 얼굴이란 상징성이 너무도 강한 상태입니다. 타 종교의 미움을 사는 주신교회의 대표가 한 가운데에 서봐야 반감만을 살테죠.”
진짜 나밖에 안 되는 거야?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하며 이마를 짚었더니 변태사도가 싱긋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영애.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전혀 신용이 가질 않았다.
“간슈님께서도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실 겁니다.”
“개인적으로 난 이 녀석이 곤란해하는 걸 보고 싶다만.”
“말은 이렇게 하셔도 잘 해주실 걸 압니다.”
진짜 전혀 믿음이 가질 않았다.
*
곧 있을 일에 대한 걱정을 메이스를 휘두르며 해소하는 동안에도 에르기누스의 계획은 시시각각으로 진행됐다.
여러 신들의 명령에 따라 각지의 힘있는 종교의 사도들이 왕국으로 왔다.
악신 아그라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은 곳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관리가 편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유란다.
본래라면 자기 구역을 벗어나는 걸 선호하지 않는 사도들이다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주신교회의 성녀가 예술교단과 마법교회의 사도와 협력해 압박을 한 탓도 있고 그들의 신이 명령을 내리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조를 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만 그 쪽은 에르기누스가 알아서 한다 했으니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
애초에 신경 쓸 여력이 없기도 하고.
당장 내 눈 앞에 닥친 일이 문제인 걸.
“여느 때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영애.”
히죽거리며 웃는 변태사도를 내쫓고서 에린에게 몸을 맡긴다.
평소에 입던 갑옷과 망토를 걸쳤을 터인데 타인의 손길이 더 들어간 것만으로 무언가 달라진 느낌이다.
“부디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원하겠습니다. 아가씨.”
에린의 인사를 뒤로 한 채 바깥으로 나오자 변태사도와 페이비가 나를 에스코트했다.
한 쪽는 대륙에서 칭송받는 성녀. 다른 한 쪽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찾아헤매는 예술가.
누구나 동경할만한 광경이었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당장 도망치고 싶어!
위장이 찢어질 것 같아!
아카데미가 휴학한 후부터는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어서 좋았는데 다시 또 지옥으로 걸어들어가야 하다니!
“알른 영애. 문을 열겠습니다.”
“…잠깐.”
문에 손을 가져다대려는 변태사도를 가로막고서 심호흡을 한다.
괜찮아.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냥 저 안에 들어가서 내가 주신의 사도라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이런 꼬맹이를 사도로 삼은 변태에게 떠넘기면 되니까! 어제 미리 할아버지랑 계획도 짜뒀잖아!
“자. 영애님. 가시죠.”
페이비의 환한 웃음을 본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그냥 저 안에 있는 애들 다 때려 부순 다음에 반 강제로 인정시키면 안 되나?!
사도들을 다 찍어누르는 편이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더 쉬울 것 같은데!
– 우후후. 알른 영애께서 이토록 귀여워질 수도 있군요?
머리 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더니 내 앞에 자그마해진 요정여왕이 등장했다.
– 평소에도 이런 모습을 자주 보여주시면 좋을 텐데.
“난 널 자주 보기 싫은데. 닭장냄새가 옮을 것 같단 말야.”
– 정말 너무하세요! 에르기누스님의 호칭은 바꿔주셨으면서 저는 왜 그대로인 건가요!
글쎄다. 그건 허접주신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어쩌면 그 놈한테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올지도 몰라. 메스가키 스킬은 주신이 내어 준 스킬도 씹어버리더라고.
– 너무 껄끄러워 하지 마세요! 저도 도와드리러 온 거니까! 이래뵈도 전 대단한 존재라고요? 제가 옆에 있으면 다소 불쾌한 것도 참을 거에요!
콰앙!
“재잘재잘재잘. 안 들어오냐. 꼬맹아. 너 때문에 시간 낭비하러 왔단 말이다.”
문을 박차고 나온 것은 붉은 머리칼을 짧게 깎은 남자였다.
얼굴에 상처가 몇 개 있는 게 인상적이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게임 속에 출연하지도 않은 잡몹이란 거겠지.
메스가키 식으로 말하자면 자코려나?
“네 눈엔 이게 참는 걸로 보여? 찐따가 조루라 참는 게 이 정도밖에 안 돼?”
– 어머나. 그의 정열적인 밤에 대해 말씀드려도 괜찮나요?
“어이. 사람 안 보여?”
미간을 찌푸리는 남자를 보며 생각한다.
이 잡몹이 나댄 덕분에 좋은 분위기에서 시작하긴 이미 글렀어.
그러니까 조금은 내 멋대로 해도 괜찮겠지.
내 잘못 아냐! 이 새끼가 먼저 시비 건 게 잘못이야!
그치?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만.”
요정들을 주변으로 흩뿌렸다. 시야가 뒤바뀐다.
“후딱 말하고…”
상대는 날 무시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공격당할 거란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다.
그걸 확인하고서 손을 뻗는다.
근육질의 몸이 장식은 아닌 듯 남자는 내 움직임에 반응하려 했지만 나의 새로운 시야는 그것마저도 확인하고 있었다.
손의 궤도가 비틀리며 남자의 얼굴을 붙잡는다.
꼴에 사도이긴 하니까. 좀 거칠게 해도 죽진 않겠지.
힘을 실어 그의 얼굴을 바닥에 박아넣은 난 빠져나오려 발악하는 남자의 고간을 짓밟아줬다.
“자♡ 바라던 대로 해줬는데 좋아?♡ 움찔거리는 게 마음에 드나 보네?♡ 역겨운 변태 새끼♡”
턱을 걷어차는 걸로 마무리를 지은 나는 경계심이 서린 사도들의 시선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풉♡ 뭐야. 허접들♡ 쫄았어?♡”
역시 나한텐 이 쪽이 어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