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61
경악과 당혹이 서린 시선을 느끼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아카데미에 막 입성했을 때만 하더라도 저런 눈빛을 받으면 당황해선 어찌할 줄을 몰라 했었는데 말야.
지금은 당혹이 서린 저런 시선들을 보고 있으면 즐겁다는 생각이 살짝 샘솟아.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
아무렴 어때. 지금 즐거우면 그만이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시선을 받으며 가운데의 상석으로 향했다.
가운데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꼴 즈음 내게 얻어맞아서 반쯤 생식기능을 잃었을 남자가 페이비의 치유를 받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날 처음 보자마자 꼬맹이라 소리쳤던 녀석은 조소 어린 내 눈빛에도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으으으. 건드리고 싶다.
자존심을 질근질근 밟아서 사탕을 떨어트린 어린애처럼 서러운 울음을 흘리게 하고 싶다.
그치만 그럼 안 되겠지. 이제는 명분이 없으니까.
아쉽다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으려니 할아버지가 한 소리를 했다.
<그래서 이 개판은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더냐.>
‘굳이 수습해야 하나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어차피 전 주신의 사도라는 걸 증명해야 하잖아요.’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다른 사도들에게 내가 주신의 사도라는 걸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세상이 위기에 빠졌다는 걸 모두가 납득하고 내게 협력을 할 테니까.
모두 내가 주신의 사도란 사실을 납득하면 자연스레 내가 이들을 이끄는 입장이 될 거다.
그럼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지금과 비슷한 일을 해야 할 텐데 그 때마다 이번처럼 마음을 졸이고 살 순 없어.
그러니까 미리 깽판을 친 다음 서열을 정리해두는 편이 낫지.
아. 쟤는 원래 저런 미친년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두면 눈치 볼 일도 없잖아?
<일리가 있군.>
방금 전에 막 만들어낸 변명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그럴 듯 했다.
캬하핳! 내 멋대로 깽판을 칠 수 있는 명분이 이렇게 생기다니!
“와아♡ 시선들이 하나 같이 추잡하네♡ 내 속살이 그렇게 보고 싶어?♡”
망토 끝을 붙잡고서 팔랑팔랑거렸더니 어느새 내 옆으로 온 페이비가 다급히 내 손을 붙잡았다.
“여. 영애님!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애?♡ 독점하고 싶어?♡ 허접성녀 은근히 음란한 구석이 있구나?♡”
“…네!? 저. 전 단지 영애님을 걱정해서!”
“만담은 그쯤 하시지요.”
페이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중 내 오른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을 끊었다.
이 아저씨 얼굴은 내 기억에 남아 있어. 상업에 관련된 신의 사도인가 그랬을 거야.
이 사람이 만든 부적을 들고 다니면 돈 수급률이 올라가서 노가다 할 때 애용했지.
“우리의 신들께서 당신에 대해 말씀해주시긴 했습니다만 저흰 아직 당신을 신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신의 사도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으니까요.”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어?♡ 설마 내 장신구에 자리를 빼앗겨서 그래?♡ 푸하핳♡ 추하네~♡ 다 큰 아저씨가 겨우 그런 걸로 삐지다니♡”
참고로 상인들이 들고 다니는 부적의 지위는 예술 교단에서 만들어낸 장신구가 가로챘다.
효과가 더 좋아서 그렇다는데 아마 큰 격차가 나진 않을 거야.
그냥 냄새나는 아저씨가 만든 것보단 귀여운 여자애가 그려진 쪽을 선호하는 거겠지.
“제가 겨우 그런 것으로…”
“당신 잘못은 아냐♡ 생긴 게 그런데 어쩌겠어~♡ 비열한 입꼬리 좀 봐♡ 완전 사기꾼 같잖아♡”
테이블 어디선가 웃음이 터져나오자 상인의 사도가 눈썹을 치켜 들면서 고갤 돌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에 떨리는 어깨를 보니 만족감이 차올랐다.
“하여간 질투심이 가득한 폐급 아저씨는 내가 허접주신의 사도란 걸 확인하고 싶은 거지?”
“…그렇습니다.”
내가 사도란 사실을 입증할 방법은 여럿이 있지만 역시 제일 직관적인 건 주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해 보이는 거겠지.
보란 듯 웃으며 손 위에서 신성을 엮었다.
기적이 주어진 후부터는 보상창이 떠오른 적이 없지만 푸른 창만 안 떠올랐을 뿐 내 신성은 계속해서 짙어지고 있었다.
악신 아그라를 상대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보니 자연스레 성장하는 거겠지.
덕택에 지금의 나는 신성으로도 믿기 어려운 기행을 펼칠 수 있었다.
손가락 위에 피어오르는 신성을 엮어 마법진을 만들어낸다.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나지만 이것만큼은 별 어려움 없이 그릴 수 있다.
이건 불의 악신을 상대할 때 할아버지와 함께 펼쳐봤던 기적이니까.
자그마한 손가락 위에 신성으로 이루어진 마법을 쌓는다.
점이 면이 되고 면이 하나의 도형으로, 따스한 빛이 태양으로 바뀌도록.
완성된 태양을 허공에 놓아주자 기적이 방 안을 포근함으로 가득 채웠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날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들의 눈가에 경이가 깃든다.
따스한 빛을 향해 손을 뻗던 이가 물건을 떨어트리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누군가는 손에 입을 댄 채 나와 태양을 번갈아봤다.
또 어느 누군가는 놀라서 물러나다가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다른 이들이라하여 다를 건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태양을 바라보며 주신의 은총을 느끼고 있었다.
이쯤하면 충분하겠다 싶어 태양을 거두자 여기저기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만 봐도 알겠네.
여기에서 날 의심할 사람이 없다는 걸 말야.
“자♡ 쪼잔한 아저씨♡ 할 말 있으면 어디 해봐♡ 상스러운 목소리로 짖어대는 걸 보면서 비웃어주게♡”
“당신을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사도시여.”
이런 반응은 곤란한데. 좀 더 현실을 부정하면서 날뛰어주길 바랐단 말야.
재미없어.
혀를 차면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어느 하나 내 거만한 태도를 언짢아하는 이가 없었다.
네가 한 게 뭐 있느냐는 말 정도는 튀어나올 거라 생각했었는데.
“여러분들.”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가야하나 고민하던 중 변태사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분께선 여태까지 홀로 악신과 싸워오셨습니다.”
미리 설명을 해둔 거였냐.
잠깐만. 그럼 맨 먼저 나한테 달려들었던 놈은 이야기를 다 듣고도 나한테 덤빈 거였어!?
진짜 얻어맞고 싶어서 환장한 변태새끼였단 말야?!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를 치는 동안 변태사도가 말을 이었다.
“허나 이제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대륙에 도사린 재앙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의 말끝을 받아 페이비가 목소리를 냈다.
“우선 수많은 업보를 짊어진 주신 교회의 대표로서 여러분들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약조를 드립니다. 이 위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저희 주신 교회가 항시 최전선에 설 것이란 것을.”
단언하듯이 소리친 페이비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서 모두를 둘러봤다.
“그러니 여러분들. 이번 한 번만큼은 과거의 악연을 잊고 함께 손을 잡아 주십시오. 저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이들을 위해서. 세상이 악의로 가득한 구렁텅이라 소리치는 악신의 무리를 향해 당당히 틀렸다 외치기 위해서.”
울음기 서린 목소리로 호소하듯 내뱉은 말에 사도들이 서로를 살핀다.
그 속에서 흘깃흘깃 서로를 향한 적의가 드러났다.
에르기누스가 말했던 것처럼 종교 사이에 생겨난 감정의 골은 너무도 깊었다.
하루 아침에 바뀌는 걸 상상할 수 없을만큼.
“보고 있는 게 답답하니 의견을 더하마.”
한 쪽 구석에서 턱을 괴고 있던 간슈가 느릿하게 입을 연다.
“지금 이 곳에서 나누어진 이야기 중 어느 하나 거짓된 것이 없다.”
신의 이름을 지닌 자가 선사하는 위압감에 자연스레 시선이 모여든다.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믿지마라. 안 믿어도 상관없다. 대신 모든 것이 무너질 때 후회만 하지 마라. 한탄의 목소리를 기록하다간 속이 뒤집어 질 듯 하니.”
– 맹자들이여.
마지막으로 탁자 한 가운데에 선 요정여왕이 자신의 존재감을 흩뿌렸다.
두 손을 움켜쥔 채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웅을 인도하는 영웅담의 인물처럼 장엄했다.
– 여러분의 이름은 반드시 역사에 새겨질 겁니다. 존엄한 용사가 그랬던 것처럼. 고결한 기사가 그랬던 것처럼. 숭고한 성기사가 그랬던 것처럼. 찬란한 마법사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몸이 스러져도 당신들의 이름은 영원토록 이어지겠죠.
사도들 사이에 희미한 흥분이 서리던 그 때 여왕을 기점으로 꽃이 퍼지더니 그 너머에서 여왕의 본신이 강림했다.
“맹자들이여!”
어느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은 그녀는 주먹을 꾹 쥐고서 소리쳤다.
“당신들의 영웅담을 써내려가십시오!”
희열이 서린 뜨거운 숨이.
“여러분을 잊지 못하도록 만드십시오!”
열광이 담긴 따가운 시선이.
“모든 이들이 당신들의 이야기를 떠들게 하십시오!”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이.
“맹자들이여! 이 세상을 구하십시오!”
모두에게서 환호성을 이끌어냈다. 격양된 이들의 목소리 속에서 요정여왕이 내게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입을 달싹이는 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것 같은데.
<나중에 칭찬을 해달라 하시는 군.>
‘얼빠여우에요?’
<하하하. 여왕께서 네게 큰 도움을 주시지 않았느냐. 그 정도 부탁을 들어주도록 해라.>
‘저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어요.’
칭찬의 말을 내뱉는 순간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어떤 식으로 왜곡될지 몰라서 문제일 뿐.
어깨를 으쓱이며 여왕을 향해 눈웃음을 지어줬더니 여왕이 눈을 살짝 치떴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이 정도로 충분한 거야? 너 정말 쉬운 여자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편 나는 페이비에게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걸로 사도들의 설득은 끝났고 그 쪽 교회 사람들을 납득시킬 명분만 주면 되는데.
“알른 영애! 방금 전 당신께서 일으킨 기적을 보고서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잔뜩 들떠서 숨을 헐떡이는 변태사도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하며 턱을 까딱였다.
“영상! 영상입니다! 수정구에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기록해 전파하는 겁니다! 이를 본다면 누구라도 당신을 찬양할 수밖에 없겠죠!”
“세상에. 그거 너무 좋은 생각 같습니다! 프레테님!”
“그치요. 성녀님! 저도 왜 이걸 여태 떠올리질 못 한 걸까 한탄스럽습니다!”
영상. 영상이라.
…어라? 이거 생각보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