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65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신화의 시대가 찾아오는 것을 아예 막을 순 없단 점이다.
나를 찬양하는 이들 때문에 균형이 가파르게 무너지는 중이긴 하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신들의 부활은 예정조화다.
교황이 마음을 먹고 균형을 무너트리고 있는 이상 결국 신들은 이 대지에 내려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의 목표는 신화의 시대를 막는 것이 아니라 악신들이 만들어낼 피해를 최소화하고 그 안에 교황을 쓰러트리는 것이 된다.
이게 게임이었을 적에는 차근차근 여러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인맥을 쌓고 그걸 기반으로 영향력을 흩뿌려 재앙을 대비하는 형식이었는데, 지금의 난 모든 전제조건을 무시한 채 명성만으로 영향력을 선사하는 중이다.
사실 게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황이지. 아무리 잘나봐야 어린 천재에 불과했던 게임과 달리 주신의 사도란 직위를 지닌 채니까.
억지를 부려도 다들 무언가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넘어가준단 말야.
정신적인 피로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상황이라 해도 무방해.
그 정신적인 피로가 문제지만 말야.
“주신의 사도께서 입장하십니다!”
입구를 지키던 기사의 외침을 들은 난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안에 들어갈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왜 내 차례가 되니까 난리냐.
다리를 걷어차고 싶은 걸 억누르며 방 안에 들어온 나는 여러 지역의 지휘관 역할을 맡은 사도들과 카리아, 이외에도 주변의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확인했다.
영상의 영향력이 확실이 컸네. 궁중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왔잖아.
이상할 정도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반짝거리는 게 거슬리긴 한다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저게 길게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페이비의 안내를 따라 상석에 자리잡은 나는 인사도 없이 의자에 앉았다. 쓰잘데기 없이 책상이 높네.
목을 치켜 들어도 간신히 얼굴만 나오는 게 짜증나.
그런 날 흐뭇하게 바라보는 놈들은 더 열받고. 입술을 삐죽인 난 자리에서 일어나 페이비를 내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 위에 앉으니 그나마 시선이 높아졌다.
“여. 영애님?”
“왜 싫어하는 척 해? 이러고 싶어서 이상한 의자를 준비한 거잖아?”
“녜에?! 저. 전.”
“아아아. 시끄러워. 의자노릇이나 제대로 해.”
페이비의 허벅지를 톡톡 쳐서 입을 다물게 만든 나는 살짝의 기대를 지닌 채 고갤 들었다.
이제 영상에 나왔던 게 하나 같이 사기라는 걸 알겠지? 그치?
…어라아. 왜 눈빛들이 그대로일까.
아니 오히려 동정이나 짠함까지 느껴져.
뭐지? 예전 같았으면 지금쯤 누가 소리를 질렀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영상의 영향력이 이 정도라고!? 눈을 끔뻑거리다 탄식을 내뱉은 나는 책상에 기대어 턱을 괸 채 사람들을 둘러봤다.
“안녀엉. 페도 새끼들. 최선을 다해 정상인인척 하느라 수고가 많아.”
이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왜?!
그 수정구 선전영상이 아니라 최면어플이었던 거야?
메스가키한테 매도당하는 게 좋아서 견딜 수 없게 되는 저주라도 건 거냐?
진짜 미쳐버리겠네!
“너희따위에게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아줌마.”
카리아가 기다란 책상 한 가운데에 수정구를 올리자 그를 기점으로 커다란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집중해야 하는 놈들은 대형던전 옆에 사는 허접들이야. 거기에서 병신들이 하나 둘 튀어나올 거거든.”
제일 귀찮은 상대인 어둠의 악신은 에르기누스에게 잡아먹힌 지 오래다.
공허의 악신은 지난번에 거하게 처발려서 뭘 하질 못할 테고 불의 악신도 나한테 발리고 나서 얻은 상처를 완벽히 회복하지 못했을 테니 이 둘을 대처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겠지.
이제 남은 게 파괴의 악신 하나인데, 이 쪽은 라샤한테 휘둘리는 중이기도 하고 대처법이 대충 나오기도 해서 괜찮을 거다.
고인물의 시점에서 여러 전제조건을 무시한 채 떠들어대던 나는 중간부터 의구심을 품었다.
왜 아무도 질문을 안 하는 거야?
“태우는 것밖에 모르는 개허접등신은…”
신화의 시대 이후로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악신의 공략법을 알려주고,
“빠른 시일 내에 문제가 생길 곳은 좆같이 생긴 이 곳이야. 여기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듯 설명해주고,
“쫄 필요는 없어. 여기 있는 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소문으로도 듣지 못한 곳에 도사리는 적과 그걸 공략하는 방법을 설명해주기까지 했는데 왜 납득을 하냐고!
최소한 그게 말이 되냐거나.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냐거나. 최소한 납득이 되는 설명을 해주면 좋겠다 말하는 게 정상이잖아!
납득하지 말란 말야!
심지어 메스가키 스킬의 왜곡 탓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카리아가 해석해주니 고갤 끄덕이고 입을 다물더라.
진짜 뭘까.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이리저리 확인을 해봤지만 그 끝에 나온 결론은 모든 광경이 현실이란 것 뿐이었다.
“앞으로가 바쁘겠군요.”
“마법의 사도시여. 논의 드릴 내용이…”
“산맥의 사도시여. 당신의 고견을…”
내가 설명을 끝마치기 무섭게 사람들이 저마다 뭉쳐 의견을 나눈다.
의심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한 이들의 모습에 혼이 나갈 것 같다 생각하던 난 진지하게 이 세상이 망하길 기원했다.
“주신의 사도시여. 한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뭔데!? 뭐든 물어봐! 내가 아는 선에선 최선을 다해서 대답해줄게.
하아아. 다행이다. 여기 모인 애들이 여자애 말에 기대는 것밖에 모르는 머저리가 아니라서.
그래도 마도 제국의 관계자가 똑똑하긴…
“신성의 태양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취소. 이 새끼도 머저리였어. 그것도 더럽게 뻔뻔하고 멍청한 상머저리.
최선을 다해 눈으로 상대를 욕했지만 제국의 사람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기 바빴다.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도 별 다를 건 없었다.
용기를 낸 제국의 사람을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멍청이들을 구경하다 한숨을 내뱉었다. 화를 내는 것조차 귀찮다.
애초에 말야. 저 놈들한테 화를 낸다고 쟤네들이 열을 받기나 할까?
그럴 놈들이었으면 진즉에 나한테 고성을 퍼부었을 것 같은데.
화를 내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작게나마 태양을 만들어줬더니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 이런 머저리들이라면 내가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해 움직일 테니까.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박차고서 들어온 성직자는 내가 만들어낸 태양을 가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실버브룩의 동부 쪽에서 거대던전의 준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지난 번 마도제국에서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현상입니다!”
벌써 그 쪽에서 문제가 생긴 거야?
아직 며칠 정도 시간이 남았을거라 생각했는데, 신앙심이 높아진 게 큰 영향을 미치긴 하나 보네.
다급히 움직여야겠다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게로 쏟아지는 감탄 어린 시선을 느꼈다.
뭐. 뭔데. 악신의 수하가 준동한 건데 왜 너네들이 감탄하냐.
“역시 영애님이세요! 당신께서 말씀하신 일이 바로 이루어지다니!”
페이비의 탄사를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아. 맞다. 방금 전에 저기에서 일이 생길 테니 준비하라고 말을 해뒀지.
저 녀석들 입장에선 예언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겠네.
…근데 있잖냐. 상황이 너무 딱딱 맞춰서 흘러간단 생각은 안 들어?
이 쪽에서 뭔가 수작질을 부린 게 아닐까 의심하는 게 정상적인 상황 같은데.
“바로 움직이지!”
“동행하겠습니다!”
응. 없구나. 자그마한 망설임조차도 보이질 않네.
저 정도면 신뢰가 아니라 신앙에 가깝지 않아?
나중에 내가 발을 핥으라 그러면 기꺼이 핥을 것 같아서 무섭다.
*
저택의 어느 방. 어둠 속에서 의자에 기댄 교황은 자신의 손등을 툭툭 치며 최근의 정세를 돌이켜봤다.
악신의 수하들이 차례차례 무너져가고 있다.
신격이라 불리기엔 애매한 이들이지만 그래도 신화의 시대 당시 수많은 맹자들을 쓰러트린 괴물들이고 거대던전의 중심이 될만큼 강한 이들이다.
헌데 그들이 별다른 피해도 일으키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몇 달에 걸쳐서 공략되어야 할 거대던전은 진입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파악당한 뒤고,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오랜 기간이 지나 잊혀졌어야 할 이들은 숨겨둔 한 수까지 분석당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신화시대를 살았던 영웅들이 조언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생각하던 교황은 이내 고갤 저었다.
영웅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맹자임은 부정할 생각은 없다만 솔직히 말해 그들은 능력에 비해 멍청했다.
멀찍이서 그들을 보며 왜 저런 실수를 저지르는가 생각했던 적이 한 둘이 아닐 정도이니 말이다.
아마 이번 일도 주신의 사도께서 계획하신 바겠지.
여태 정체를 숨기던 분께서 대륙에 자신의 위광을 널리 알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시니.
책상에 놓인 수정구 두 개를 보던 교황은 마도 제국의 외각에서 에르기누스와 마법의 신이 격돌했단 소문을 떠올리고는 웃었다.
서로의 기술에 대한 평가가 비등했기에 둘이 직접 맞붙는 걸로 승패를 결정하기로 했다던가.
제 아무리 자존심이 드높은 두 분일지언정 그런 멍청한 짓을 벌일 리가 없지.
아무튼 작금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다.
주신의 사도께서 숭배받는 것은 기쁜 일이다만 악신의 수하들이 모두 사라져서야 이 쪽 입장에서도 곤란해.
그들이 다른 신격과 함께 사라져줘야 내 계획을 한층 손쉽게 이룰 수 있을테니까.
예상한 것보다는 이르다만 슬슬 움직여야겠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교황이 발을 구르자 바닥이 사라지고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아래에 보관된 것은 몇 사람들의 시체였다.
강자사냥의 먹잇감이 된 자들.
한 때 악신의 사도라는 직위를 지니고 신의 위광을 떨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이들.
그리고 교황이 개인적으로 선택한 자들.
대륙의 역사에 이름 한 줄씩은 올렸을 맹자들의 시체를 보던 교황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악신의 권능을 베풀었다.
그들의 죽음이 끝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