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67
프레이와 조이를 데리고서 방금 막 생겨난 던전의 앞에 섰다.
이 안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잇는지는 다 알고 있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되뇌었으니 착각할 여지가 없다.
다시 한 번 머릿 속으로 그림을 그린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굳이 다 같이 들어갈 필요가 있나. 그냥 나 혼자 들어가고 둘은 남는 편이.
“루시.”
내 망설임을 어떻게 눈치챈 건지 조이가 눈을 찌푸렸다. 이래서 눈치 빠른 애는 귀찮다니까.
“걸리적거릴 것 같은데.”
“안 그럴거에요.”
“맞아. 맞아. 안 그럴 거야.”
억지로 떼어내는 게 아니면 물러나지 않을 것 같네. 근데 프레이가 옆에 있잖아.
무력으로 얘를 제압하는 건 이 안에 있는 쓰레기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힘들 거야.
<네 친우들에게 미움을 사고 싶다면 네 멋대로 해도 된다.>
‘안 할 거에요. 제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다고요.’
할아버지한테 투덜대고서 혀를 찼다. 이 둘은 자기를 보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니까. 믿자.
“가자.”
던전 안으로 발을 들인 나는 친구들에게 축복을 부여하고서 땅을 박찼다.
악신의 수하가 도사리는 곳 특유의 음울한 기운이 어깨를 짓눌렀다.
주신의 신성으로 몸을 지키는 나조차 불쾌함을 느낄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다.
– 저주스러운 아르마디의 개가 왔구나!
복도에 희열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신의 사도 전용 이벤트인가. 정말 쓰잘데기가 없네.
– 무시한다 하여 동요를 감출 수 있을 성 싶으냐!
“뭐래♡ 좆밥이♡”
열등감에 발광하는 놈을 비웃어주자 고함소리와 함께 벽에서 여러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휘두르려는 프레이를 제지한 후 정화의 권능을 펼친다.
부정에서 태어난 존재여. 빛 앞에 자취를 감추어라.
속으로 그럴 듯한 말을 되뇌이자 괴물들이 벽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흩어진다.
“허~접♡”
– 이 개같은 년이!
비웃음을 흘리며 주변에 생겨났다 흩어지길 반복하는 괴물들을 살폈다.
본래라면 피부 없이 붉은 근육만을 지닌 괴물들은 저리 쉽게 쓰러질 존재가 아니다.
짜증이 날 정도로 꾸역꾸역 달라붙어서 공략자를 귀찮게 만들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신오염은 덤이고.
원래 계획대로 바깥의 사람들이 이 안에 들어왔다면 이게 현실이 됐을 거야.
아니, 높은 확률로 현실은 더 처참하고 처절했을테지.
그걸 아니까 내가 여기에 온 거지만.
“뛰어내릴 거야.”
역시 타인의 존경을 받는 건 불편하다.
날 소중히 여겨주는 이들이 거슬린다.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밉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이 날 미워했다면 나도 그들이 이렇게 신경 쓰이진 않았을 텐데.
“얼빵아. 날려버릴 수 있지?”
“집어삼키겠습니다.”
본래라면 지나갈 수 없어야 할 문이 어둠의 권능에 잡아먹힌다. 안에 도사린 여자가 보인다.
박쥐의 날개를 지닌 주제에 흉물스런 여자는 시뻘건 피로 자신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넌 뭐냐. 꼬맹이가 어떻게 날 아는 것이냐!”
“열등감과 질투심에 미친 버러지들이라 그런가 추한 년들은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하더라고♡”
“…그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푸핳♡ 그래도 너보단 예쁠 것 같은데?♡”
방패를 내린 채 키득거렸더니 눈이 돌아간 여자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참 감정적이네. 토악질이 나오는 얼굴이면 마음이라도 고와야지. 둘 다 구리면 어쩌잔 거람.
여자의 손아귀가 내게 날아드는 게 보인다. 패턴을 파악한 게 아니다.
더럽게 느려터져서 훤히 보일 뿐.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받아치는 것도 모두 다 가능했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대응할 이유가 없었다.
“느려어어.”
느슨한 어투와 달리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든 검이 여자의 아래에서부터 휘둘러진다.
눈꺼풀이 내려갔다 올라가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몇 번의 연격.
여자의 몸이 조각났다가 다시 붙으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의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둠이 모든 걸 집어삼킨다.
그걸로 끝이었다. 수많은 악몽을 만들어냈을 던전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무너져 내렸다.
“같이 오길 잘했죠?”
신이 난 조이의 목소리에 무어라 하려다 그냥 살풋 웃고 말았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작금의 조이가 지닌 유능함은 분명 큰 도움이 됐다.
프레이도 마찬가지였다.
맞상대가 하기 싫단 생각이 들 정도로 까다로워진 그녀의 검은 내 방패에 적이 닿지 못하게 만들었다.
실질적으로 여기 올 때까지 난 탱커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방패를 치켜 들만한 상황 자체가 안 나왔으니까. 대신 지휘자의 역할은 제대로 수행했다.
– 우리도 잘했지?
– 그치?
– 칭찬해줘!
요정들의 시야를 빌린 게 큰 도움이 됐다. 이전에도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하긴 했다만 그 땐 다른 이들이 알아서 따라와주길 기대하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무슨 무협 소설에 나오는 고수라 주변의 모든 걸 파악할 순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난 친구들의 모든 동작을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친구들에게 맞춰서 움직이는 게 가능해졌다.
아니. 이건 아니다.
친구들이 나한테 맞춰주고 있단 걸 확인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친구들은 여태까지 내 움직임을 뒤에서 바라봤다.
빠르게 나아갈 생각밖에 없는 멍청한 고인물의 뒤를 계속 따라왔다.
말도 안 된다며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이를 악물고서 내 옆에 섰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친구들이 옆에 있는 걸 당연하다 여길 정도로.
이전에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요정의 시야를 획득하고 나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알게 됐다.
조이도 프레이도 내가 지휘를 하는 것보다 먼저 내 움직임을 살폈다.
언제라도 날 따라갈 수 있도록 시야 한켠에 날 넣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여긴 게임이 아냐. 친구들이 날 따라오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될 수 없어.
하아아. 이런 당연한 것도 생각하질 못하고 있었다니 난 얼마나 멍청한 걸까.
이건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인 것 같아서 더 열 받네.
여기에 없는 페이비와 아서도 그럴까? 당연히 그렇겠지. 진짜 멍청한 질문이야.
요정들의 머리를 툭툭 건드려주면서 던전 바깥으로 나온 나는 마물의 시체 더미를 앞에 둔 채 피를 질질 흘리는 이들을 마주했다.
세상을 위해서,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던 이들은 우리를 보고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진짜 곤란해. 난 들어가기 전에 저 사람들의 자존감을 짓밟아서 무너트리겠다고 생각했단 말야.
근데 저런 식으로 날 보고 웃으면 어떻게 그러냐고.
제기랄.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던 나는 머리를 쓸어올린 다음 신성을 끌어올렸다.
권능을 이용한 거창한 기적은 필요치 않다. 그저 저들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듣고 있지. 허접 주신?
일 해.
당장.
하늘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린 순간 나를 기점으로 신성이 피어오르더니 천사의 날개처럼 펼쳐져 대지를 뒤덮었다.
…야. 그냥 치료만 해달라니까?
이런 거창한 거 말고?
왜 또 쓰잘데기 없는 곳에서 헛짓거리를 하는 건데! 이러면 또 무슨 왜곡이 생길지!
“루시 완전 천사.”
프레이의 헛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반짝거리는 눈빛의 아저씨들이 보인다.
동심을 되찾은 것처럼 빤히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날 향한 거라는 걸 제외하고서라도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뭘 그렇게 꼬라보는 거야?♡ 뒈질 것 같으니까 성욕이 막 차오르나 봐?♡”
제발 적당히 하라는 마음을 담아서 매도를 날렸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바뀔 기미가 안 보였다.
…응. 도망치자. 나 여기에 더 이상 못 있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간 속이 문드러질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에 변태사도가 없단 거야.
그 녀석이 있었다면 이걸 모두 다 기록해…
“얼빵아? 네 손에 들린 거 뭐야?”
“기록용 수정구요. 에르기누스님께서 지난 번 물건에 만족하지 못해 여러모로 개조한 거랍니다.”
“하. 내 모습이 그렇게도 매력적이야? 이젠 여자 좋아하는 걸 숨기지도 않는구나?”
“그치만 이런 걸 어떻게 기록 안 해요? 페이비에게 보여주면 오열할걸요?”
진짜 그럴 것 같으니까 제발 그 수정구 좀 집어넣자.
안 그래도 날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데 이 이상 왜곡이 심해지면 나 진짜 힘들어!
“죄송해요. 루시. 에르기누스님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법의 신을 이기고 싶어 하셔서 이런 변수가 필요하답니다.”
“그 찐따는 언제까지 찌질이로 살 생각이야? 신이 됐으면 좀 바뀔 만도 하지 않아?”
“정 이 기록을 지우고 싶으시다면 진지하게 부탁을 해주세요!”
야. 조이 너 에르기누스는 핑계지.
그냥 내가 부탁하는 걸 보고 싶을 뿐이잖아! 던전 안에서 느꼈던 내 감동 돌려내!
“안 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이…”
“바보 검사.”
“응? 왜애?”
“한 번 놀아줄 테니까 협력해.”
“와아아. 진짜? 최선을 다할게!”
“에. 에!? 케. 켄트 영애! 잠시만요! 당신께서도 루시의 이 모습을 남겨두고 싶으시잖아요!”
“루시랑 노는 게 더 중요해!”
“이제와서 후회해도 늦었어. 얼빵아.”
“자. 잠깐. 부술게요! 부술테니까 그만. 꺄아아아!?”
*
루시의 메이스 내부. 바깥의 풍경을 보던 이들의 시선은 슬그머니 방문한 에르기누스를 향해 있었다.
“난 저런 부탁 한 적 없다! 내가 거두고픈 승리는 실력으로 이루어내는 것! 이런 치사한 방식으로 이겨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발광하는 게 참 설득력이 넘치네.”
“괜찮네. 에르기누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뭘 새삼스레 그러나. 그대가 바보 짓을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니라고! 저런 부탁 안 했다고!”
소리를 내지르는 에르기누스를 보면서 웃던 중 용사가 바깥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엘.”
“왜 그러나.”
“말리지 않아도 괜찮겠나?”
“루시를?”
“그래. 저대로 내버려두다간 부담감에 짓눌릴 것 아니냐.”
용사는 타인의 희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루시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저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전철을 밟을 테지.
그러니 말려야 한다.
모든 걸 자신이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그녀가 절망하지 않도록.
과거 용사가 지녔던 고뇌를 아는 루엘은 진지하게 그 말을 듣다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에게 체념을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루엘. 자네도 알잖나. 모든 걸 지키겠단 강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고통을 겪었기에 작금의 자네가 있는 것이기도 해.”
“그건 너무도 무책임한 말이군! 절망 속에서 일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냐!”
“루시라면 해낼거라 생각하네. 저 아이는 누구보다도 강하니까.”
“루엘!”
“그리고 말이다. 자네가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아닌가.”
“…그건.”
용사는 차마 고갤 젓지 못했다.
루엘이 말한대로다. 그는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미련한 짓을 반복할 것이다.
용사란 미련하기 그지없는 존재에게만 주어지는 칭호니까.
“저 아이라면 기적을 일으킬지도 몰라. 우리와는 다르게.”
수많은 비상식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선 아이다. 거기에 기적 하나가 더 끼어든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그래서 난 지켜 볼 생각이라네. 이의 있나?”
“…없다.”
“그럼 됐군. 다시 에르기누스 저 놈이 얼마나 추한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