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68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검을 본다.
결코 내게 닿을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방패를 치켜들었다.
둔중한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밀려난다.
아. 정말. 타이밍을 예상할 수가 없네.
삼인칭의 시점으로 전조를 예측해도 검격이 도착하는 순간이 제멋대로이니 원!
“히힣.”
프레이가 히죽거리면서 재차 검을 휘두른다. 전조가 보이고, 검의 궤적이 보이고, 프레이의 의도가 보이지만 그럼에도 방패에서 청량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히히힣.”
내가 의도적으로 불리한 체를 하고 있는데 프레이는 저 멀리서 날 지켜보기만 한다.
이 거리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하면 자신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겠지.
프레이 답지않게 침착한 게 마음에 안 들어. 보란 듯 웃고 있는 것도 거슬려!
날 조급하게 만들어서 방어를 무너트리려는 속셈이란 건 알겠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할 순 없다.
주도권을 쥔 게 저 쪽인 이상 버티고 있어 봐야 천천히 무너질 뿐이야.
단순한 대련이기도 하니까. 한 번 승부수를 걸어보자.
내가 파악한 게 맞다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뭣보다, 더 이상은 저 꼴받는 웃음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아.
요정의 시야를 거두고 방패를 내린다.
벨 수 있으면 어디 해보라는 듯이 웃음만으로 도발한다.
그런 내 모습이 의뭉스러운 듯 프레이는 쉬이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쫄았어?♡”
프레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자마자 앞으로 숙이며 고갤 숙였다.
내 바로 위에서 검격이 바람을 가르는 게 느껴진다.
“쫄았네♡”
꺄르르 하는 요정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춤을 추는 듯 가뿐한 걸음에 프레이가 재차 검을 휘두르지만 멈춰서지 않는다.
직감을 따라 옆으로 몸을 비틀자 내 바로 옆에서 공간이 비틀린다.
“역시 루시야.”
두 번의 검격을 피하고 나니 프레이가 내 앞에 있었다.
요정들을 다시금 주변으로 펼친 후 두 손을 펼쳤다.
방패와 메이스를 들어봐야 방금 전의 전철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유리한 전장으로 이끌어야지.
프레이가 검의 천재인 건 사실이지만 힘은 내가 더 강하거든.
보란 듯 두 팔을 펼치자 프레이가 본능적으로 허릴 숙였다.
그걸 확인하고서 비릿한 웃음과 함께 프레이의 어깨를 짓눌렀다.
함정에 빠진 걸 눈치챈 프레이가 뒤늦게 저항하지만 내게 잡힌 이상 무의미했다.
“끄하아악!?”
바보멍청이 주제에 감히 나를 놀렸겠다. 뒷감당을 할 준비는 된 거겠지?
사적인 감정을 잔뜩 담아 프레이를 구깃구깃해 준 나는 그녀의 입에서 항복이란 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웃음과 함께 손을 뗐다.
“용케도 맨 몸으로 달려 들 생각을 했군.”
뒤에서 대련을 구경하던 아서가 질린다는 듯 고갤 저었다.
“전 어느 겁많은 분과 다르거든요.”
“그 누가 설마 나인가?”
“푸핳. 잘 알고 계시네요. 허~접왕자님.”
“…이런 꼬맹이가 왜 대륙의 구세주로 찬양받는 것인지 모르겠군.”
내 말이 그렇다니까. 다른 곳에서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발심에 더 나대고 있는데 찬양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아!
“왕자님.”
고갤 주억거리고 있으려니 어느새 부활한 프레이가 아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대련.”
“넌 그저 나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것 아니냐?”
“쫄았어?”
“내가 언제 겁을 먹고 물러난 적이 있었나? 난 그저 네 태도가 불쾌…”
“쫄았네. 겁쟁이.”
“…못 쉬어서 졌다는 변명을 하기만 해봐라.”
아서의 뒷모습을 보며 명복을 빌어준 난 칭찬을 갈구하는 요정들의 머리를 툭툭 건드려줬다.
“훌륭한 싸움이었습니다. 영애님.”
페이비가 날 칭찬하는 것이야 언제나 있는 일이다만 오늘따라 눈시울이 붉어보였다.
조이. 너 설마.
“그 때 루시가 부쉈잖아요! 그게 끝이었다고요!”
“그럼 이 지뢰녀는 왜 이 꼴인거야?”
“영애님의 멋진 모습을 듣고 상상하니 절로 감동이 차올랐답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예배당으로 가 기도를 올리고 싶어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머릿속에 영상을 재생할 수 있는 거야?
페이비. 너한테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진짜 오타쿠 같아.
외견이 너무 괜찮아서 그렇지 안경 돼지 필터를 씌우고 페이비의 행동을 하나하나 돌이켜보면 절로 소름이 돋을걸?
“후후. 죄송합니다. 마음이 너무 벅차올랐던 나머지 속에 머물던 생각을 드러냈네요.”
“좀 징그러우니까 다가오지 말아 줄래?”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겠습니다.”
기 죽은 기색도 없이 한 걸음 물러선 페이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영애님. 저흴 모은 까닭이 무엇인지요?”
“지하에 처박혀서 일어날 때만 기다리는 허접들을 괴롭혀주려고.”
전력의 온전이라거나, 내 활동으로 인해 주신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라던가, 여러 사도들에게 업적을 쌓아줘야 훗날이 유리해진다거나, 세상의 구원에 있어 필수적 요소인 내 안전이라거나 이외에도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에 반해 내가 움직여야 할 이유?
솔직히 없지.
교황이 일으킬 변수만 대비한다면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각지의 사람들이 승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그 때까지 기다리다 중요한 순간에 딱 나타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설령 개입을 해야 한다 한들 날 제외한 다른 강자들에게 맡기는 편이 합리적일테지.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난 직접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날 떠받들어주니까 반골심리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어디까지 빨아줄 수 있는지 확인을 해보기로 했어.
자기를 찬양하는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고 욕하고 짓밟는 여자애가 숭한 갑옷을 입은 채 날뛰는 걸 숭배하는 광경을 상상해봐.
재밌을 것 같지 않아?
거기에 더해서 내가 잔뜩 업적을 쌓아두면 나중에 허접주신한테 요구할 수 있는 게 많아질 거 아냐.
나한테 갑질을 하던 놈을 무릎 꿇히는 걸 생각하니까 온 몸에 희열이 넘치는 거 있지!
뭣보다 지금 내 친구들이라면 내가 머릿 속으로 생각하는 걸 그대로 따라와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재밌는 기록을 세워보려고.
새로운 빌드를 발견해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시도하는 게 고인물이잖아.
그치?
“협력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루시가 그러겠다면 당연히 따라야죠.”
“나도. 나도. 루시랑 같이 있으면 재밌으니까.”
어라. 프레이 너 아서는 어쩌고 너 혼자 온 거냐.
방금 전까지 대련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눈을 끔뻑이며 옆으로 고갤 돌린 난 입가에 피를 흘리며 눈에 실핏줄을 세운 아서를 발견했다.
“프으레이 켄트으으으!”
“와아. 왕자님 튼튼해. 좀 더 강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제대로 놀아주마! 이 빌어먹을 꼬맹아!”
*
벨헤임의 엘라리스.
등장 30분만에 공략당함.
교황이 보낸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던전이 사라진 상태였음.
카드로니아의 세라프.
알른 기사단에 의해 그 일대가 유린당함.
덕분에 미리 파두었던 여러 함정은 의미를 잃었고 던전은 채 1시간이 지나기 전에 사라짐.
루미엘라의 에어린.
라샤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를 예상하기라도 했단 것처럼 검성을 비롯한 여러 강자들이 그녀를 가로 막음.
그 사이 주신의 사도가 던전에 진입.
라샤의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던전이 사라짐.
라샤 본인은 오랜만에 좋은 싸움이었다며 만족스러워했음.
패배.
패배.
패배.
패배.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들을 확인하던 교황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곤란하군. 이 정도로 압도당하는 건 예상치 못했는데 말야.
실패로 가득한 보고를 읽으면서도 히죽거리며 웃던 교황은 지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도께서 직접 움직이실 거란 건 예측했다.
타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거실 분이다.
희생이 생겨난다면 직접 움직이시는 게 필연적이지.
허나 저 분께서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을 거란 게 내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사도께서 직접 나서신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
제 풀에 무너지시는 순간이 오면 그 때를 노려 달려들기 위해.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신의 위업을 대행하는 분께서 겨우 저딴 놈들 때문에 곤욕을 치를 리 없는데 말야.
아아. 주신의 사도께서 너무도 뛰어나시니 나 따위의 지혜로는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구나.
“아주, 아주 즐겁고 행복한 오산이다.”
저 분께서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셨으니 이 쪽도 사악함을 입증해야겠지.
그것이 선과 악의 싸움이니까.
대륙에 머무는 이들이 우리를 더 증오할수록, 더욱 더 많은 공포를 느낄수록, 그들을 구원해 준 사도께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면 표할수록 내 계획이 더 성공에 가까워질 터.
“그러니 사도께 그럴 듯한 이야기 하나는 만들어드려야겠지.”
이미 사도께선 충분한 사연을 지니고 계시다.
아주 어릴 적 저주를 받아 본의와 관계 없이 다른 이들을 비아냥 거릴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사랑을 받아야 할 어린 나이에 타인의 미움을 배웠다.
오롯이 그 분을 사랑해주었던 어미는 병마로 사망했고, 아비는 연인을 잃은 충격 탓에 딸을 외면했다.
그렇게 저주를 타고 난 여자아이는 외톨이가 되었다.
대륙의 사람들이 이 모든 사연을 아는 건 아니다만 대략적인 정황 정도는 알고 있다.
교황이 일부러 이를 퍼트렸으니까.
비극에도 무너지지 않고 세상을 위해 일어선 영웅이란 평가덕에 그 분의 비아냥조차 안타깝게 보는 이들이 늘었지.
다만 이걸로는 아직 부족하다.
과거의 사연은 훌륭한 배경일 뿐 마음을 울리진 못한다.
지금에 이르러 생겨난 비극과 그를 극복하는 영웅의 모습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킬 것이고 위대한 주신과 그 사도를 찬양하게 만들 테지.
하늘에서 빛과 함께 내려오는 주신의 모습을 떠올린 교황은 찔끔 흐른 눈물을 닦아내곤 지도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의 시선이 멈춰 선 곳은 솔라딘 왕국의 어느 외진 곳이었다.
“우선은 자잘한 부분부터 건드려 볼까.”
부디 사도께서 서럽게 울어주셨으면 좋겠다.
무너져내려서 방에 틀어박히면 완벽하다.
그리고 그 끝에 세상을 위해 다시 일어난다면.
“하아아.”
그것이야 말로 영웅의 모습이며 주신께서 택한 사도의 모습일테지.
그걸 꼭 옆에서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