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73
교황의 습격이 있었던 다음 날. 페이비의 부름에 따라 성지에 도착한 나는 날 향해 인사하는 여러 높은 사람들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각자의 나라에서 필사적으로 일을 해야 할 인간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지금 이럴 시간에 앞으로 있을 재앙을 대비하는 게 우선 아냐?
왜 나랑 안면을 익히려 드는 거지!?
당황해서 페이비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영애님께서 희생할 이유가 없는 환경을 만들면 되지 않으냐고.”
내가 지닌 책임을 각국으로 옮기면 괜찮지 않겠냐는 페이비의 말은 분명 옳았다.
옳았지만.
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면 안 되니?! 나는 초면의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부담스럽단 말야!
그게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아 진짜 예전에는 어떤 높은 사람을 만나도 어차피 나랑 관련없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대범하게 나설 수 있었는데 이젠 그러질 못 하겠어!
이 빌어먹을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내숭을 떨 수가 없잖아!
할 말은 차고 넘쳤지만 난 그를 억누르고 페이비의 의도에 맞춰줬다.
날 위해 이 환경을 준비했다는데 앞에서 뭐라 할 순 없잖아.
…그리고 사실 내가 모든 상황을 대처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어젯 밤 일어난 사고만 봐도 그래.
내 몸은 하나야.
단발적으로 모든 일이 일어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렇다고 그 상황을 타인에게 맡기기엔 던전 내부라는 변수가 너무 거슬려.
통상적인 상황을 벗어난 던전은 내가 아는 것과 다를 가능성이 높으니까.
어제 공략한 던전들만해도 그랬는 걸.
“당장은 걱정마. 고용주님. 도와줄게.”
뭣보다 페이비가 내 부담스러움을 미리 눈치챈 듯 카리아를 불러두기도 했기에 난 부담 없이 회의에 참여했다.
내가 지닌 권위가 높아졌단 말이 사실이긴 한 듯 내가 대놓고 건방진 어투로 허접이니 돼지니 성욕밖에 없는 짐승이니 당신네 성은 가축 우리 같은 냄새가 나지 않으냐니 하는 소리를 해도 높으신 분들은 불편해하긴 해도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렇게 회의 끝에 정한 방향성은 이러했다.
변수가 크거나 위험한 던전은 무조건 내가 공략한다.
다만 위험성이 낮거나 변수가 거의 없는 던전은 각국의 전력에 위임하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위험한 던전에 대처하는 방식도 알려주겠다.
사실 대개는 사도들과 회의를 했을 때도 전한 내용이었으니 변한 건 위험한 던전에 대처하는 방식과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준비를 알려준 것밖에 없었다만.
이전과 다르게 느낀 점은 상대들이 무척이나 협조적으로 바뀌었단 것이다.
“제 1기사단을 파견하도록 하죠.”
“특별 기사들을 차출할 예정입니다.”
“여러 장로분들에게 협조를 요청해두었습니다.”
이전에도 각국은 이번 재난에 협조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렇다 하여 자신들의 모든 전력을 쏟아붓겠다고 말하진 않았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인류의 위기보다는 자신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허나 오늘은 달랐다. 저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전력을 기꺼이 내보였다.
이 원인이 무엇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자리를 만들어낸 사람이 훤히 있는데 누굴 원인으로 지목하겠는가.
“죄송합니다. 영애님. 그제 밤부터 준비를 하느라 미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하.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잖아? 그냥 칭찬해달라고 말해. 멍멍이 성녀. 꼬리 흔들고 싶어서 난리난 게 훤히 보이는데.”
“…그. 그런가요?”
“아냐? 아니면 말고. 난 상관 없는데.”
“그. 그으으. 치. 칭찬… 해주시겠어요?”
아침의 당혹을 잊기로 한 나는 페이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줬다.
그러자 페이비는 웃으며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뒤로도 페이비는 내 편의를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미리 성축을 해 둔 장비를 준비해주는 걸로 날 지원해주고, 먼저 향해야 할 곳에 사람을 보내 준비를 해둔다거나, 내가 모르는 각지의 상황에 성기사들을 개입시켜 어떻게든 희생을 줄이려 한다거나.
중간중간 너무 고생할 필요 없다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조이를 통해 만류를 해보기도 했지만 페이비는 그래도 항상 최선을 다했다.
내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뻤던 건지 모르겠지만 기꺼이 내 짐을 자꾸만 나눠가려 했다.
그런 광경을 보며 난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굳이 말려야하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과도 좋았고, 난 꽤나 편해졌고, 페이비도 기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난 카라아의 말을 간과했고 이 세상이 게임처럼 굴러가지 않는단 걸 또 다시 망각했다.
인간이란 생명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얼마건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게 선의건 아니건 간에 얼마든 실수할 수 있는 존재였다.
쉬이 말해서 사람 자체가 변수였다.
내가 그걸 알게 된 건 페이비가 여러 사람들을 부르고서 이틀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난 꽤나 기분이 좋았다.
페이비가 고생해 준 덕분에 여러모로 편해진데다가 상당한 힘을 상실한 교황이 그 어떤 변수도 일으키지 않았고, 솔직하게 말해서 날 칭찬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살짝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어쨌건 간에 칭찬 받는 걸로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야.
던전을 공략하면서도 이대로만 된다면 편안히 결전의 날을 준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모두를 구할 수 있으리란 상상을 했다.
난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었으니까.
그래서 던전 바깥으로 나와 카리아를 만났을 때.
그녀가 놀라지 말고 자신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한 도시에서 일어난 재앙을 내게 알려줬을 때.
난 당혹스럽다는 감정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 미친 새끼들이 개짓거리를 했어.”
어느 지역에서 내가 세운 계획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움직인 이들이 생겨났다.
내가 여러 던전을 돌아다니겠노라 결심하기 전 사람들에게 알려줬던 계획을 따라 자신들이 던전을 공략하고자 했다.
“…뭔 미친 새끼들이야!?”
지키라고만 하였거늘! 그저 지키라고만 했는데 그게 무슨 짓이냐!
던전에 나오자마자 이 소식을 들은 나는 조이에게 순간이동의 마법을 부탁하면서 카리아에게 자세한 상황을 들었다.
“그 허접 새끼들. 공략은 제대로 했어?!”
“했다면 내가 여기 있지 않겠지.”
거기까진 괜찮았다. 정말 완벽하게 공략을 따랐다면 그 어떤 피해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실패할 때를 대비한 여러 전략이라도 제대로 따랐다면 그 실패의 여파가 주변으로 번질 일이 없었겠지. 허나 그들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본인들에게 들은 건 없으니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안 했을 거야. 무언가 대처법을 준비했다면 그 난장판이 생기진 않았을 테니까.”
카리아는 내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그 곳은 내가 본 어떤 광경보다도 끔찍한 곳일 테니 당황해선 안 된다고 말이다.
“하. 허접 새끼들이 얼마나 뒤졌건 내 알 바야?”
난 그 말을 듣고서 강한 체를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옥의 풍경을 얕보았던 것도 있으리라.
타인의 기억을 보던 때에 몇 번이나 지옥을 마주했으니 현실에서 마주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다른 친구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서 표정을 굳힐 뿐 물러나지 않았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까?
아마 그렇겠지. 그들이 물러서지 않는 한 나도 결코 물러설 수 없으니. 난 마음의 결심을 하고서 조이의 마법을 따라 그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서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의사! 의사 어디 없어요!?”
“케리! 어디 있니! 케리이이이!”
“파보그라는 사람을 못 보셨나요!? 어떻게 생겼냐면!”
“엄마. 엄마아아아.”
“흐아아앙!”
“씨발! 부상자 호송해! 당장!”
“성직자는 어디에 있나!”
“여기… 성녀님!”
누군가 페이비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페이비에게 달려든다.
자신의 지인을 살려달라고 빈다. 이 재앙을 끝내달라고 부탁한다.
당신의 권위로 지원을 불러달라 말한다.
그들의 불만을 하나하나 들어주며 최선의 상황을 만들고자 하는 페이비를 내버려둔 채 앞으로 향했다.
“이 자는 살 수 없다!”
“아니에요! 아직 희망이!”
“당장 꺼져! 너까지 죽이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 한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와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싸울 수 있는 자는 당장 나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사를 끌어모으기 위해 머리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이.
“무기가 부족합니다!”
“제기랄! 일단 돌멩이라도 던져!”
간절히 필요한 걸 말하는 사람과 최악의 현실 속에서 최선을 생각하는 이.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사람이 부족해!”
“괴물이. 괴물이!”
“씨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닥치고 나가! 개새끼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바라는 이. 살기 위해 발악하는 이. 어떻게든 군기를 잡기 위해 소리치는 이.
“…사도님?”
날 붙잡으려는 이를 옆으로 밀고, 막고자 하는 이를 걷어차고, 그렇게 위로 올라가서 성벽의 위에 섰다.
그러자 전장이 보였다.
전장의 맨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공포에 질린 채 뒤를 돌아보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물에게 죽는 이들.
바닥에 널부러진 어떤 이의 울음소리.
시체가 썩어들어가는 냄새와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여러 벌레들과 너무도 짙어서 오히려 맡아지지 않는 피비린내와 불타오르는 대지.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은 나의 귀에 할아버지가 무어라 했지만 난 그 말을 알아 듣지 못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오롯이 사람의 비명뿐이었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이건 내가 만들어 낸 지옥이었다. 이 곳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은 나의 죄였다.
헛웃음을 흘린 난 메이스와 방패를 집어 던지고서 두 손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시킨 것도 아닌데 요정들이 내 옆으로 나와 내 얼굴을 감싸 안았고, 내 안의 신성이 바깥으로 흘러나와 등 뒤에 날개를 만들어냈다.
그를 본 나는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올렸다.
저들에게 축복이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