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74
단적으로 말해서 재난은 방심에서 시작됐다.
본디 악신의 수하들이 도사리는 던전이란 사람들에게 공포로 여겨져야했다.
나타나는 것만으로 몇 개의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수많은 희생을 불러일으키며 여러 맹자를 죽음으로 이끌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존재여야했다.
설령 미리 대비가 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 곳엔 반드시 짙은 피비린내가 따르는 게 정상이다. 신화의 시대를 살던 이들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는 곳 근처에 던전이 생긴다는 것이 곧 죽음이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허나 그 때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대지에는 승리의 기쁨만이 흩뿌려져 있었고, 그 안일함 탓에 생겨나야 할 죽음은 주신의 사도로 인해 가로 막하니 자연스레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어라? 악신의 수하들이라는 게 너무 과대평가 된 게 아닐까?
설령 과거의 무시무시한 기록들이 모두 다 사실이라 해도 수백년이 지난 지금은 약화된 게 아니려나?
저 자그마한 꼬마아이도 저토록 쉽게 던전을 공략하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많은 이들은 루시가 얼마나 규격 외의 존재인지를 몰랐다.
그녀가 던전을 공략하는 방식이 어찌나 기괴한지 이해하질 못했다.
실제로 그녀의 말을 들어보았던 사람들조차도 그랬다.
루시가 이야기하는 던전은 너무나도 단순한 곳이었다.
그냥 적당히 달려서 보스룸에 도착한 뒤 공략법을 아는 보스를 농락하며 죽인다.
루시 알른은 그것만을 알려줬고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던전을 공략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악평밖에 없던 귀족 영애가, 영웅의 핏줄을 타고 났다 하나 싸우는 법을 제대로 배운 게 채 이 년이 되질 않는 여자애가, 주변에 영웅을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 동년배의 꼬마아이들을 데리고서 과거의 악몽을 하나하나 찍어 눌렀다.
최소한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재앙이 일어난 파르마의 기사들도 이렇게 생각했다.
저들이 하는데 우리가 못 할 게 뭐냐고.
저 던전의 모든 걸 알고 있는데 우리가 왜 굳이 저 여자아이를 기다려야 하냐고.
남들이 주신의 권위에 짓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우리가 먼저 던전을 공략하는 게 어떠냐고.
그런다면 주신 교회에 빚을 쌓는 것은 물론이고 타 국가에게 빚을 지워둘 수도 있지 않겠냐고.
훗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래야 한다고.
파르마의 사람들은 이 의견에 동의했고 던전이 나타난 순간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마물을 가로막는 것 대신 던전에 들어가 원흉을 없애기로 마음 먹었다.
이것도 오만한 판단이지만 아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주신의 사도라는 이름이 지닌 권위가 드높은 것과는 별개로 루시가 지닌 특이성을 아는 이가 흔치 않으니까.
굳이 이들의 잘못이 무엇이냐 따진다면 자신들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들은 실패한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던전 공략을 끝마치고 영광 속에 선 자신들의 모습만을 상상했다.
그랬기에 첫 단추가 비틀렸을 때 바로잡지 못했다.
던전의 문 너머로 기사들의 형상을 한 마물이 나왔을 때 너무나도 간단히 제 목을 내어줬다.
혼란이 시작됐다.
바깥으로 나온 이들을 칭찬하기 위해 맨 앞에 섰던 지휘관의 목이 날아갔다.
그로 인해 생긴 혼란 속에서 주변의 다른 이들이 죽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 둘 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그 땐 이미 늦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요한 전력인 기사들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사람들이 죽는다. 적이 늘어난다. 던전 바깥으로 나오는 마물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전선이 밀린다.
또 다시 사람들이 죽는다. 마물의 수는 늘어나는데 병사들의 수는 자꾸만 줄어간다.
시체를 밟으며 병사들이 또 다시 뒤로 물러난다.
사람들이 죽는다.
사람들이 죽었다.
죽어갔다.
전선에 선 모든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이 죽을 거란 사실을 이해했다.
그 어떤 발악을 하더라도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도시는 끝이었다.
자신들이 저 마물의 파도에 휩쓸릴 것임을 자연스레 그렇기에 여러 이들은 도주를 택했고 또 다른 이들은 죽음을 얌전히 받아들였지만 어떤 이들은 이를 악물고서 전선에 섰다.
살 수 있다 생각한 건 아니었다.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뒤에 선 이들이 자기보다 1초라도 늦게 죽기를 원했다.
자신들이 먼저 죽음으로서 아주,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만들어지길 기원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다른 이들의 생명이 조금 더 이어지길 바랐다.
“…하아.”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려던 병사는 자기 오른 팔이 사라졌단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색한 왼 팔을 움직여서 품 안의 담배를 꺼낸 그는 그걸 입에 물고서 품을 뒤적였다.
그리고서야 깨달았다. 불을 붙일 물건이 없단 걸.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이라도 배워 둘 걸 그랬는데 말야.
용병노릇을 할 적에 마법사가 알려준단 걸 거부한 게 이제와 후회되는 군.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탄하던 병사는 머리가 몽롱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옆에선 그의 동료가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보다 더 먼 곳에선 비명과 마물들의 고성이 울려퍼졌지만 병사는 눈을 뜨지 못했다.
흘린 피가 너무도 많았다.
자지 않은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여태 해 온 것들이 너무도 벅찼다.
이젠 그저 쉬고 싶었다. 잠시만 자고 일어나자.
한 손으로 무기를 들고 앞으로 달려가자.
동료를 대신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가자.
그래. 잠시. 아주 잠시만 자고서 모든 걸.
그 때였다. 그의 몸을 기묘한 따스함이 안아줬다.
봄 날의 초원에 누워서 눈을 감으면 느껴지던 그 따뜻함이 병사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꺼져가던 의식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온 몸을 휘감던 고통이 둔해지고, 다시 설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몸에 힘이 돌아온다.
그를 느낀 병사가 느릿하게 눈을 뜬 순간 그는 성벽에 선 천사를 발견했다.
회색으로 물든 대지 위에서 홀로 빛나는 천사는 눈을 감은 채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병사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주변으로 고갤 돌렸다.
전장의 소리가 사라진 채였다.
비명도. 고함도. 분노도. 울음도. 뭣도.
아무것도 전장에 남아있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성벽 위에 선 천사를 향한 경외 뿐이었다.
마물. 마물은?
오른팔로 대지를 짚고 일어나려다 넘어진 병사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모든 소리가 사라질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마물들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천사가 만들어낸 따스함을 침범하지 못한 채 뒤로. 또 다시 뒤로.
그 광경을 보면서 병사는 언젠가 들었던 영웅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신의 빛 만으로 모든 마물을 뒤로 물렸다는 어느 성기사의 이야기를.
“위대한 주신이시여.”
누군가 경의를 내비친 순간 전장에 서 있던 이들이 하나 둘 두 손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이 대지에 선 자들을 부디 지켜주소서.
당신의 뜻이 지상에 닿아 악을 물리치고 선을 널리 퍼트리게 해주소서.
“위대한 주신을 위하여.”
“주신의 뜻을 대행하는 사도를 위하여.”
“이 대지에 존재해야 할 선을 위하여.”
저마다 속에 차오르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병사들이 제 무기를 쥔 채 성벽을 노려보는 마물을 마주한다.
주신의 사도를 증오하는 이들을 향해 증오를 내비친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위하여!”
다시금 인간과 마물이 부딪힌 순간. 뒤로 밀려난 것은 마물이었다.
*
무예의 신이 총애하는 무인의 검이 허공을 가르더니 무수히 많은 마물의 머리가 허공을 난다.
어둠의 신이자 위대한 대마법사가 제자로 삼은 마법사가 마법을 펼치자 하늘에서 떨어진 낙뢰가 마물의 군단에 구멍을 낸다.
한 나라의 왕자는 전선의 오만 곳을 돌아다니며 마법과 검으로 모두를 지탱했다.
주신 교회의 얼굴이나 다름 없는 성녀는 죽어야 할 이조차 되살리며 전선을 유지시켰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맨 앞에 선 주신의 사도는 마물의 피를 뒤집어 쓴 채로도 계속해서 앞으로 향했다.
그 모든 광경을 교황은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우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의지할 이들을 위해 일부러 입을 다문 채 싸우는 모습을 보십시오.”
“실로 그렇습니다. 성하.”
교황의 명에 따라 도시에서 활동하던 성기사는 교황의 말에 몇 번이나 고갤 끄덕였다.
“다만 아쉽기도 합니다. 살짝 혼선을 주었을 뿐인데 저 분의 말을 의심하고 죄를 저지른 이들이 그대로 살아남다뇨.”
“그렇긴 합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 도시가 괴멸되어야 했을 터인데.”
사도께서 이 곳에 강림하실 것이야 예정된 바였으나 저 분께서 일으킨 기적이 모든 마물을 가로 막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난 또 다시 저 분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래도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죄를 지은 이들이 남은 것으로 사도의 이야기가 더 극적으로 바뀔 테니까요.”
이전에 알른 영지를 향했다가 큰 피해를 입은 교황은 방향성을 바꿨다.
자신이 지키려 하는 이들을 통해 사도에게 시련을 부여하기로.
이미 인간이란 존재에게 고통받을 대로 고통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주신의 사도께서 몇 사람의 비난으로 인간을 포기할 리 없습니다.
허나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다면 필시 절망하실테고 그 고난이 사연이 되고 시련이 되어 저 분을 완성시키겠죠.
그를 위해서라도 이 도시는 무너져내려야 했습니다만. 하하.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사도의 주변에 있는 이들을 시험할 수 있게 된데다가, 사도께서 지닌 능력을 세상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러고 나면 그 분의 생가에 동상 몇 개 쯤은 세워질테죠.
솔직히 말해서 이전에는 좀 많이 실망을 했거든요.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슬슬 이 쪽의 위치가 파악될 듯 하니.”
“알겠습니다. 성하.”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도시여.
당신이 제게 시련을 내려 줄 날이 곧 다가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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