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에서 일어났던 재앙은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단순히 희생만을 낳은 건 아니었다.
도시를 멸망시킬 뻔 했던 재앙은 다른 나라에 경고가 되었다.
사도의 말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굴다가는 자신들도 저렇게 될 수 있다.
한 번의 실수로 도시가 멸망할 수 있다.
사도께서 쉬이 던전을 공략하시는 건 어디까지나 그 분의 대단하기 때문일 뿐. 결코 던전이 쉬워서가 아니다.
요한의 요청을 받은 카리아는 예술 교단과 협업해 이런 인식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퍼트렸고 그 덕분에 며칠 지나지 않아 대륙의 사람들은 악신의 수하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알게 됐다.
각국의 우두머리들마저도 불안을 느낄 무렵 요한이 그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주신 교회의 이름으로 선언하건데 구원이 두 번이나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만약 같은 재앙이 반복된다면 사도께서 당신들을 돕지 않을 수도 있다고.
자비란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게 아니라고.
설령 사도께서 그대들을 구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건 무상의 행동이 아닐 거라고.
처음에는 이를 단순한 경고로 여긴 각국이었지만 요한을 비롯한 주신 교회의 상층부가 자신들의 연을 총동원해서 한 나라를 압박해서 그들의 죄를 묻는 걸 본 이들은 그게 단순한 경고가 아니란 걸 이해했다.
그리고 작금 주신 교회가 지닌 영향력이 경이롭단 사실도 알게 됐다.
종교가 나라를 겁박하는 상황에서도 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는 걸 보았으니까.
국민들은 주신 교회와 주신의 사도가 옳다고 소리쳤다.
많은 귀족들도 도시의 만행을 가로막지 않은 나라를 규탄했다.
그리고 타 국가도 암묵적으로 주신 교회의 행동에 동의했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반기를 든다면 다음에 칼날이 닿을 장소가 자신들이 될 게 뻔했으니.
그렇게 한 국가가 완전히 책임을 물었을 무렵에 다른 국가들은 주신 교회를 비난하는 대신 그들의 편에 서는 걸 선택했다.
악신과의 전쟁이 진행 중인 지금도 저만한 권위를 지닌 주신 교회다.
모든 일이 끝났을 무렵에는 얼마나 큰 이름을 지니게 되겠는가.
만약 다른 종교의 반발이라도 있었다면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보겠지만 미리 합의라도 해둔 듯 여러 종교들은 주신 교회의 편을 들었다.
그러니 여러 국가도 주신 교회의 뜻을 존중해야만 했다.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교회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임을 천명함에 따라 루시의 던전 공략 속도는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던전의 공략은 며칠이나 더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끝을 맞이했다.
그 날. 주신의 사도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제 싸워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이 대지에 악신이 내려 올 날이 머지 않았노라고.
그러니 준비하라고.
신화 시대의 전쟁을.
*
카리아와 요한이 협업해서 만들어 낸 여론 조작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아무리 종교의 위세가 강해도 나라와 종교는 별개라는 인식이 강했었는데 어느 순간 동일시되더니 일정 시점이 지난 뒤엔 주신 교회가 대놓고 한 나라를 비난해도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분위기가 살벌하더라. 한 걸음 잘못 내딛으면 레볼루숑이 일어날 듯한 풍경이었거든.
중간에 내가 가서 적당히 기분을 풀어주지 않았다면 누군가 깃발을 들지 않았으려나.
한 번 제대로 본보기를 보인 덕분일까. 여러 국가들은 허튼 시도를 하기는커녕 항상 최선을 다해 나를 지원해줬다.
최근 들어서 어디를 가더라도 대접이 융숭하다 못해 부담스럽다 느껴질 지경이었으니 말 다했지.
때때로 나와 안면을 트고 싶어 하는 건지 각국의 귀족들이 귀찮게 구는 순간도 있었다만 이건 내 친구들이 적당히 끊어내줬다.
“아마누 백작가의 분이시죠? 당신이 저지른 온갖 부정을 읊기 전에 사라지는 걸 추천드릴게요.”
조이는 자신의 금발을 휘날리며 대놓고 악녀다운 모습을 보여줬고.
“자꾸 이러시면 유통에 상당한 문제가 생길 터입니다만.”
조이가 짓누를 수 없는 상대는 아서가 정치적인 사안으로 웃으며 찍어 눌러버렸고.
“죄송하지만 정중히 사양드리겠습니다. 사도께서 무척이나 피로해하시는지라.”
좋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 있는 상대는 페이비가 웃으며 돌려보냈고.
“그 이상 다가오면 죽어.”
이성으로 넘어갈 수 없는 상대는 프레이가 살의로 위협했다.
덕분에 난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사람으로 인해 곤란을 겪지 않았다.
아 물론 사람들이 날 찬양하는 것까지 막은 건 아니긴 한데, 다른 사람들의 환호성이 계속해서 이어지니까 어느 순간부터 익숙해지더라.
다른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는 게 당연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 새끼들이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고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있다.
난 더 이상 누군가 칭찬을 해준다고 부끄러움을 타는 꼬맹이가 아니란 거지!
완벽하게 극복했다고!
“사도 누나! 완전 대단해!”
어린아이의 미소에 움찔하고 굳었던 나는 히죽 웃었다가 내 메이스 안에 있는 누군가의 진득한 시선을 느끼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뭐요! 불만 있으면 말해요!’
<왜 지래 찔려서 그러는 게냐.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만.>
‘목소리만 안 냈을 뿐 이미 말했잖아요! 하! 성직자다운 음흉함이시네요!’
<거기서 왜 성직자란 단어가 나오나!>
할아버지와 투닥거리면서 성지로 돌아온 나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카리아와 만났다.
최근 들어선 매일 같이 날 만나러 와선 이런저런 걸 보고하러 왔다.
예전 같았으면 굳이 말하지 않을 내용까지 일일이 읊어대는 걸로 보아 이 녀석도 날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아줌마의 오지랖이 거슬리긴 하지만 날 도우려는 사람들을 막는 게 잘못이란 걸 이해한 나는 굳이 카리아를 말리지 않았다.
“아줌마. 오늘은 또 무슨 쓰잘데기 없는 걸 말해주러 온 거야?”
“쓰잘데기 없는 거라니. 제대로 된 보고라고?”
“하아. 네에. 그러시겠죠. 대화할 사람이 없는 외톨이 아줌마를 상대할 걸 생각하니 참 막막하네.”
“그딴 소리는 이거나 보고 지껄여. 이번엔 진짜 중요한 이야기니까.”
“그럼 여태까지 보고하러 왔던 건 별로 안 중요했단 이야기네. 아줌마? 푸후훟. 그렇게 외로웠어? 사실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훌쩍이는 거지?”
“이거 찢는다?”
카리아의 손에서 종이를 가로챈 나는 거기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최근 거대 던전들의 동향. 악신을 모시는 신도들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 화산의 활동. 바다 인근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들.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 교황이 직접 움직이며 회수한 악신의 아그라의 봉인들.
“모두 다 모였어. 고용주님이 예상했던 대로.”
교황이 조각을 회수하는 걸 막으려면 막을 수는 있었다.
조각이 봉인된 위치는 정해져 있으니 그 곳에 대기하고 있으면 얼마든 그의 앞을 방해할 수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내버려 둔 건 변수를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교황은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악신 아그라를 부활시켜줘야 한다.
대지에 존재하는 악신의 수하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대지 이곳저곳에서 재앙이 일어난 뒤에, 각 대형던전에 봉인되어 있던 악신들이 봉인을 깨고 모습을 드러낸 후, 이 세상을 검정으로 물들이며 거창하게 등장해줘야 해.
내가 그 녀석을 가지고 놀 수 있도록 말이야.
“그거 자세히 조사하면서 알게 된 건데 여태 고용주님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 몇 번 일어났잖아? 그거 교황 쪽 사람이 벌인 짓이더라.”
“그렇겠지. 그 징그러운 정신병자 새끼가 가만히 있겠어?”
“고용주님은 당연하게 말하는 데 말야. 그 새끼 주신을 모시는 거잖아? 신앙에 위배되는 일을 그렇게 공공연하게 저질러도 괜찮은거야?”
“그딴 걸 생각하고 있었어? 진짜 아줌마는 눈치가 없네. 그러니까 여태 혼자 사는 외톨이지.”
“…비난은 빼고 설명만 해줄래?”
“생각을 해 봐. 그 정신병자는 애초부터 지상의 허접들이 어찌 되는 가는 생각하지 않았어.”
착각해선 안 된다.
교황은 주신이 지닌 뜻을 신앙하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자비를 베풀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의 그는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죽음을 잃어버린 그는 영원히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꼬맹이나 다름없다.
“그 병신이 주신을 신앙하는 게 아니면 뭔데.”
“징그럽고 역겨운 스토커지.”
“스토커?”
“스토커가 뭔지 몰라? 자기 혼자 제멋대로 착각하고 서로 사랑한다 생각하고 민폐를 끼치는 변태새끼잖아.”
교황은 어디까지나 주신이란 존재를 일방적으로 사랑할 뿐이다.
그래. 사랑이다.
그의 마음은 신앙이나 믿음 같은 게 아닌 질척이고 끈적거리는 사랑에 불과하다.
자신을 구원해주었다 믿는 주신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제멋대로 망상한 끝에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상대방이 그걸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미쳐버린 정신병자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이미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상대도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설령 당장은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게 끝나면 납득할 것이라 여긴다.
“정신병자가 사랑하는 건 개허접변태주신 하나야. 다른 놈들이 어찌 되건 그 새끼가 신경 쓸 것 같아?”
지상의 사람들이 모두 죽어도 상관 없다.
여러 신들이, 개념 그 자체가 사라지며 생겨날 혼란 속에서 재앙이 일어나도 괜찮다.
설령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뭐 어떤가.
결국 그 끝에 자신이 사랑하는 주신에게 모든 걸 쥐어줄 수 있다면 교황은 그걸로 만족할 것이다.
그게 주신이 바라는 일이 아닐지라도.
“저기 고용주님.”
“뭔데.”
“어쩌면 고용주님이 여러 변태들을 홀리는 이유는 주신의 사도이기 때문이 아닐까?”
“…엉?”
“봐봐. 위대하신 주신도 교황 같은 변태가 꼬이잖아. 어쩌면 주신의 신성에 그런 영향이 있는 걸지도 몰라.”
…어라?
그런가?
그런 건가?
내 주변에 얼빠여우나 변태사도 같은 역겨운 놈들이 꼬이는 원흉이 주신이라고?
원한의 서에 한 줄을 더 추가해야겠네.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잔뜩. 잔뜩. 자아아안뜩 괴롭혀 줄 테다.
“뭐어. 아줌마의 망상은 그 쯤 듣고. 제대로 된 이야길 하자.”
“아아. 그래. 슬슬 시작하는 거지?”
“곧 아그라가 부활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