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라라는 신은 가장 오래된 존재 중 하나였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니 태초를 시작한 아르마디가 있는 이상 그 뒤에는 아그라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때의 아그라는 미약했다.
막 시작된 세상은 끝이란 단어가 가장 희미한 장소였고, 그렇기에 아그라는 자기자신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가만 지켜봐야만 했다.
얼마의 세월이 흘러 대지에 인간이 자리를 잡았을 무렵 아그라는 자아를 얻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그는 세상을 끝으로 이끄는 존재였으며 이 세상의 종말을 마주해야만 하는 이였다.
세계에 끝을 선고하는 신이었다. 아그라는 자신의 사명에 따라 세상을 움직였다.
대지의 인간들을 달콤한 말로 끌어들여 자신의 영향력을 키웠다.
자신과 뜻을 함께할 신들을 동료로 삼았다.
전쟁을 선포했다.
권력을 독점하는 아르마디를 끌어내리기 위함이란 명분을 든 채, 사실은 이 세상의 끝을 선고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서 대지에 전화를 피워올렸다.
전황은 아그라에게 유리했다.
전쟁이라는 것은 수많은 것이 끝나는 일일 지어니. 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희망이 꺼져가고 미래가 흩어지며 삶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아그라의 힘은 더욱 더 강해져만 갔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분명 아그라는 신화의 시대를 끝으로 이 세상에 종막을 선고했으리라.
용사라는 기적이 대지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아르마디가 자신의 존재를 내걸고서 도박을 하지 않았다면, 최후에 세상이 끝을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아그라는 승리했을테지.
허나 세상은 끝을 바라지 않았다.
신화의 시대에 종막을 고하는 대신 인간의 시대를 시작하는 것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아그라는 패배했고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오랜 시간을 침묵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그라님.”
인간 남자아이와 비슷한 자신의 육신을 살피던 아그라는 웃음과 함께 정중히 고개 숙이는 사도를 보고선 한 쪽 눈썹을 내렸다.
“날 완전히 부활시키지 않았군. 조각 하나의 봉인만을 풀었나.”
“대마법사 에르기누스의 마법이 워낙에 뛰어났던지라.”
“티나는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자네는 봉인을 못 푼 게 아니라 안 푼 것이지 않나.”
“알고 계셨습니까?”
“봉인 속에서도 바깥의 정경은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다. 네 놈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지.”
아그라의 사도는 주신을 상징하는 목걸이를 당당히 걸고 있었다.
과거 아그라를 신으로 숭배했던 사도는 이제 반대편에 서선 그를 도구로 이용하려 들고 있다.
봉인을 완전히 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아그라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신화의 시대를 촉발하기 위한 재료일 뿐. 사도는 그의 바람을 이뤄 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럼 뭐합니까. 알고 계신다 한들 달라질 게 없는데.”
아그라는 반짝이는 십자가에 비친 자신을 살폈다.
그의 사도가 하는 말이 옳았다.
작금의 아그라는 무력했다.
아그라가 봉인된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아그라는 깊고 깊은 곳에서 봉인이 풀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눈 앞의 사도는 세상을 유랑하며 영향력을 흩뿌리고 다녔지.
그 탓에 끝이란 개념 자체가 교황이란 인간의 편을 어느 정도 들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봐라. 네가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아르마디는 슬퍼할 게 분명하니 말리지 않으마.”
“실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옛 정으로 경고하겠다. 끝이 그대를 가만 내버려두리라 생각하지 마라.”
“하하하. 그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 모든 일이 끝날 때 저의 이야기 또한 끝을 맺을 테니까요.”
아그라는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갔다.
허나 복도에 울려퍼져야 할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게 끝의 권능이 지닌 힘 중 하나임을 아는 교황은 어깨를 으쓱이곤 문을 닫았다.
드디어 시작이다. 오랜 기간 간절히 바라고 기원하던 일이 드디어 시작점에 올랐다.
위대하신 주신 아르마디시여. 부디 제가 드리는 선물을 받아주시옵소서.
당신의 영광만이 이 세상이 퍼지게 할 터이니 그 영광으로 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소서.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부디. 저를 당신의 품에 안기게 해주소서.
*
이른 아침. 퍼뜩 몸을 일으킨 나는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아그라가 부활했다. 그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째선지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아그라가 다시금 이 대지에 모습을 드러냈단 걸.
<기이하구나. 악신이 부활한 것치고는 너무도 고요하지 않으냐.>
‘완벽하게 부활한 것이 아니겠죠.’
아그라가 벌써 완벽하게 부활해버리면 교황이 제어할 수 없게 되니까.
일부만 부활시켜 두고서 서서히 권능을 장악할 생각일테지.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타이밍도 맞아떨어져요. 이제 슬슬 진짜로 위험한 악신의 수하들이 모습을 드러낼 테고 대형던전 쪽에 변화가 생겨날 거고 신화의 시대가 시작되겠죠.’
전초전은 끝났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 때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
‘못할 건 없죠.’
일정이 꽤 빡세긴 하지만 그닥 힘들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 주변에는 날 지탱해 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들을 위해서라도 난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죽어라 내달리 거다.
무엇보다도 말야. 이 시기에 모든 일을 끝내면 진짜 스피드런 최고 기록이 돼!
게임 속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기록을 여기에선 세울 수 있게 된다고!
2학년이 끝나기도 전에 게임 클리어라니! 이 기록을 그대로 현실에 들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히죽거리다 바깥에 있던 에린을 불러들인 나는 몸단장을 끝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던전으로 향했다.
확실히 슬슬 던전 난이도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네.
공기가 한층 더 탁해진데다가 정신에 가해지는 영향도 커졌어.
안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강함도 상당한 수준인데다가 보스가 지닌 위압감도 상당해.
뭐어. 그래봐야 아주 오래 전에 공략해버린 허접들일 뿐이지만.
조이가 어둠으로 보스의 목을 집어삼킨 후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다음 장소로 움직이실거죠?”
“당연한 걸 왜 물어봐?”
“오늘은 절대 실수 안 할 거에요. 어제 스승님과 함께 계산을 다 끝마쳤거든요!”
“이제 슬슬 지겹지 않아? 언제까지 자기가 얼빵하단 걸 증명하려고 그래?”
“이번엔 달라요!”
“그 말을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군.”
“으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열 번은 넘었어. 분명해.”
“…죄송합니다. 조이. 솔직히 저도 믿음이.”
“이번엔 다르다고요!”
이런 생활이 길게 이어지는 중인지라 친구들은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웠다.
웃으며 조이를 타박하는 이들에게선 나에 대한 믿음이 느껴졌다.
나와 함께 한다면 어떤 고난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믿기에 두려움도 망설임도 잊어버린 이들의 얼굴은 너무도 듬직했다.
이전이었다면 저들의 믿음에 부응해야 한단 생각을 하면서 부담감을 느꼈을 텐데.
한 번 깨달음을 얻으니까 좋긴 하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던전 바깥으로 나온 나는 기이한 고요 속에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무언가 이상했다. 던전의 바깥은 언제나 환호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믿고서 바깥의 마물들을 상대하던 이들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우리의 모습을 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비웃음으로 화답을 해줬다.
헌데 오늘은 아니었다. 환호성은커녕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숨소리도. 그 어떤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꼭 우리가 던전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텅 빈 주변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묘한 직감을 느끼고서 신성을 끌어올려 정화의 권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이 무너져 내리더니 바닥에 고꾸라진 사람들과 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아이를.
“안녕.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네. 개같은 주신의 사도.”
남자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저건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존재다.
그 어떤 때보다도 강하게 느껴지는 혐오감에 방패를 치켜든 순간 남자아이가 손을 치켜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앞으로 튀어나온 프레이가 진심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공간이 베이고 남자아이의 손에서 희미하게 느껴졌던 무언가가 베여나간다.
“허어. 이걸 베다니. 무예의 신이 눈독 들일만 하군.”
“너 뭐야.”
“그건 너희들의 용사에게 물어보거라. 저 꼬맹이는 내가 무엇인지 알 게 분명하니.”
남자아이가 날 보며 웃기에 나도 방패 너머로 웃어줬다.
“맞아♡ 아주 잘 알지♡ 병신에 사디고 역겨운 변태 꼬맹이잖아♡”
“그런 식으로 날 도발해도 괜찮겠나? 그대의 친우들이 어떤 꼴을 당할 줄 알고?”
“푸하핳!♡ 뭐?♡ 설마 네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기 사도한테 처발려서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전이었다면 친구들을 생각하느라 죽어라고 고민하고 있겠지.
근데 그런 고민은 내다버린 지 오래야. 등신아.
“잘근잘근 밟아서 네가 패배자란 걸 느끼게 해줘야겠네♡”
굳이 이 녀석을 이길 필요는 없다.
이미 요정들과 조이를 통해 연락이 갔을 테니 적당히 시간만 끌면 전력이 이 곳에 도착해서 저 녀석을 박살내 줄 터.
이 또한 변수긴 하지만 우리 쪽에 좋은 변수야.
어쩌면 교황이 지닌 계획의 근간 자체가 흐트러질지도 모르니까.
“평~생 땅바닥에 처박혀서 흙이나 핥게 해줄게♡ 그게 너한테 어울리거든♡ 허접아♡”
얼마든 덤벼봐.
내가 널 몇 번이나 잡아 족쳤는데 버티는 것 하나 못할까.
“흐음.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에 비해 성장하긴 했군. 그래봐야 꼬맹이긴 하다만.”
“그러는 그 쪽은?♡ 키도 권능도 인성도 거기도 다 쪼끄마할 것 같은데에?♡”
질질 시간을 끌어서 질질 짜게 만들어줄 테니 어디 마음껏 날뛰어 보라고.
그리 생각하며 신성을 끌어올리던 도중 갑자기 아그라가 두 손을 위로 치켜 들었다.
“항복.”
“…뭐?”
“끝의 권능을 지닌 신으로서 패배를 인정하겠단 소리다. 이제이해가 되나. 꼬맹아?”
…
뭔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