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대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노라고 확언했다.
변수가 존재하긴 하겠지만 대개의 문제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얘기할 수 있었다.
카리아와 요한이 협업해 만들어둔 망이 그만큼 넓기도 했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손패가 잔뜩 쌓여있었던데다가, 내 친구들이 곁에 있다면 극심한 문제가 생기더라도 해결할 수 있을거라 여겼지.
“손님대접이 영 좋지 못하군.”
지금에 이르러서 나는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알게 됐다.
모든 변수에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현실은 창작물보다도 더 정신나간 일이 벌어지는 장소라고. 우리가 쓰러트려야 할 최종보스가 갑자기 나타나서 항복선언을 하는 일도…
아니. 이걸 예상 못한 게 정말 내 잘못인가?
이딴 일이 벌어질 거란 걸 예상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냐?
얼빠여우 같은 변태새끼도 아니고 대륙의 공포를 사던 재앙이 항복하는 걸 어떻게 예상하란 말야!
“최소한 마실 것이라도 주는 게 예의이지 않나?”
어둠의 권능에 포박된 채 너스레를 떠는 아그라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팠다.
진정하고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자. 게임 속에 이런 경우가 있었나?
보스전을 제외하고서 아그라가 현실에 개입하는 경우 자체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음. 분명해. 아그라가 치는 대사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어.
“이봐. 건방진 꼬맹이. 내 말이 안 들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어. 이 새끼는 아르마디를 혐오하잖아.
그런 아르마디의 사도인 나에게 고개를 숙이기 위해선 각오가 필요할 거야.
…필요한 거 맞나? 항복선언을 한 후로 아그라가 완전히 즐기는 자가 되어버렸는 걸.
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헤으응. 하등생물한테 항복하다니. 신생 완전 끝나버렷!’ 같은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냐?
계속 히죽거리는 걸 보면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어이.”
“찐따님. 저 병신이 자꾸 지랄하게 내버려 둘 거에요?”
“어. 미안하다. 나도 이런 광경은 차마 예상하질 못했거든.”
“진짜 찐따같은 소리 하시네요.”
“…내 입장도 이해해주면 좋겠구나. 온갖 방식으로 날 죽이려 하던 마왕이 저 꼴을 하고 있는데 어찌 평온하겠느냐.”
<아그라가 저토록 실없는 존재였던가…>
당혹에 빠진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도. 에르기누스도. 심지어 요정여왕조차도 쉴 새 없이 투덜거리는 아그라를 보고서 눈을 끔뻑였다.
최근 들어 장난스러운 모습을 유지하던 여왕이 정색하는 모습은 꽤 재미있긴 했어.
눈 앞의 재앙만 아니었어도 마음 편히 웃었을 거야.
“이거고 저거고 됐으니 마실 것 좀 달라니까? 봉인에서 빠져나온 후로 마신 게 없어서 목이 마르다.”
“오줌이라도 가져다 줄까?”
“네 것이라면 기꺼이 마시지.”
…으에엑. 진짜 이딴 게 세상을 멸망시킬 악신이라고?
허접주신은 이딴 새끼한테 밀려서 질 뻔 했던 거야?
어쩐지 허접주신이란 호칭이 바뀌질 않더라. 진짜 개허접이라 그런 거였어.
<주신의 명예를 위해 말하자면 예전엔 저렇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할아버지가 몰랐을 뿐 그 때도 저런 새끼였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선 안 된다. 과거에도 저 꼴이었다면 우리의 고난이 폄하당하잖으냐!>
할아버지가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동안에도 아그라는 실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농담이다. 난 여전히 너 죽이고 싶어한다. 아주먼 옛날 네가 내 저주를 푼 순간부터 우린 항상 서로를 싫어했잖나.”
처음 소울 아카데미의 세상에 발을 디뎠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들간의 싸움은 나와 관련 없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당시의 나는 어디까지나 살아남기 위해 할아버지의 메이스를 구하러 갔을 뿐, 악신 아그라에게 원한을 살 생각은 없었지.
허나 내가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 날, 아그라는 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수 중 하나로 규정했고 아르마디는 날 재미난 장난감으로 여기게 됐다.
단순한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나와 아그라의 인연은 할아버지보다도 길 것이다.
“난 말일세. 지금도 그대의 끝을 바란다네. 그 뿐일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끝을 바란다. 대지에 그 어떤 생명도 피어나지 않는 날을. 모든 짐승이 죽어 고요만이 대지를 가득 채울 날을.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날을 간절히 기원한다네.”
“하. 헛소리는. 그러려면 너부터 뒈져야 할 텐데?”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는지 모르겠군. 종말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되어 있다. 끝을 기원하는 자가 끝을 두려워하리라 생각하는가?”
묶인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아그라가 철창 너머로 진득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대마법사. 어둠의 신이 된 너라면 알 것이다. 개념이 선사하는 충동이 자기 자신마저 침식한다는 것을.”
“네 놈도 그렇다는 소리냐.”
“아. 물론이지. 난 기본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바란다네. 그렇기에 날 파멸시켜줄 수 있는 이들이 싫어할 행동을 기꺼이 행하지. 그게 나의 바람과 어울리는 일이라면 환히 웃으며 파멸을 향해 걸어갈 것이야.”
아그라는 자신이 아르마디를 적대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세상의 멸망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파멸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르마디에게 승리한다면 그것대로 좋고 패배해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도 마음에 든다고.
그 어떤 경우에도 아그라는 만족스럽게 끝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에 기꺼이 전쟁을 일으켰노라고.
“용사놈들이 나타나 날 봉인시키려 할 때 얼마나 절망했던지. 너무도 어중간한 결말이지 않은가. 극을 보는 이들이 쓰레기를 집어 던질만큼 쓰레기 같은 내용이었어.”
“네가 자길 괴롭혀주길 바라서 시비를 거는 마조새끼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여긴 왜 온 건데.”
“나의 개같은 사도 때문이지.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어하던 놈이었다만 이번에 그 놈이 하려는 일은 실로 끔찍해. 시작의 권능을 지닌 아르마디에게 모든 힘을 선사하겠다니. 그건 안 되지. 그래선 안 돼. 세상이 멸망하지도 않고, 나 또한 아르마디의 안에서 어중간한 결말을 맞이해야 하지 않나. 그런 건 사양이야.”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어중이떠중이라는 건 알았지만 여태까지도 그 꼴로 살 줄은 몰랐다며 아그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병신이야? 네 사도잖아. 그것도 제대로 못 다루는 거야? 애완동물한테 물리는 개허접마조새끼라니 진~짜 한심하네.”
“어쩌겠는가. 용사놈들이 날 오랫동안 봉인해둔 탓에 끝의 권능마저도 사도놈의 편을 들고 있는데.”
“헤에~ 진짜 폐품 병신이구나? 푸흡. 권능한테 자길 돌아봐 달라고 그토록 발악했는데 결국 버림받다니 불쌍해라~”
“흐음.”
“너처럼 무능한 병신이랑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나봐. 기분은 어땠어? 부하가 너무 유능해서 당신 따위로는 만족 못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좋았어? 응?”
상대의 감정을 이끌어 낼 요량으르 매도를 퍼부었지만 아그라는 가볍게 웃을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조변태새끼답지 않은 걸. 봉인 속에 있을 때는 조금만 툭툭 건드려도 치졸한 방식으로 복수하려 들었는데 말야.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걸까.
“그런 반응이 돌아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네. 내가 그대를 괴롭히기 위해 한 일이 어디 한 둘이던가.”
“그걸 안다니 잘됐네. 이제 계~속 거기에 처박혀있으면 돼.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다시 네가 좋아하는 봉인을 해줄게. 병신아.”
“사도놈이 벌이려는 일에 대해 알려준다고 해봐야 그대는 코웃음을 치겠지. 그대가 지닌 예지는 수도 없이 많은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니까. 허나
한 가지. 그대조차도 모를 만한 것이 있다네.”“흐으응. 뭐어? 네가 답도 없는 쓰레기란거? 그거라면 잘 알고 있는데?”
“그대가 지닌 저주에 대한 것이지.”
저주란 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내가 지닌 힘 중에서 저주라 부를 만한 건 하나뿐이었으니까.
메스가키 스킬. 과거엔 루시를 괴롭혔고, 지금은 날 괴롭히고 있는 이 힘.
“그 힘은 자네의 출생에 관련된 것이며 자네가 지닌 업과도 연관된 것이다.”“흐응. 좆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거야?”
“아르마디가 그대에게 나누어준 권능도 저주를 완벽히 해소하진 못했겠지?”
…그걸 어떻게.
순간 당황해서 말을 멈췄더니 아그라가 웃음을 흘렸다.
“당연한 일이다. 그 업이 네가 모시는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어찌 그 자의 힘으로 해소되겠는가.”
허접주신으로부터 이 저주가 비롯됐다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르마디가 변태인데다가 주책맞고 무능하고 자기 신도들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허접이지만 그래도 착한 놈이라고. 저주와 관련되어 있을 리가 없잖아.
하. 진짜 이 새끼 분탕도 제대로 못 치네.
차라리 허접주신이 메스가키 취향이라 일부러 그랬다고 말했으면 지랄한다 생각하면서도 혹시 모른다고 의심했겠다. 등신아.
“우리 사도놈을 제압하는 걸 도와준다면 내 그대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알려주지. 내가 협력하는 걸 받아들여주기만 해도 괜찮다네.”
“흐으응. 정말 가능해?”
“물론. 이래뵈도 세상을 양분했던 신이다.”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긴 한데. 네 표정이 꼴 받아서 거절할래. 너 같은 폐품 등신이 잘난 체 하는 꼴이 너~무 보기 싫거든.”
메스가키 스킬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긴 하다.
그렇지만 악신에게 혼을 팔아가면서까지 할 정도로 간절하냐면, 그렇진 않다.
어쨌건 메스가키 스킬이 있기에 난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친구들을 지킬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미운 정도 정이다. 이 좆 같은 새끼한테 고개 숙일 바에야 평생 메스가키 스킬과 함께 할 테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든 채 비웃음을 흘렸더니 아그라가 눈썹을 살짝 들었다.
“이리 보니 그대가 참 재밌긴 하군.”
“그렇게 말해도 안 밟아 줄 거야. 내 피부가 썩을 것 같으니까.”
“나중에 궁금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건 물으러 오게. 내 여기에서 계속 그대를 기다릴테니.”
히죽 웃는 그의 모습에 코웃음을 친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 찾으러 올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