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8
아서가 내게 내민 조건은 이러했다.
대결의 조건은 던전 공략.
지금으로부터 5일 뒤인 토요일 오전 11시에 똑같이 던전에 들어가서 그 날 오후 6시까지 누가 더 깊은 곳까지 공략하느냐.
던전 공략의 멤버는 교수나 재학생 한 명을 제하고는 1학년으로만 구성.
서로를 공격하는 일은 금지.
이외에도 여러 자잘한 규칙들을 정해뒀지만 그건 그리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어쩔 생각이냐.>
아서와 헤어지자마자 할배가 내게 나지막히 물었다.
‘어쩌긴요. 이겨야죠.’
<너랑 던전에 들어갈 사람조차 구할 수 있을까 싶은 상태에서?>
그건 문제가 있긴 하지.
안 그래도 평판이 안 좋은 나다.
방금 전에 아서와 대치한 것 때문에 3왕자와 척을 졌다는 소문이 났을 터인데 이 상황에서 내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있을까?
아서에게 밉보일 걸 각오하고서 망나니 영애를 끌어안으려는 사람이?
없을 걸.
설령 있다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테니 안 데려가느니만 못하겠지.
‘그래도 한 명은 있어요.’
원래라면 지금 내 옆을 따라 걷고 있는 프레이도 그런 사람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선녀처럼 보이네.
‘프레이…’
“허접 검사.”
“파티 할 거냐고 묻는 거지?”
오? 얘 왜 오늘따라 눈치가 좋지?
평소 같았으면 내가 말을 해도 고개를 갸웃거려야 하는데?
“해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프레이가 바랄만한 조건?
그런 게 있나?
검을 휘두르는 것과 대련을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생각하는 녀석인데.
“대련해줘!”
‘네? 대련이요?’
“뭐? 대련?”
“응!”
‘매일…’
“맨날 지겹도록 하고 있잖아. 허접 검사. 머리에 이상이라도 생겼어?”
나와 프레이는 매일 저녁 수업이 끝나고 나서 계속해서 대련을 하고 있다.
나도 프레이도 같은 학년 내에서는 대적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인간인지라 대련을 하는 것이 서로의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러니 대련을 해달라는 것은 부탁이 될 수 없다.
“나중에 핑계대고 안 할 수도 있으니까!”
아아.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미리 목줄을 걸어 놓겠다는 거야?
너 평소에는 맹하면서 은근히 영악하네?
‘알겠어요.’
“알겠어. 허접 검사.”
애초에 난 프레이와 대련에서 도망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 빌어먹을 아카데미에서 나랑 대련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언더독 스킬 얻는다고 3학년 선배를 패버린 후로 수련장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 눈을 피한다고!
그나마 프레이를 대체할 수 있는 게 칼이지만 그 녀석 요즘에 바빠 보이니까 무작정 부르기도 그렇고.
“약속한 거다?”
‘네.’
“그래.”
프레이는 내가 고갤 끄덕인 걸 보고서 만족한 듯 저 앞으로 혼자 뛰어가 버렸다.
<한 명은 채웠고 다른 둘 중 하나는 네 기사를 구한다 치더라도 남은 하나는 어찌할 테냐.>
‘그건 이제부터 고민해봐야죠.’
지금 상황에서 제일 밸런스가 좋은 건 페이비나 조이다.
전위는 나 하나면 충분하니까 후위에 서서 지원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
내가 힐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만큼 조이가 파티원으로 들어와 주는 게 제일이지만 지난번에 불쌍왕자사건 이후로 조이랑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녀가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천성이 착한 그녀의 성격상 날 미워하진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도와줄 것 같지도 않다.
페이비는.
글쎄.
순백처럼 새하얀 마음을 가지신 분이니까 대가리를 박고 제발 도와주세요!를 외치면 동정심에라도 도움을 주지 않을까.
메스가키 스킬이 때문에라도 그런 추한 짓을 할 순 없겠지만.
허접 성녀님. 절 도울 기회를 드리죠. 같은 소리나 지껄이지 않을까.
그래도 부탁은 해보자.
정 안 되면 엑스트라라도 협박해서 끌어들여야지 뭐.
*
“3왕자님.”
아카데미의 점심시간.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아서는 갑작스레 찾아 온 조이 파트란을 보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표정이야 언제나 좋지 않았지만 오늘은 더하군.
거기에 더해 주변 사람 없이 혼자서 날 만나러 온 걸 보면 무척이나 화가 난 모양이야.
“조이. 무슨 일이지?”
“말씀 드릴 게 있어서요. 둘이서 대화를 해도 될까요?”
“음. 마침 잘 됐군. 안 그래도 나도 할 말이 있었으니.”
아서는 왕자답게 격식을 차리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조이와 함께 식당 바깥의 정원으로 향했다.
조이는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 도착을 하자마자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 추측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루시 알른에게 승부를 제안한 것 때문에 그러나?”
“예. 정확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군. 공정한 승부를 하기로 한 것 뿐이거늘.”
“공정이요? 들어보니 알른 영애에게 불리한 조건만 가득하던데요.”
던전 공략을 조건으로 삼은 것부터가 그렇다.
4인 파티를 구성하는 것조차 버거운 루시와는 달리 아서는 얼마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을 구성할 수 있다.
아무리 루시 알른 개인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파티원에서 차이가 나면 불리할 수밖에.
이 뿐만이 아니다.
서로 간에 전투 금지 조항을 달아 놓은 것도.
귀물의 사용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도.
이외의 모든 조건의 아서에게 유리하게 구성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승부의 결과로 얻는 것마저도 그랬다.
아서는 잃을 것이 없지만 루시는 잃을 것이 넘치는 불공정 계약.
여기에 공정하단 소리를 하는 건 계약의 신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그게 문제가 되나? 서로 합의한 것일 텐데.”
아서가 태연히 대답하자 조이가 눈에 힘을 줬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셨으면서요?”
그 말을 들은 아서는 웃음을 짓는 것으로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루시 알른의 평판을 이용해 그녀를 압박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더라도 고개를 끄덕인 건 끄덕인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비난이 두려워 제안을 수락한 것은 루시 알른이다.
아서가 그리 말을 하자 조이가 입을 다물었다.
원칙적으로는 아서에게 문제 될 게 없는 것이다.
“뭣보다 이 일을 시작한 건 루시 알른이지 않나. 내가 이러기로 결심한 건 어디까지나 그 자가 나를 불쌍왕자라 불렀기 때문이니까.”
그렇다고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무어라 할 수 없는 게 이것 때문이다.
먼저 아서에게 시비를 건 사람이 루시 알른이니까.
아서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모욕에 복수를 택했을 뿐인 것이다.
“왜 내게 무어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군.”
조이라고 해서 저러한 사실들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녀가 아무리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 한들 그래도 공작 가문의 영애.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 정도는 있다.
“조이. 여전히 루시 알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생각하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에게 찾아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조이가 루시 알른을 은인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을 아서가 꼬집자 조이가 입술을 살짝 씹었다.
“맞아요. 그게 잘못됐나요?”
“아니. 잘못되진 않았지. 다만 서운하기는 해.”
아서는 목소리를 내며 조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조이가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자 중에서 그럴 뿐이다.
당장 성인 남성과 비교해도 뒤처짐이 없을 아서에 비하면 작을 수밖에 없다.
얼음결정이 맺힌 것 같은 청색의 눈동자가 조이를 내려다본다.
“그대와 내가 알고 지낸 세월이 길고도 길거늘. 저 건방진 영애의 편을 들다니 말이야.”
“은혜는 확실히 갚으라고 부모님에게 배워서요.”
“훌륭한 분들답게 좋은 교육을 하셨군.”
반쯤 협박하듯이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치 물러섬이 없는 조이를 보고서 아서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겁먹은 기색이라도 보였을 터인데.
그 던전에서 돌아오고 난 후로 사람이 많이 바뀌었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어지?”
“애초에 왕자님은 알른 영애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어요. 승부를 제안한 것도 어디까지나 알른 영애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 뿐. 악질적이에요.”
“그래. 조이. 네 말이 옳다. 그래서 무어가 잘못되었는가.”
조이가 하는 말을 다 듣고 난 후 아서가 두 팔을 버릴며 목소리를 높였다.
“본인이 배운 것은 그대와 다르다. 은혜뿐만이 아니라 원한 또한 제대로 갚아야 한다 배웠지.
루시 알른은 본인의 치부를 건드렸다. 그것도 본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치부를!
그러니 본인은 그녀에게 굴욕을 안겨줌으로써 그를 갚을 것이다! 본인의 생각에 문제가 있나? 있느냔 말이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를 지르던 아서는 조이의 굳은 얼굴을 보고서 헛기침을 하고는 얼굴을 쓸어 올렸다.
“자네가 그리 생각을 하는 걸 보면 그대는 내 제안을 들을 생각이 없겠군.”
“파티원이 되어달라하려 하셨습니까?”
“그래.”
“정중히 거절드리겠습니다. 다만 왕자님과의 정을 생각해 알른 영애를 돕지도 않겠습니다.”
“그것 참 고맙군.”
할 말을 마친 조이가 인사를 하려 할 때에 아서가 그녀를 붙잡았다.
“조이. 하나만 묻지.”
“무엇입니까?”
“누가 이길 거라 생각을 하지?”
“알른 영애가 이길 겁니다.”
조이는 아서의 물음에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방금 전까지 루시가 불리하다느니 불공평하다느니 잔뜩 지껄여댔음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온 대답에 아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알른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죽었을 거라고.”
여태까지는 조이가 아무리 루시 알른이 대단하다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은 망나니 영애일 뿐이었으니까.
다들 파트란 영애가 겸손하다는 헛소리나 해댔지.
그럼에도 조이는 계속해서 루시 알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전 던전 공략 경험이 거의 없지만 알른 영애보다 던전을 더 잘 공략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네요.”
그 말을 끝으로 조이가 인사를 하고서 등을 돌렸다.
얼마가 지나 혼자가 된 아서는 가만 허공을 쳐다보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
페이비는 안타깝게도 내 부탁을 거절했다.
어느 쪽도 옳다고 말하기 어렵기에 둘 중 어느 편을 들 수 없다면서.
성녀님답다면 성녀님 다운 말이었다.
애초부터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성녀님이 아서의 편을 안 든게 어디냐.
이렇게 된 이상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이네.
하루 동안 들을 수업이 끝난 저녁.
나와 눈이 마주친 들러리 영애는 다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도망을 치려했지만 그녀는 사령술사고 나는 기사.
신체 능력에서 밀리는 그녀가 나를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내게 반쯤 강제로 끌려와 탁자에 앉은 들러리 영애는 두 다리를 다소곳이 모은 채 내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랑 일해줄 사람이 필요해서요.’
“사람이 필요해서 말야. 들러리 영애 같은 허접이라도 끌어들여야겠더라고.”
용건을 말하자 들러리 영애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