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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80

루시 알른이 떠나간 후 에르기누스는 어둠으로 의자를 만들어내 철창 앞에 앉았다.

그를 본 아그라는 에르기누스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웃었다.

“욕지거리라도 할 생각이라면 재고해주게. 자네에겐 무언갈 한 기억이 없거든.”

“그런 게 중요한가? 어차피 네 놈은 대륙의 공적이잖나.”

“지상의 인간들이 뭐라 지껄이건 관심없다만 같은 신격의 말은 신경 쓰이거든.”

어둠에 휘감긴 상태에서도 아그라는 태연했다. 이대로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무얼 바라서 여기에 왔지?”

“앞서 말했잖나. 주신의 사도 위에 수저를 올리고 싶었다고.”

“네 놈이 주신의 사도를 설득해 협력자가 되려 했다고? 헛소리를 하는 군. 네 놈은 그런 성격이 아니잖나.”

에르기누스의 기억 속에는 끝의 악신이 지닌 성향에 대한 내용도 존재한다.

신의 명을 받아 전선에서 끝의 악신과 대립했던 대마법사는 끝의 악신을 계획적인 악으로 규정했다.

이 세상의 모든 끝을 보고서 자신이 바라는 결말을 향해 인도하는 악마라고 말이다.

“다시 묻지. 무얼 하러 왔나.”

“주신의 사도에게 밟히고 싶어서 왔다만.”

“…진짜로?”

“이봐. 왜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나. 앞서 한 말보다 실없는 말이지 않은가.”

지극히 이성적인 대답이었지만 에르기누스는 차마 그렇다고 말하질 못했다.

그의 말을 웃어 넘기기엔 루시 알른이 만들어낸 수많은 예외들을 눈에 새겼으니까.

당장 에르기누스가 사랑하는 요정여왕조차도 루시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려 하고 있지 않나.

“뭐어. 아예 없는 말을 아냐. 저 꼬맹이는 날 망가트릴 수 있는 존재니까.”

“역시나 그랬군.”

인간이고 신이고 간에 루시 알른 하나에게 휘둘리는 꼴을 보면 참 신기해.

고갤 주억이는 에르기누스의 모습에 아그라가 코웃음을 쳤다.

“허나 본 목적은 아냐. 주신이 아끼는 저 꼬맹이는 필멸의 존재이지 않나.”

제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시간 앞에서는 결국 스러진다. 아그라의 앞을 가로막았던 용사가 그랬던 것처럼 세월의 앞에 파멸을 맞이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왕국도 스러지고, 인외의 존재가 만들어낸 무구도 빛을 잃고, 신들의 영광조차도 잊혀져가니, 세상은 멸망을 바라지 않아도 시간은 끝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야.”

아그라는 급할 이유가 없다. 결국 길고도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아르마디는 잊혀질 것이고 아그라는 세상에 종언을 선고할 테니까.

“그러니 내 입장에선 나의 사도가 벌이려는 일이 실로 거슬릴 수밖에 없지. 시작에 영원을 부여하려 한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게 진정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어둠의 신이여. 결국 우리는 개념의 대리인에 불과해. 그들이 우리를 택했기에 그들의 뜻을 대행하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들에게 선택지가 아르마디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개념은 그걸 택하겠지.”

현실적이라는 말은 신들이 지닌 힘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

세계를 이루는 개념이야말로 그들이 다루는 힘일지어니, 상식이란 단어로 그들이 하려는 일을 단언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어라도 묻게. 내 기꺼이 협조를 해주지. 당장은 그대들이 영광을 얻을지라도 그 끝에는 내가 승리할테니까.”

에르기누스는 아그라의 미소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자는 자신의 사도가 벌이는 일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방해하고 싶다 말하고 있다만 실제의 의도는 다르다.

아그라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교황을 내버려두는 걸로 자신을 없앨 것인지, 아니면 교황을 가로막고서 언젠가 찾아올 멸망을 마주할 것인지.

에르기누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건 저 말을 부정하기가 힘들단 사실이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찾아왔듯 언젠가 인간의 시대마저 끝나고 종말이 가까워질 때가 올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르마디의 권능은 약해질 것이고 아그라의 권능은 강해지겠지.

그 때가 왔을 때 우리는 끝을 막을 수 있을까? 예정된 끝의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을까?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네요.”

여태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요정여왕이 코웃음을 치며 에르기누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결국에는 당신이 승리할 거라고요?”

“모든 게 스러지고 나면 자연스레 그리 되겠지.”

“신화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도 당신은 그리 말했습니다. 허나 용사에게 패배했죠. 그리고 당신의 봉인이 풀리는 순간이 찾아오면 대지는 멸망하리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도 당신은 패배할 겁니다. 주신이 택한 사도가 모든 걸 가로막을 테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언하듯 확언하는군. 그래. 네 말대로 모든 게 이루어진다 치자. 그럼 그 다음에는? 먼 미래에는 누가 날 가로막을 거지?”

“그 때에는 그 때에 걸맞는 기적이 당신의 앞에 서겠죠. 용사가 그랬고 알른 영애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는 멸망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아그라. 당신은 영원히 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여왕의 말이 끝난 순간 처음으로 아그라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그마한 여유마저도 잃어버린 그는 가만 요정여왕을 노려보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꿈과 같은 이야기군.”

“한 번은 우연이고 두 번은 필연이죠.”

“설령 세 번째 기적이 일어난다 한들 네 년은 그걸 보지 못할 거다. 어둠의 권능을 품은 이상 언젠가 거기에 잡아먹힐 테니까. 당장은 버티고 있지만, 하. 언제까지 그런 기적이 이어질지 참 궁금하군.”

요정여왕은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아. 당신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군요?”

“…허세를 부릴 생각인가?”

“아뇨?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영원토록 패배해야 할 당신에게 왜 허세를 부려야하죠? 제 옆엔 당신보다도 훨씬 더 유능한 구원자가 있는걸요.”

요정여왕은 사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루시가 말해주었던 계획을 떠올리며 쿡쿡거리다가 에르기누스의 어깨를 붙잡아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무능한 악신님. 여기에서 다시 봉인될 그 날만을 고대해주세요.”

그렇게 에르기누스와 요정여왕이 떠나가고서 홀로 남은 아그라는 어둠 속을 가만 노려보다가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저게 어떻게 요정들의 여왕인가.”

*

아그라가 포획된 다음 날. 대형던전이 있는 각각의 도시에서 이상현상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불의 악신이 봉인된 곳에서 화산의 활동이 감지됐어. 재난을 연구하는 마법사의 보고에 따르면 이틀 뒤에 분화가 시작될 모양이야. 일단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피난권고를 내려놨어.”

불의 악신은 아주 깊은 곳에 잠겨 있던 용암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악신의 부활이 예정된 순간부터 미리 경고해 둔 일이었기에 도시의 사람들은 정해져 있던 대로 피난을 시작했다.

“공허의 악신이 봉인된 곳에선 환각이 퍼져나가고 있어. 고용주님이 말해준 것처럼 에르기누스님과 요정들의 지원을 기반으로 대응 중이야.”

공허의 악신은 자신의 권능으로 대지에 혼란을 선사하려 했다.

그렇지만 이리 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우리는 대마법사와 요정을 파견하는 것으로 공허의 권능에 대응했다.

조이가 공허의 권능에 대응한 방식을 보고는 며칠 만에 완성시킨 에르기누스이니만큼 그 곳의 혼란은 머잖아 사그라들겠지.

“파괴의 악신은. 어. 전혀 반응이 없어. 고용주님이 말한 대로이니 부활이 진행중이긴 하겠지만 말야.”

파괴의 악신은 묵묵하게 봉인이 풀리는 날만을 기다렸다.

지금 그 곳은 고요로 물들어 있을 테지만 언젠가 파괴의 악신이 부활할 날이 찾아오면 다른 그 어떤 장소보다도 끔찍한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파괴라는 개념이 지닌 힘은 경악스러운 공포로 다가올 테니.

“이외에도 고용주님이 말한 것처럼 다섯 장소에서 던전이 생겨나려 하고 있어. 크기로 유추해봤을 때 여태 고용주님이 공략했던 곳 중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비견 될 것처럼 보여.”

아그라의 완전한 부활이 가까워졌단 걸 증명하듯 대지 이곳저곳에서 재앙이 연이어 시작된다.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며, 소울 아카데미의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증명.

카리아의 보고를 모두 들은 나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모든 게 내 생각대로 흘러간다 하더라도 그 끝에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적을 쓰러트려야만 한다.

과거 신화의 시대에 악몽으로 군림했던 존재이며 소울 아카데미의 진 보스 취급이었던 자.

악신 아그라의 사도이며 악신 그 자체가 되려는 이.

그 끝에 자신과 함께 모든 걸 파멸로 이끌려는 미치광이.

교황.

여태까지 난 강적을 상대할 때마다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야만 했다.

조금만 비틀리더라도 죽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지. 내가 여태 상대했던 그 어떤 적보다도 교황은 강대할테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너 혼자 움직일 생각이더냐?>

‘아뇨. 이젠 그게 잘못이란 걸 아니까요.’

친구들을 위한다는 내 독선이 사실 친구들을 괴롭히고 있었음을 안 이상 친구들을 내버린 채 홀로 죽으러 가진 않을 것이다.

죽어도 나 혼자 죽는 게 아니라 모두 함께 살기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

대지를 물들였던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길게 심호흡을 하고서 몸을 일으킨 나는 용사의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가자.”

*

“슬슬 오실 때가 되셨군요.”

아그라의 봉인이 담긴 수정구들을 바닥에 늘어트린 교황은 저 멀리에 있을 이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부디 제가 준비해둔 것을 맞이하고서 좋아해주셨으면 합니다. 사도시여.

당신조차 모를 당신의 비밀을 안 순간부터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선물이니까요.

“시작합시다. 여러분. 모든 것은 위대한 주신을 위하여.”

“모든 것은 위대한 주신을 위하여!”

“그리고 고결한 주신의 사도를 위하여.”

“주신의 사도를 위하여!”

기사들의 외침을 들으며 교황이 손을 뻗은 순간 각각의 수정구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마법진의 한 가운데에 어둠이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아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언은 준비되셨습니까. 옛 주인이시여.”

“네 유언을 들을 준비는 됐다.”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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