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피난이 끝난 도시는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발을 디디는 곳마다 환호성을 듣는 생활을 반복해서 그런건진 몰라도 난 이 적막함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끝난 뒤에는 이런 고요 속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느긋한 전원생활을 계획하고 있는데 아서가 눈치없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세상을 구한 뒤의 그댄 사실상 현인신 취급을 받을 것이다. 온갖 곳에서 그대를 찾으려하겠지.”
망상에 현실을 들이밀지 말아줄래? 조금은 행복한 상상을 해도 괜찮잖아.
“조용한 곳에 숨기엔 루시의 얼굴이 널리 퍼져 있는 게 문제네요. 어디 산 속 깊숙한 곳에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관심을 피할 수 없을거에요.”
“오히려 꽁꽁 숨는 게 영애님의 신비함을 키워서 사람들을 집요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악평을 퍼트린다 한들 그 누구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을 테고.”
잠시 망상한 건데 그걸 철저하게 박살내지 말아줄래?
현실이 너무 절망적이라서 우울해질 것 같거든?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멘탈이 박살날 것 같다고!
“걱정 마. 루시. 내가 다 베어줄게.”
프레이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나는 앞으로 향하다가 도시 중심에서 신성을 느꼈다.
교회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기운이네. 교황의 성기사인가.
“무기 들어. 허접들.”
신성을 끌어올린 채 거리를 걷는다.
사람이 떠나간 지 얼마 안 된 도시에선 아직까지 사람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희미한 음식의 냄새.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만 깨끗해진 창틀. 급하게 나가느라 닫지 못한 문.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문의 너머에서 보이는 찻잔들.
이 도시에는 일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상의 잔재가 남아 있는 동안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저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함이니까.
방패를 붙잡은 손에 힘을 더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던전의 문 앞에 도열한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적인 우리들을 보고서도 무기를 뽑아들기는커녕 오히려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주신의 사도님과 그 동료분들.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 하나 없는 음습한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우와. 어떤 변태같은 짓을 하려는 거야? 무슨 망상을 했는지 말해줄래? 잔뜩 비웃어줄 테니까. 응?”
“이 곳은 성하께서 당신께 선물하는 시련입니다. 부디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주시길.”
선두의 기사가 옆으로 물러서자 다른 기사들도 옆으로 물러나 던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도열했다.
귀빈을 환영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지옥으로 향하는 죄인을 환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벨까?”
처음과 다른 의미로 위험해진 프레이의 머리를 꾹꾹 누르는 걸로 입을 다물게 만든 나는 기사들의 인도를 따라 던전 안에 발을 들였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 던전은 거울과 관련된 컨셉을 지닌 곳이었을 거다.
전체적으로 퍼즐 느낌이 강한 곳이라 공략법만 인지하고 있다면 빠른 시간 내에 주파하는 게 가능하지.
모니터 너머에 있을 적엔 글리치를 써서 초 단위로 끝장을 봤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는 이 상황에서 벽뚫기 같은 기상천외한 짓을 벌일 순 없으니 정석 공략으로 가자.
굳이 급하게 움직일 이유도 없으니까 말야.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며 한 거울의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 주변의 풍광이 뒤바뀐다.
그 장소는 어느 빈곤한 나라처럼 보였다.
거리 여기저기에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사람들이 주저 앉아 있었고, 집 안에선 배가 고프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자꾸만 들려왔으며, 길가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걸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슬픔을 못 느끼는 것이 아니다.
비인간적이라 그런 게 아니다.
그저 눈물을 흘릴 힘이, 타인을 위해 애도할 기운이 없을 뿐이다.
“…예전에 제가 왔던 곳이네요.”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렇기에 절망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중 페이비가 입을 열었다.
무덤덤한 듯 하면서도 살짝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성녀에게도 이 광경이 끔찍헀단 걸 알려줬다.
“기나긴 가뭄으로 기아에 빠진 곳이었죠. 본국의 전쟁 탓에 지원이 오는 데에도 긴 시간이 걸렸고 제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채였습니다.”
“성녀님의 악몽 중 하나입니까.”
“예. 잊을 수 없는 광경입니다.”
눈을 감고서 방금 전 보았던 광경을 지운다.
그리고서 생각한다. 이 던전에서 일어난 변수를.
본래의 던전에는 이런 기믹이 존재하지 않았다.
방마다 존재하는 건 어디까지나 머리 아픈 퍼즐들뿐. 공략자의 정신을 건드리는 방식 따윈 존재하지 않았어.
바뀌었다.
왜?
“루시.”
“보채지 말고 기다려. 개보다는 참을성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주변의 풍경은 풍경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후 다시금 눈을 떴다.
결국 이 곳은 던전의 한 방. 무언가의 공략법이 존재할 테고, 교황이 이 방을 만든 데에도 분명한 의도가 있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위화감이 정답이겠지.
메이스를 치켜 들어 내 옆에 앉아있던 이를 후려치려 했지만 중간에 멈췄다.
기아에 굶주려 있느라 움직이지조차 못하는 남자는 자신의 코 앞까지 도착한 메이스를 보고도 반응하지 못했다.
난 안다. 약점파악과 미적감각이란 두 가지의 스킬이 있기 때문이 이 자가 거짓이란 걸 알고 있다.
아마 이 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가짜라고 느껴지는 적을 모두 쓰러트려야 할 거란 사실도 말이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난 차마 순진무구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이를 공격할 수 없었다.
설령 이 남자를 공격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저기에 있는 여자를 죽이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박살낸 끝에 이 방을 빠져나가는 게 진정 옳은 일일까?
그리고 그 다음엔?
페이비의 악몽이 끝나면 또 다른 누군가의 악몽이 시작될까.
또 누군가를 메이스로 찍어눌러야 하는 걸까.
조이의 악몽 속에 나오는 누군가를. 프레이의 악몽 속에 나올 이를. 아서의 악몽 속에 나올 누군가를. 쓰러트리고 쓰러트리고 또 쓰러트린 끝에 어리고 순수한 루시마저도 공격하고 나서야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걸까?
애초에 정말 빠져나갈 수 있긴 한 건가? 그게 정말 정답인가?
“루시. 중간중간에 이상한 거 있어. 벨까?”
프레이의 말에 내가 상상한 모든 이들의 목이 떨어지는 광경을 눈에 새기고만 나는 속에 든 것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렀다.
“내가 그걸 눈치 못 챘을 거라고 생각해? 그냥 가만 기다리고 있어. 멍청아.”
“응. 알겠어.”
고민을 이어나가던 나는 메이스를 거두고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계획을 바꾸자.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는 이상 무작정 공략을 거듭하는 건 의미가 없어.
정답을 찾아내기 전에 내가 무너질 거야. 그러니 정상적인 방법을 포기한다.
교황에 의한 변수가 생겨나더라도 이 곳은 거울로 이루어진 던전이다.
근간이 같다면 글리치도 통할 터.
“따라와.”
별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친구들은 의문 하나 가지지 않고 내 뒤를 따랐다.
“또 무언가 기상천외한 방법을 쓸 생각인가.”
“루시다워서 좋지 않아요?”
“상대가 비열한 방식으로 나오는데 영애님이라 하여 정면으로 나설 필요는 없죠.”
“재밌는 거면 좋겠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납득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평소에 말도 안 되는 짓을 반복해왔단 게 느껴졌다.
근데 이번에는 더 놀라울 걸? 여태 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말이 안 되는 짓이거든.
“어라? 저 앞에 뭔가 이상해.”
“하얀 땅?”
거울 속 세계는 분명 광할하지만 끝의 권능 속 세계가 그랬던 것처럼 무한하진 않다.
결국 이 세상은 던전의 무수히 많은 방 중 하나. 부여 받을 수 있는 리소스엔 한계가 존재하지.
그러니 무작정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어느새 방의 끝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멈춰.”
말라비틀어진 대지와 하얀 색으로 물든 땅의 경계 앞에서 멈춰선 나는 투명한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긴 원래라면 지나갈 수 없는 곳이지만 잘 찾아보면 올라탈 수 있는 곳이 존재하거든.
…아니지. 지금의 내가 굳이 위로 올라가려고 벽의 미묘한 틈을 찾아내야 하나?
그냥 훌쩍 뛰어올라도 가뿐히 끝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다리에 힘을 더한 나는 전력을 다해 뛰어 올랐고 보이지 않는 천장에 머리를 박고 그대로 낙하했다.
“여. 영애님! 괜찮으세요!?”
“…푸흡.”
“쿱. 루. 루시. 괜찮으. 푸핳. 세요?”
“크흐흫! 루시 완전 바보 같아!”
제에에엔장! 천장이 왜 이렇게 낮은 거야!?
모니터 너머에서 올라갈 적엔 스페이스바를 누르느라 손가락이 부서질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사실은 이렇게 낮았다고?!
말도 안 돼!
양 볼이 살짝 뜨거워진 걸 느끼며 재차 뛰어오른 나는 어렵잖게 벽 끝에 도착했다.
천장과 벽 사이에 살짝 남아있는 이 공간.
여기로 슬그머니 넘어가면?
짜잔. 던전 공략자는 알아도 넘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올 수 있답니다!
날 따라 친구들이 벽을 넘은 걸 확인한 나는 고갤 두리번거리다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프레이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허공인 줄도 모르고 앞으로 향한 프레이의 발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끝도 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걸 즐기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내 발만 졸졸 따라오라고 재차 경고한 뒤에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려던 순간 의문을 참지 못한 조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루시.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여기로 쭉가면 뭐가 나오나요?”
“개허접보스.”
“…네?”
“다른 걸 흉내 낼 줄밖에 모르는 자존감 바닥의 개허접 쓰레기 보스가 나온다고. 뭐. 크게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그 허접이 중얼거리기도 전에 박살내 버릴 거니까.”
원래 글리치 런이라는 건 그런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