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을 깨달은 라샤는 한참을 웃다가 짐승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을 뻗을 때마다 무언가가 부서졌고, 누군가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으며, 어떤 건물은 무너져내렸고, 누군가의 비명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다.
“겨우 이 정도냐!? 이 정도로 날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약자들이여!”
그 누구도 멈출 수 없을 듯 했던 라샤의 진격을 처음으로 멈춰 세운 건 베네딕의 검은 대검이었다.
파괴의 권능을 담은 주먹 앞에서도 금이 가기는커녕 되래 라샤를 밀어붙이는 그 모습에 라샤의 입가에 웃음이 새겨진다.
“짙은 밀도의 오러로 권능을 찍어 누른다니! 미쳤네!”
“난 누구처럼 권능을 베는 짓은 못 하겠더군. 그 대신 택한 방책이다.”
루시의 친구인 프레이는 베네딕에게 권능 그 자체를 베어버리는 기행을 보여주었지만 그건 그녀나 검성처럼 검의 극에 달한 이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 비한다면 검의 실력이 약간 떨어지는 베네딕은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갈 순 있어도 언제나 완벽하게 권능을 벨 순 없었다.
한 번의 실수가 목숨을 앗아가는 전장에서 불확실을 믿는다는 건 자살행위. 그렇기에 베네딕은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타고난 신체와 방대한 오러를 지닌 베네딕이기에 가능한 전략. 쉬이 말해, 힘으로 찍어누르는 방식을 말이다.
“하하하! 너 진짜 인간 같지 않아!”
“그러는 그대도 인간처럼 보이진 않잖나!”
둘이 격돌할 때마다 대지가 뒤틀린다. 이전의 지진으로 약해진 기반의 일부가 튀어오르고 가라앉는다.
불안정해졌던 건물들이 주저앉는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폭음이 사람들의 귀를 멀게 만들고, 인간끼리의 충돌에서 시작된 바람이 폭풍이 되어 사람들을 뒤로 밀어낸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완성되었을 때의 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네가 말하는 완성을 이해할 순 없다만 그걸 볼 일은 없을 거다! 그 전에 그대는 죽을 테니까!”
이 자리에 선 이들 중에서 약자는 없었다.
알른의 기사들도, 카리아가 데리고 온 전투원들도, 모두 다 악신을 상대하기 위한 전력들.
허나 어디를 가더라도 귀히 대접받을 강함을 지닌 이들이라 할 지언정 이 곳에선 무의미했다.
강함은 상대적이고, 베네딕과 라샤는 강했으며, 다른 이들은 그에 비해 약했다.
그들이 예측했던 대로.
“고용주님에게 보고! C로 간다! 움직여!”
기사들과 파괴의 신도로 잠입했던 이들은 카리아의 외침에 따라 한치 망설임 없이 이동했다.
“신망이 없나 봐? 널 저렇게 쉽게 버리다니 말야!”
“신뢰하기에 떠나는 거다! 평생을 홀로 산 그대는 결코 모를 마음이지!”
기사들은 베네딕의 강함을 믿는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라샤에게 패하지 않을 것이라 신뢰한다.
그렇기에 걱정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자신의 일을 하러 떠난다.
베네딕도 기사들과 카리아를 믿는다. 저들이 계획대로 움직여 승리를 거머쥘 것이란 걸 말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재미 없는 미치광이와 목숨을 걸고 각자의 무기를 맞댈 수 있다.
“하하하! 그러니까 나약해지는 거다! 베네딕 알른!”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다! 라샤!”
망나니처럼 날뛰던 베네딕에게 미라가 알려줬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하기에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단 것을.
무의미해보이는 명예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단 것을.
선의가 선의로 불러온다는 것을.
그리고 무언가를 지키기로 결심했을 때 사람이 얼마나 강해지는지를.
“그렇다면 증명해봐라! 네 녀석이 지금도 나보다 강하단 걸. 강자란 걸 증명해! 당장!”
*
뒤 편에서 들려오는 폭음을 들으며 카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 꽤 좋은 도시였는데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겠네. 건설할 때 몇 년이 걸리려나.
이번에 연을 맺은 사람한테 투자해서 아예 도시의 기반 인프라 쪽부터 사람을 집어넣어야겠어.
“가주께서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군요. 저 분을 내버려 둔 채 저희끼리 움직이는 건.”
카리아가 별 걱정 없이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 포셀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을 앞을 향해 있었지만 다른 모든 감각은 자신의 주인을 쫓는 중이었다.
가문이 아니라 한 사람을 주인으로 여기는 남자에게 있어 주인은 신뢰의 대상이며 그와 동시에 걱정의 대상이기도 했다.
한 번이라면 모를까. 두 번이나 자신이 인정한 남자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를 눈치챈 카리아는 피식 웃으며 풀쩍 뛰어서 포셀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뭐 하십니까.”
“힘들어서~ 어차피 너한텐 나 하나 쯤 아무것도 아니잖아?”
“다른 의미로 무겁습니다만.”
“닥치고 뛰기나 해. 근육돼지. 주인을 의심하는 불충한 신하에겐 이 정도 취급이 적당해.”
“역시나 눈치채고 계셨군요.”
“남정네 놈들은 미련하다니까. 걱정되면 한 마디 하면 될 텐데.”
“이미 막중한 짐을 짊어진 가주님께 저 따위를 올려놓을 순 없죠.”
“아. 그러셔?”
“그리고 아시잖습니까. 카리아님. 미라님을 만난 후부터 가주께선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랬나?”
지난 번에 왕국의 수도에서 얼빠진 얼굴을 했단 말이 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이야기가 한없이 길어질 테니 내버려둬야지.
“그러고 보면 카리아님. 이전에 제게 물으신 적이 있었죠. 가주님과 미라님이 만난 곳에 대해서.”
“아. 그 쓰잘데기 없는 기억 꺼내지 마. 떠올리기 싫으니까.”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 곳은 한가로운 시골 마을이었을 텐데요.”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내가 속아넘어갔단 부분에 대해 말하는 거지.”
가벼운 어투로 떠들던 두 사람은 어느새 악신이 부활하기 직전인 던전의 앞에 도착했다.
“일을 시작할 때까지 좀 시간이 남네. 으음. 옛날 이야기나 할까.”
“지금 말입니까?”
“지금이니까 하는 거야. 패배는 승리로 뒤집어 쓰는 편이 나으니까. 그게 내 인생을 빼앗아간 놈의 동료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
카리아가 마리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베네딕과 만난 다음 날이었다.
당시 왕국의 개로 살고 있었던 그녀는 왕국의 최고 전력인 베네딕을 유혹한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조사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우선 주변의 정보를 탐문하고 마을의 깊숙한 곳에 숨어있을 정보까지 확인한 뒤에 여행객을 가장해 미라를 찾았다.
그리고 확인하게 된 것은 이전에 카리아가 조사한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정보였다.
미라는 무척이나 단순하고, 그렇기에 신기한 선인이었다. 사람은 다각적인 존재다.
모든 방향에서 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존재는 신화 속에서나 나타날 이였다.
‘아하하. 칭찬 감사합니다만. 제겐 과분한 이야기네요. 전 평범한 여자애인걸요.’
그녀 본인이 말한 것처럼 미라는 평범했다. 시골에 있기 아까운 외견을 제외한다면 어디를 보더라도 그랬다.
다만 너무도 정상적이고 올곧기에 오히려 비정상의 영역에 가깝단 인상을 줬다.
최소한 카리아는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미라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일종의 확신에 가까웠다. 이 사람의 속내에 무언가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베네딕 알른에게 접근한데에 타의가 존재할 것이라고.
자신의 눈으로도 볼 수 없을만큼 치밀한 준비를 통해 무언가 목적을 이루려하는 것이라고.
그리 생각을 했지만, 놀랍게도 노력 끝에 카리아가 얻은 건 미라라는 사람에 대한 호감 뿐.
다른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뒤로 카리아는 자신의 쓸데없는 의심에 대한 사과를 담아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왔다.
평민과 귀족간의 연애가 진지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른 귀족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혼약이 이루어진 후에도 미라가 행복할 수 있도록.
루시의 도움에 의해 다시금 깨어난 뒤에도 카리아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미라를 부활시켜 모독하려 했던 교황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서 떠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 날.
그 날.
카리아는 곰곰이 자신의 기억을 돌이켜보다가 위화감을 찾아냈다.
그래서 미친 사람처럼 내달려 과거 미라가 살던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마을에 드리운 짙은 신성을.
*
“잠…깐만요. 카리아님. 당신의 말대로라면. 설마 마을이 사라져 있었던 겁니까?!”
“아니? 마을은 그대로였어.”
“그럼 미라님이 가짜였던.”
“그것도 아냐. 사람들은 멀쩡하게 미라를 기억했어. 착하고 순진하고 예쁜 시골 아가씨로 말야.”
“…그럼 뭡니까.”
“다만 미라의 출신은 불분명해. 어느 마음씨 좋은 할머니가 버려진 고아를 거두어 키운 거거든.”
미라는 아마 신의 사자거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였을 거다.
그리고 본인조차도 그에 대해 알지 못했겠지.
만약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면 카리아가 그를 눈치챘을 테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말야. 고용주님한테 물어보려고. 좆같은 신 새끼를 족칠 방법이 있는지.”
신의 뜻이 어찌되었는가는 알 바가 아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사정도 상관 없다.
그저 거슬릴 따름이다.
카리아가 처음으로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사람과, 그 첫 사람의 딸이자 자기 속내를 읽어내는 자신을 거리낌없이 대해주는 좋은 사람을 장기말 삼은 신이란 작자가.
“가주님께선 이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 모르지. 말 안 해줬어. 자기 딸과 관련된 일이기만 해도 눈물을 펑펑 쏟는 작자인데 미라까지 관련되어 있어봐. 얼마나 난리를 치겠냐.”
그 거구가 일어나지 못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해.
마음이 담긴 말을 입 안에서 씹어서 집어삼킨 카리아는 위에서부터 무너져내리는 대형던전을 눈에 새겼다.
“전원. 전투 준비.”
세상을 구원하고.
하늘에게 경고하겠다.
“악신 토벌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