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9
비시는 누구와는 달리 친구가 있는 사람인지라 상황이 흘러가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시가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냈을 때 비시는 루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를 눈치 챘다.
이 사람 지금 나를 승부에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비시는 마음 같아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루시 알른의 파티가 되었을 때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독설 이외의 다른 언어를 배우지 못한 것 같은 이 망나니 영애와 같이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이길 수 없는 승부에 발을 내딛어야 한다는 것도.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명분과 실리 둘 다를 챙긴 3왕자의 반대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음에도 소울 아카데미의 여론은 정확히 한 쪽으로 기울었다.
자신을 모욕한 이에게 정당한 승부를 제안한 3왕자와 그를 선심 쓰듯이 받아 준 망나니 영애.
둘 중에 어느 쪽을 응원해야 될 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이런 상황에서 3왕자의 반대편에 선다?
그건 지금 아카데미에 있는 학생들에게 돌팔매를 던져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그 뿐일까.
루시의 편을 드는 건 아카데미 내의 평판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다.
사교계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 것이다.
저 여자가 3왕자를 적대하고 망나니의 편을 든 사람이라고.
계승권과 거리가 있는 3왕자를 적대한 것이니 정치적 자살이라 말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친 짓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비시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루시 알른이 그녀의 약점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들러리 영애가 날 도와주지 않으면 내 입이 엄청 가벼워 질 거 같은데”
사령술사.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될 비시의 금기.
“어쩌면 낡아빠진 교회에 가서 허접 주신에게 다 털어놓아 버릴지도 모르겠네.”
루시는 능청스럽게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를 매만졌다.
주신 교회의 목걸이.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물건.
아르마디님을 허접 주신이라고 부르는 저 불경한 사람이 어떻게 저 목걸이를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시 알른이 교회와 연관이 있는 건 분명하다.
신성 마법까지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런 그녀가 교회에 비시를 사령술사라고 고발한다면?
비시는 자신의 스승에게 교회에 정체를 들킨 사령술사들의 결말을 들었다.
차라리 죽기를 바라게 될 끔찍한 광경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그것만큼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했다.
교회에 잡혀가 고문을 당한 끝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고생길을 택하는 편이 나았다.
“…파티원이 되면 되는 거죠?”
“허접 치고는 눈치가 빠르네 들러리 영애? 맞아.”
키득거리며 웃는 루시 알른의 얼굴에 비시가 탁자 아래에 숨긴 손에다 힘을 줬다.
나한테 힘이. 권력이 있었다면 저 망나니 영애의 머리에 꿀밤을 먹여줄 수 있었을 텐데.
울상을 짓게 만들고 허접은 당신이라고 소리쳐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비시가 속으로 울분을 토하던 때에 루시 알른이 품 안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검을 뿐일 구슬처럼 보였지만 비시는 저게 뭔지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저번에 사령술사를 쓰러트리고 얻은 보상이야. 너라면 뭔지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수준이 높지는 않아도 사령술사는 사령술사.
구술 안에 담긴 정순한 사기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비시는 사기가 담긴 구슬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못했다.
저만한 사기를 몸 안에 들일 수 있다면 분명 한층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터.
그녀가 바라는 경지를 향해 한발 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귀한 물건이야. 뒷세계에서도 거금을 줘야 겨우 구할 수 있을 걸?”
루시의 말이 옳았다.
사령술이라는 것은 교회에 의해 금기로 치부되는 마법.
당연히 사령술과 관련된 물건도 양지에서는 돌아다니지 못하고, 음지로 가더라도 쉬이 구할 수 없다.
최소한 비시 같은 중소 귀족의 자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물건이다.
“난 사람을 공짜로 부리는 쪼잔한 사람은 아니거든. 들러리 영애. 불쌍왕자를 이기는 데 도움을 준다면 이걸 줄게. 어때?”
비시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루시의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루시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필요없어. 들러리 영애. 난 너 같은 허접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니까. 그냥 뒤에서 숨만 쉬고 있어.”
*
<사령술사를 믿어도 되겠느냐.>
시켜만 준다면 발이라도 핥을 기세였던 들러리 영애를 떠나보내고 나니 할배가 내게 나지막히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음험한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 사령술사들은 악신의 수하인 경우가 많으니까.
평생 동안 악신을 대적해 싸웠던 할배가 어떻게 사령술사에게 좋은 감정을 품겠는가.
‘괜찮아요.’
할배가 생각하는 사령술사들과 들러리 영애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으니까.
진지하게 악신을 숭배하던 미치광이와 자기 동생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단 마음에 저 길에 발을 들인 들러리 영애가 어떻게 같겠는가.
<상황이 어쩔 수 없음을 아니 더 말을 하진 않겠지만 항상 조심하거라.>
‘네. 알겠어요.’
너무 과한 걱정이라 생각했지만 일단은 고갤 끄덕였다.
괜히 반발하는 것보단 이렇게라도 안심을 시켜드리는 게 나을 테니까.
<그래서 이젠 어찌할 것이냐.>
‘준비해야죠.’
<던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알아요.’
소울 아카데미에서 1학기에 만들어내는 던전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당연히 외우고 있다.
층계마다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 지.
10층마다 나오는 보스가 무엇인지.
그를 상대하기 위해선 어찌해야 하는지.
각 필드가 어떤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지.
교수들이 던전을 만들며 숨겨 놓은 아이템이라던가 히든 루트까지도.
모조리 다.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 내에서 모르는 던전이 없는 나다.
이 게임의 주요 무대가 되는 아카데미 던전에 관해서 모르는 정보가 있을 리 없지 않나.
할배는 내가 안다고 대답하자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전에도 허접 주신의 핑계를 대며 여러 기상천외한 일을 벌인 나다.
내가 기행을 저지르는 순간부터 그 변태 주신의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겠지.
챙길 물건이 있어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내 방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아카데미에 올 때에 베네딕이 챙겨 주었던 금화 주머니! 이 안에 들어 있는 건 무려 20골드다.
어지간한 귀족 학생들이 일 년 간 생활비로 사용할 만한 금액이거늘 베네딕은 이걸 개인 용돈이랍시고 생활비와 별개로 내게 건네준 것이다.
돈은 부족한 것보다 많은 게 좋다면서.
분명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긴 하지만 학생에게 이런 거금을 줘도 되는 걸까요.
이러니까 루시한테 낭비벽이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베네딕 이 멍청아.
싸움도 일도 그렇게 잘하면서 왜 육아에는 이토록 파멸적인 걸까.
나는 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보통의 도시에서 저녁 시간은 거리가 잠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가로등도 전기도 없는 이 세상에서 밤은 어디까지나 휴식의 시간이니까.
허나 소울 아카데미의 거리는 다르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해 융성한 이 도시에서 가장 활발한 시간은 저녁일 수밖에 없다.
이 도시에서 가장 활발하게 소비를 해줄 수 있는 아카데미 학생들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시간이 저녁이니까.
오늘도 소울 아카데미의 저녁거리는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그를 지나쳐 뒷골목 쪽으로 향했다.
내가 찾는 물건들을 이 거리에서 구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질이 너무 떨어지거든.
게임 초기에 들릴 수 있는 상점에서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중에 몇 가지 조건을 해금하면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지만 지금은 무리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장소는 다른 곳이었다.
뒷골목 주점의 문을 여니 이전처럼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그렇지만 그 시선의 종류는 이전과 달랐다.
거기에는 적의도 경계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조심스러움뿐이었다.
이제는 내가 고객님이라 그거지?
“알른 영애님.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지난번에 내게 시비를 걸었다 알새틴에게 얻어맞았던 남자가 공손히 용무를 물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늙다리. 정보팔이를 만나러 왔는데.”
자신과 자신의 상사를 모욕하는 단어에 남자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렇지만 그는 이전처럼 성질을 내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는 엄청난 다혈질처럼 보였는데.
단순히 외부인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걸까.
“위에 있습니다. 불러오도록…”
‘아뇨…’
“아니. 제깍제깍 나올 줄 모르는 게으른 정보팔이를 위해서 내가 가지 뭐.”
알새틴이 있는 방은 안다. 지난번에 들려봤으니까.
길을 비켜주는 남자를 지나쳐 알새틴이 있는 방을 한 번 두드린 후에 열었다.
“누구…”
그러자 알새틴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다급히 표정을 바꿨다.
‘루시 알른입니다.’
“난데. 불만 있어. 정보팔이?”
“아뇨. 아니지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물건을 사러 왔어요.’
“내가 이런 허접하고 더러운 곳에 올 이유는 하나 뿐이지 않아? 물건을 사러 왔어.”
“그렇군요. 일단 앉으시죠”
알새틴의 안내에 따라 문을 닫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내가 움직이는 동안 자신의 앞에 늘어진 서류 중 일부를 숨겼다.
무언가 중요한 정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근데 나한테 숨길 필요는 없는데.
저기에 있는 게 뭐든 내 머릿속에 든 것보다는 못 할 테니까 말이야.
‘저번에…’
“내가 말해준 건 조사해 봤어?”
“버로우 가문의 목걸이 말입니까? 예. 현재 위치를 확인했고 이주 이내에 확보할 예정입니다.”
벌써? 빠르네.
난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희소식이긴 했지만 내가 물어본 건 이게 아니었다.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
당신의 스승에 대해서.
조사했잖아?
알새틴 당신이 지닌 정보망이라면 지금쯤 자그마한 단서라도 찾아냈을 텐데?
“예. 물론 조사해봤습니다. 확인결과 영애님의 발언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곳에서 스승님의 행방이 포착 되었으니까요.”
좋아. 이걸로 알새틴은 내가 자기 스승에 대한 걸 말해주기 전까지 결코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하지 않겠지.
만일 내가 무슨 부탁을 한다면 분명 최선을 다해 줄 걸.
“어떻게 그런 정보를 구하신 건지 궁금하지만 대답해 주시지 않으시겠죠?”
‘당연하죠.’
“당연한 걸 왜 물어 보는 거야 정보팔이? 굳이 내 입을 아프게 하려고?”
“하하.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자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무슨 물건을 사러 오셨습니까?”
나는 주머니 안에서 미리 적어 둔 물건의 목록을 알새틴에게 건넸다.
그는 그를 확인하더니 한 쪽 눈썹을 살짝 들었다.
“던전을 공략하러 가십니까?”
‘맞아요…’
“그래. 정보팔이. 이거 다 최상품으로 일주일 내에 구해줄 수 있지?”
“물론 가능합니다. 다만.”
알새틴이 말을 덧붙이기 전에 금화 두 개를 꺼내어 종이 옆에 내려놓았더니 알새틴이 너무도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흘 뒤에 오시면 준비해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