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던전 공략을 끝마친 나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조이의 마법을 이용해 성지 인근으로 향했다.
대피명령이 내려진 마을은 조용했다. 최근에는 내가 올 때마다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러 모여들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는데 말야.
이 편이 낫다 생각을 한 나는 조이를 어깨에 짊어지고는 프레이에게 페이비를 들라고 소리쳤다.
“제 발로 뛰어갈 수 있는데요!”
“살쪄서 느릿느릿한 돼지를 언제까지 기다리란 거야?! 답답해서 못 해!”
조이와 페이비가 날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아!
근데 그래봐야 마법사와 성직자잖아!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에 비하면 느릴 수밖에 없다고!
한 시가 아까운 상황에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 같아?!
“성녀님. 실례.”
“아. 저어. 네에.”
어째선지 아쉬워보이는 페이비를 뒤로 한 채 내달렸다.
성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공기 중에서 기분 나쁜 기운이 짙어졌다.
본능단계에서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무언가.
생물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하지 않을 분위기.
이게 바로 끝의 기운인가.
진짜 역겹네.
누가 악신 아니랄까봐 냄새도 구린 것 봐. 악취에 미간을 찌푸린 채 얼마나 내달렸을까.
성지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던 기둥이 무너져내리는 게 보였다.
절단이 깔끔하게 된 걸로 보아 교황이 벌인 일은 아니고 검성이 벌인 짓이겠지.
유부남을 노리는 변태답게 절제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네.
시간만 좀 끌라 그랬더니 그것도 제대로 못 하냐!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피해청구는 저 여우년한테 해.”
“…네?”
아무튼 저건 내 책임 아냐!
성지가 가까워짐에 따라 귓가에 전투의 소리가 들려온다.
쉴 새 없이 휘둘러지는 검이 공간을 베는 소리.
묵직한 메이스가 살과 뼈를 부수는 소리.
방패를 때리는 주먹의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악문 소리와 또 다른 누군가가 웃는 소리.
“사도님! 성녀님!”
성지 안 쪽에 모여 있던 요한과 여러 성직자들은 내가 준 성물을 한 가운데에 둔 채 이 난장판 속에서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허접 페이비!”
“알겠습니다! 언제건 말씀만 해주십시오!”
성물의 발동을 위해 페이비를 보내놓고서 가운데로 내달린 나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에 서 있는 교황을 마주했다.
그의 주변에 늘어선 수정구슬 사이에서 끔찍한 악취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태양이 끝을 두려워 해 도망치자 하늘이 검은 색으로 물든다.
달과 별도 두려움을 느끼긴 매한가지인지 검은 하늘엔 그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지의 아래에선 스멀스멀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형형한 눈빛의 성기사들은 무수한 죽음 속에서 망가진 장비를 들고서 당당히 우리의 앞에 서 있었다.
[악신 아그라가 이 세상에 강림하려 합니다.]
[진행률 1%]
오랜만에 내 앞에 떠오른 푸른 빛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웃으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방패를 쥔 손이 떨리는 게 보인다. 여태까지 공략해왔던 던전들과는 다르다.
눈 앞에 도사린 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 뛰어넘을 수 있었던 시련이 아니다.
재앙이다. 다른 그 어떤 꼼수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오롯이 나의 능력만으로 뛰어넘어서야 하는 시련이다.
한 걸음 잘못 내딛는 순간 그대로 목숨을 잃을 도박이다.
그러니 두렵다.
앞으로 나에게 닥칠 고통이 무섭다. 친구들이 내지를 비명이 공포스러워서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다.
그렇지만 나아가야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떨리는 손에 힘을 더하며 앞으로 나선 순간 검게 물들었던 하늘이 걷히며 태양빛이 나를 비춘다.
허접 주신. 설마 겨우 이딴 걸로 응원했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나 진짜 열받을 것 같거든?
뭐. 태양빛이 따스해서 기분 좋긴 하니까 이번은 넘어가줄게.
대신 각오해.
모든 일이 끝나면 반드시 네 머리에 메이스를 꽂아넣어줄 테니까.
히죽 웃음을 지은 순간 하늘을 바라보던 교황이 고갤 돌리더니 날 마주한다.
본래도 정신이 나가 있던 교황의 눈동자는 검은 빛으로 물들어 그 안에 심연을 품었다.
그래서일까.
단순히 마주 본 것 뿐인데도 소름이 돋았다.
생리적으로 무리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려 했다.
“이미 신화의 시대는 시작되었습니다. 사도시여.”
나도 알아. 이제 신화의 시대가 찾아오는 걸 막을 수 없단 것쯤은.
“그래서?”
근데 어쩌라고. 신화의 시대가 찾아오는 걸 막을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네 뚝배기를 깼겠지.
“당신이 이를 막으실 수 있겠습니까?”
푸하핳. 등신 새끼. 자기가 날 내버려뒀단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구나?
좋아. 조금이나마 장단을 맞춰줄게. 어디 즐겨봐.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는 지 모르겠네♡ 하여간 생긴 것처럼 멍청하다니까아~♡”
내게 시선이 끌린 걸 확인한 순간 턱짓으로 프레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즉각 검을 뽑아들어선 뒤편에 있는 기사들을 베어 넘겼다.
잠시나마 프레이 쪽으로 시선이 넘어간 틈을 타 주변에 요정을 흩뿌린다.
시야가 뒤바뀜과 동시에 앞으로. 악신의 기운에 둘러싸인 교황을 마주한다.
“너처럼 부하들도 허접하네?♡”
“제 신체능력은 극에 달했습니다.”
몇 번이나 들었을지 모를 대사를 귀에 담으며 방패를 올린다.
교황의 1페이즈.
끝의 권능을 신체강화 쪽으로 활용해서 근접박투를 벌이는 타입.
처음 만나보면 뭐 이딴 게 다 있냐는 소리가 절로 나왔었는데,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네.
패링이 실패함에 따라 찾아든 충격을 느끼며 뒤로 밀려났다.
하하하. 씹. 돼지새끼 주제에 더럽게 빠르네.
그렇지만 아예 시야로 따라잡지 못할 수준은 아냐.
재차 공격을 막아낸 탓에 생긴 빈틈에 친구들이 앞으로 나선다.
아서가 흉내낸 검성의 검이 주먹을 쳐냈고, 조이가 만들어낸 어둠이 교황의 시야를 방해함에 따라 다시금 방패를 치켜들 여유가 생겼다.
타이밍을 조금 더 빠르게 해보자. 그리고 신성을 좀 더 불어넣어서 만약을 대비해.
그럼.
콰앙!
충격이 확실히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 완벽하진 않네.
“저의 권도 극에 달했지요.”
그새 2페이즈로 넘어가는 거야!? 뭐 얻어맞은 것도 없으면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재차 쏟아지는 충격. 허공으로 떠오른 몸. 그를 추적하듯 달려드는 교황.
“이봐. 아직 이 쪽도 있거든?”
검성이 내지른 검이 교황의 목을 베어가르고 할아버지의 인형이 몸통을 후려쳤다.
교황이 날아가는 틈을 타 착지한 나는 신성마법으로 신체를 치유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여러분의 시야에 끝을 고합니다.”
[진행률 10%]
흙먼지 너머에서 들려온 교황의 선언과 함께 시야가 검게 물든다.
“허접주신!”
정화의 권능으로 어둠을 물리친 순간 내 주변에 셋이나 되는 기사가 등장했다.
일말의 죄책감을 품은 채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을 확인한 난 폴짝 뛰는 것으로 공격을 회피한 후, 저들의 무기를 발판 삼아 기사 하나의 머리를 깨부쉈다.
뼈가 부러지는 감촉이 메이스를 통해 전해지는 게 너무도 끔찍했다.
“사도시여.”
교황과 나 사이의 거리가 일순에 좁혀진다. 두 손으로 방패 머리를 움켜쥔 그는 핏물처럼 붉게 물든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따라 말이 없으시군요?”
“돼지새끼한테 포상을 주기 싫어서 말야~♡ 갑자기 움찔움찔 거리면 진짜 기분 나쁠 것 같거든~♡”
“그렇습니까? 제 눈엔 여유가 없으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프레이가 내지른 검이 교황의 두 손을 잘라버린 순간 주변의 풍경이 뒤바뀐다.
도착한 곳은 입김마저 얼려버릴 만큼 드높은 상공.
“아아악! 진짜! 뭔 개초딩 권능이야!”
중력을 따라 낙하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화의 권능을 항시 주변에 두르고 있기엔 신성이 부족해.
악신의 기운이 가득 찬 곳에서 그런 일을 했다간 정작 본싸움에서 아무것도 못할 걸.
그렇다고 저 끝의 권능이 마음대로 움직이게 내버려두자니 그것대로 거슬려!
<루시야.>
‘왜요!’
<저 놈이 권능이란 미명하에 제멋대로 군다면 너도 제멋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저 변태자식은 사실상 악신 아그라와 동일한 존재라고요! 그러니까 저딴 짓을 할 수 있는 거에요!’
<너라고 해서 다를 게 무어냐. 지금 넌 사실상 이 대지에서 현인신 취급을 받고 있지 않나.>
단순히 주신이 택한 대리인이 아니라 대지에서 직접 기적을 펼치는 신 취급을 받고 있긴 한데.
그런 게 되나?
<일단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해보자꾸나. 신화의 시대가 가까웠으니 예외적인 일도 능히 가능하지 않겠느냐.>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일단 떨어지고 나서 고민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으려니 또 다시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엔 또 뭐야!
– 루시!
– 성공했다!
– 루시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서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난 나는 주변에 날아다니는 요정들을 보고 고갤 갸웃했다.
얘네들이 뭘 한 건가? 여기가 숲도 아닌데?
[진행률 20%]
“루시!”
“지금 기뻐할 시간 없다! 당장 움직여!”
“안 죽으니까 짜증나아아.”
하늘 위로 올라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쉬이 제압할 수 있었던 기사들이 친구들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검성과 인형이 함께하고 있기에 전선이 유지되고 있지만 밀려나는 건 우리 쪽이었다.
왜 갑자기 기사들이 강해진 걸까.
의문과 동시에 그들의 안에 서린 아그라의 기운이 느껴졌다.
후우우. 좋아. 나도 교황이 하는 것처럼 멋대로 해보자.
“아~♡ 진짜~♡ 역겨운 냄새가 가득하잖아~♡ 짜증나니까 다 사라져버려♡ 쓰레기들♡”
…내가 바란 게 이런 멋대로는 아니었는데.
애써 당당한 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진땀을 흘리고 있으려니 내 안에서 신성이 끌어 올라 대지를 휘감았다.
어.
어어어.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말야.
저런 걸로 정화의 권능이 일어나는 게 말이 돼?
이게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