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일행은 그 누구보다 교황의 까다로움을 잘 아는 이들이다.
전쟁의 선두에는 항상 그들과 교황이 서 있었으니 죽지 않는 교황과 기적을 반복하는 용사 일행은 부딪힌 횟수만 하더라도 수백에 달하겠지.
그러니만큼 일행은 교황이 지닌 권능이 얼마나 까다로운 지 알았고, 그를 상쇄하는 정화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짐작했다.
다만 일행이 마음 편히 감탄하지 못하는 까닭은 정화의 권능이 다소 품위 없고 속된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권능이란 게 저런 식으로도 사용되는 거였나?”
“좀 더 진중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만.”
“우리의 기억과 다른 게 정상이다. 우리가 보았던 이들과 주신의 사도는 다르니까.”
이들의 의문에 대답해준 것은 자그마한 인형 정도 크기의 에르기누스였다.
“이건 뭐냐?”
질색을 하며 가라드가 짜증을 내자 에르기누스가 혀를 찼다.
“지금 본체는 공허의 악신을 제압하는 도중이다.”
“근데 이럴 여유가 있나?”
“거의 끝났거든.”
“…벌써?”
“벌써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준비된 대로 했을 뿐인데 공허의 악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고갤 숙였으니.”
무언가 놀라운 것은 없었다.
목숨의 위협도,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게 어그러질 것이란 불안도, 자신이 많은 생명을 짊어지고 있단 공포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허의 악신과 싸우는 데에 존재한 것이라고는 그저 익숙한 작업을 할 때 느끼는 지루함 뿐이었다.
“다른 곳도 아마 비슷할 거다. 루시 알른은 나란 예외가 가장 골치 아프다 말했었으니까. 예측 하에 존재했던 곳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애매해 가장 변수가 많다 말했던 자신조차 이토록 여유로웠다. 변수 같은 게 없노라 단언했던 이들은 어떻겠는가.
“다만 이토록 유리한 상황이거늘 안심이 안 되는 건 저 자를 알기 때문이겠지.”
교황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적이었다.
악신 아그라의 교활함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 그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여태 루시 알른이 자신의 비정상적임을 보여줬는데 이를 추측하지 못한단 건 말도 안 된다.
저는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그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의도를 품고 있기에.
“불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만 일단은 방금 전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저 꼬맹이와 우리가 아는 이들이 뭐가 다르단 거냐.”
“과거 우리가 보았던 자들은 권능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자신이 모시는 신에게 권능을 나누어 받은 이들이지.”
신이 지닌 권능이란 건 사실 그 신의 능력이 아니다.
누군가를 신이라고 택한 개념이 그들의 바람을 인정해주고 그 뜻을 따르기에 상식을 벗어난, 말 그대로 신의 권능이라 부를 법한 현상이 지상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니 권능을 나누어 받은 이들에겐 제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권능을 다룰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신이 허락했기 때문.
권능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니 신이 그랬던 것처럼 상식을 부수는 일을 할 순 없다.
“저 꼬맹이는 아니냐?”
“왠지는 모르겠다만 주신의 사도는 권능에게 사랑받고 있다.”
어둠의 권능을 얻은 에르기누스이기에 알 수 있다. 여타 지상의 인간들과 루시가 다르단 사실을.
그녀가 권능을 다룰 수 있는 이유가 단순히 허락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권능이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힘을 베풀었기 때문이란 걸.
“그러니 아그라의 권능을 빼앗은 교황이 상대라도 괜찮겠지.”
“그래도 숙련도의 차이라는 게 있지 않나.”
가라드의 걱정 어린 말에 루엘이 웃으며 고갤 저었다.
“그 정도라면 좁힐 수 있을 거다. 교황 저 놈은 자신밖에 믿지 않지만 루시에겐 동료가 있으니까.”
낯뜨거운 소리에 영웅들의 시선이 모여들었고 루엘의 얼굴에 살짝 열이 올랐다.
“마냥 틀린 말도 아니잖나.”
화면을 바라보며 침묵하던 용사는 웃으며 턱을 괴었다.
“부디 저들에게 기적이 있기를.”
*
조이는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루시를 뒤 편에서 바라봤다.
그녀의 몸 안에서 흘러나온 신성은 날개가 되어 등에 자리를 잡았고, 흩날리는 머리 위에는 빛으로 이루어진 원이 나타났으며, 그녀의 주변에 날아다니는 요정들은 장난스러움을 지운 채 루시와 같은 따스함을 품었다.
페이비가 이 곳에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주신의 사도께서 신의 위광을 얻었노라고.
“신의 뜻을 품은 분 답군요.”
“허접 주신 따위랑 비교하지 말아줄래?♡ 엄~청 기분 나쁘거든~♡”
저도 모르게 경외를 품었던 조이는 루시의 어투를 듣고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제 아무리 대단한 힘을 품었다 한들 루시는 루시다. 내 친구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있다.
교황과 기사들이 루시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조이는 조용하게 마법진을 준비했다.
“아아! 당신이 저의 시련이란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저도요. 루시가 저의 친구란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럽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마법을 펼친 순간 교황을 비롯한 이들의 아래에 어둠이 깔렸다.
교황은 당연하다는 듯 반응했지만 기사들은 아니었다.
루시에게 매혹된 나머지 주변을 인식하지 못한 저들은 국왕이 잠겨버렸던 어둠 속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힘을 잃었던 국왕과는 달리 저들은 모든 힘을 그대로 품고 있기에 영원토록 어둠을 헤매진 않겠지만 당분간은 빠져나올 수 없겠지.
“그러니 친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답니다.”
“호오. 과연 에르기누스의 제자십니다.”
자신들의 부하가 모두 사라졌으니 당혹스러워 할 법도 하거늘 교황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다만 마법사시여. 어둠에도 끝이 있단 것만큼은 알아주시길.”
악신의 기운이 강해진 탓일까. 교황은 이전과 달리 그 어떤 전조조차 보이지 않고 악신의 권능을 사용했다.
프레이나 검성조차도 멍하게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바닥의 어둠이 열리더니 기사들이 기어 올라왔다.
“가자. 허접들.”
“가시죠. 여러분들.”
서로 간의 전력이 부딪힌다.
프레이가 내지른 검을 어느 기사가 자신의 몸으로 받아낸다.
한 기사가 사용한 신성마법을 조이가 빼앗는다.
그런 조이를 노리는 검을 아서가 가로 막는다. 검성과 인형이 교황의 움직임을 묶는 사이에 루시가 메이스를 내리친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교황이 사용하려는 권능을 루시가 정화의 권능으로 가로 막는다.
일진일퇴의 전투.
누가 더 유리하고 불리하다 할 것이 없는 대전.
죽음을 가벼히 여기는 이들과 삶을 중요히 여기는 이들의 전투.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뿐이었다.
서로가 악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치열하면서도 치열하지 않은 전투가 이어지던 중 갑자기 한 가운데에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정의 정장을 입은 청년은 그 존재만으로 공간을 지배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가 청년의 정체를 눈치챘다.
등장만으로 등줄기를 섬짓하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존재만으로 인간의 마음에 공포를 선사할 수 있는 자는, 그리고 그 어떤 상황을 앞에 두더라도 당당한 루시에게 망설임을 선사할 수 있는 자는 하나 뿐이었으니.
악신 아그라.
끝의 권능을 지닌 존재이며 이 세상에 끝을 선고하고자 하는 악마.
선과 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롯이 자신의 권능이 시키는 바를 수행하는 기계.
그는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그것만으로 주변에 있던 이들이 순간 숨을 쉬는 걸 잊어버렸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질식.
하나 둘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가운데 대지에 서 있는 것은 단 둘.
악신의 사도와 주신의 사도 뿐이었다.
“흐음. 권능을 빼앗아 올 생각이었거늘 역시 안 되는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이젠 끝의 권능마저 저를 따르고 있다고.”
교황이 손을 뻗어 아그라의 목을 움켜쥐자 그의 몸이 아래에서부터 흩어져갔다.
“기억하거라. 나의 사도여. 그대가 바라는 끝은 무수한 방해 속에서 무너져내릴 것임을.”
“괜찮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제게 있어 영광스러운 일이니.”
“그렇다면 내 실패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마.”
저주의 말과 함께 악신의 육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그의 안에 깃들어있던 모든 기운이 교황에게로 흘러들어간다.
짙고도 짙은 어둠이 교황을 둘러싸고 어둠이 흐린 안개로 변했다가 걷힌 순간 사람 좋아보이던 할아버지는 사라지고 신화의 시대를 살아가던 악신의 사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
교황이 악신 아그라를 흡수하는 동안 난 주변에 정화의 권능을 퍼트리는 걸로 친구들을 도왔다.
간신히 위압감에서 벗어난 친구들은 가쁜 숨을 달래며 교황을 노려보고 있었다.
좋아. 여기까진 예상대로야.
교황이 악신의 권능을 장악하고 성지 아래에서 자신의 군사를 불러내겠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저 녀석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리고 나 또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영애님!”
아그라의 기운을 느낀 페이비가 성물의 조각과 함께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준비는 제대로 끝난 거지? 허접 페이비.”
“당연합니다. 결코 영애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에요!”
“좋아.”
페이비에게서 성물을 넘겨 받은 난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들의 신성을 느꼈다.
“보조해줘.”
“이끌어 주십시오.”
페이비의 손 위에 성물을 올려두고서 그 안에 정화의 권능을 담았다.
아르테아 가문에 있는 수많은 성물 중 하나.
그 특성은 안에 담긴 기운을 증폭시키는 것.
수많은 사제들이 며칠에 걸쳐 성축을 한 이 물건이라면 분명.
“사도시여. 제가 그걸 가만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교황이 성물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를 보자마자 성물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은 나는 페이비를 끌어안고서 뒤로 물러났다.
“끄햑!”
등 뒤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내 입에서 비명을 이끌어 냈다.
아. 빌어먹을.
여태 그랬던 것처럼 허접처럼 굴어주면 어디 덧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