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린 아서는 주변의 풍경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던전이군. 어둠 속으로 낙하를 하고서 그 아래에 있던 던전에 들어오게 된 건가.
루시 알른과 함께하며 비슷한 일을 자주 겪은 탓인지 그리 놀랍지 않군.
던전은 반드시 공략되게 만들어진다 했으니 우리를 평생 가둘 의도는 아닐 것이고, 이 던전을 공략하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겠지.
이게 악신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니 루시 알른만큼은 바깥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녀석이 홀로 교황을 상대하고 있단 소리인가.
루시 알른이 쉬이 무너질 자는 아니다만 상대가 좋지 못하다.
우리가 모두 함께 달려들어서 겨우 상대하던 적을 혼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가 서럽게 울던 루시를 떠올린 아서는 혀를 차고서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괜찮다. 여태 지겹도록 해 온 일이 던전을 공략하는 일이잖나.
루시 알른만큼 할 순 없어도 그 녀석의 발취 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
아니. 애초에 이런 마음가짐이어선 안 되지.
“가장 먼저 탈출해주마.”
내 목표는 루시 알른을 이기는 거니까.
*
조이는 자신이 던전에 떨어졌단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눈을 끔뻑이다 루시를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어둠 위에 서 있던 그녀를.
조이는 안다.
그녀가 한없이 믿음직스러워 보일지라도 연약하다는 걸.
공포 앞에 눈물을 흘린다는 걸.
그러면서도 그 끝에는 일어날 것이란 걸.
자신을 구해주었을 때처럼 구슬프게 우는 루시를 떠올린 조이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어둠을 흩뿌렸다.
안 돼. 또 다시 루시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러기 위해서 노력했어.
루시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루시의 곁에서 그녀를 돕기 위해 여태까지 노력해왔다고! 이젠 그 성과를 보여줄 때야.
정상적인 공략 방식은 필요치 않아.
필요한 건 오롯이 속도 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루시의 옆에 돌아갈 거야.
반드시.
던전의 벽을 어둠으로 집어삼킨 그녀는 그 어떤 때보다도 무감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은 마법사보다 어둠의 사도라는 단어가 어울릴만큼 음험했고 무서웠다.
*
영애님. 눈을 뜬 페이비가 가장 먼저 떠올린 얼굴은 자신의 믿는 친구의 것이었다.
안 돼. 나만큼은 영애님의 곁에 남았어야했는데.
다른 이들이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정화의 권능을 나누어 받은 나만큼은 그 분의 곁에서 그 분을 도와야했는데!
조급한 마음에 미친 듯이 주변을 살피던 페이비는 어느 순간 자신의 손에 들린 성물과 그 안에 담긴 따스함을 느끼고는 진정했다.
과거를 후회해도 어쩔 순 없어요.
중요한 건 당장에 해야만 하는 일.
어떻게든 빠르게 영애님의 곁으로 돌아가 그 분을 돕는 것!
심호흡을 한 페이비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창을 두 손으로 치켜 들었다.
“가겠습니다. 반드시.”
*
느긋이 몸을 일으킨 프레이는 주변의 던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이들같은 고민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자책도 프레이에겐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는 의지 뿐.
“이젠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며 검을 뽑아든 프레이는 던전의 벽을 베어내고서 무덤덤하게 앞으로 향했다.
자신의 직감이 시키는 대로.
무작정 앞으로.
*
부러진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자꾸만 목소리가 치솟아나오려 한다.
허나 그걸 들으면 눈 앞의 남자가 웃을 듯 하여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하셨습니까?”
여유를 되찾은 교황의 얼굴을 본 순간 모든 게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비명소리를 내건, 그걸 꾹 참건, 이미 한 방을 먹은 이상 교황은 어느 쪽이건 기뻐할 것이다.
좆같은 변태새끼같으니라고.
마음 속에서 끌어오르는 욕지거리가 내 아픔을 덜어냈다.
신성마법을 통해 우리 둘 사이에 벽을 만들어낸 후 거리를 벌린다.
부러진 팔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느껴진 고통에 식은땀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억눌렀다.
고통 따위를 신경쓰기엔 내가 닥친 일이 너무도 컸다.
“예상하지 못하셨군요. 하하. 즐겁습니다. 역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기적이 찾아오는 법이군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본능적으로 고갤 돌렸지만 그 땐 이미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어둠에 처박힌다.
“으음. 주변의 요정들의 역할이 컸나 보군요. 그들이 없으니 사도께서 이토록 무력해질 줄이야.”
점멸하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젠장. 어쩐지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니 요정이 사라졌구나.
다시 돌아온 1인칭의 시야 속에서 교황의 느릿하게 웃는 게 보였다.
“그들은 쉬이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 곳에는 요정의 힘이 되는 무언가가 없으니까요.”
그럼 걔네들이 돌아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인 거 아냐?
순간 차오른 걱정이 망설임을 만들어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교황이 내 앞으로 파고 들었다.
복부를 노리고서 날아드는 주먹을 보고 방패를 치켜들었지만, 이번에도 교황의 주먹이 내 방패를 비켜 나가 복부에 닿았다.
안 그래도 갑옷 같지 않은 갑옷은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고 순간 의식이 아예 날아가버렸다.
배를 붙잡은 채 바닥을 기던 중 교황이 정중하게 날 일으켜 세우더니 멱살을 붙잡아 저 위로 던져버렸다.
끝없이 이루어지는 상승 끝에 갑자기 대지가 등장해선 내 몸에 충격을 가했다.
이젠 비명조차 입에서 새어나오질 않았다.
말을 담당하는 기관이 박살나기라도 한 것처럼 바보 같은 소리만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오오. 권능이 흔들리는군요.”
계속된 통증에 마음 속에서 하나 둘 공포가 차오른다.
최근 들어 잊고 있었던 공포가 차츰차츰 내 등줄기를 붙잡아서 위로 올라온다.
뇌세포 하나하나마다 무섭다는 단어와 두렵다는 단어와 공포라는 단어와 도망치고 싶다는 단어가 새겨져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 모든 걸 어떻게든 외면하고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던 중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보였다.
메이스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그 손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내가 내심 패배를 인정했단 것.
“…아파. 아파. 아파.”
양 손에 들고 있던 메이스와 방패가 떨어진다.
“죽기 싫어.”
떨리던 두 손이 머리를 움켜쥔다.
“아픈 거 싫어. 무서운 거 싫어.”
일어서려던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죄.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제발요. 뭐든 할게요. 그러니 제발.”
내 머리카락을 붙잡은 우악스러운 손이 내 얼굴을 강제로 들게 만든다.
“아니지.”
실핏줄이 치켜선 남자의 눈동자에 공포가 자꾸만 커져간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 순간 남자가 목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그게 아니지.”
한층 더 커진 공포에 자연스레 눈물이 흘러나왔다.
훌쩍이는 소리가 입 바깥으로 샜다. 살려달란 말이 자꾸만 훌쩍임에 더해졌다.
“당신은 그래선 안 됩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주신의 사도시여! 당신이 그래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시련인 당신이! 날 죽여야만 할 당신이!”
교황이 뺨을 후려치며 날 다그쳤지만 그런다고 차오른 공포가 사그라들진 않았다.
이미 해일이 차오른 해안가 위에서 파도를 물릴 순 없었다.
방파제가 부서지고, 모래가 집어삼켜지고, 도시 안까지 스며든 공포를 어찌 순식간에 물릴까.
“이래서는 안 된단 말이다아아아!”
날 바닥에 집어던진 교황은 분을 못 이긴 듯 나를 밟아대기 시작했다.
살이 찢어진다. 뼈가 부서진다. 내장이 짓뭉개졌다.
아파. 아파. 아파!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살고 싶어요.
죽기 싫어요.
“네 년은 주신의 사도다! 결코 무너져선 안 될 존재란 말이다! 적에게 목숨을 갈구하며 악에 투신하면 어쩌잔 것이야!”
누가 도와주세요!
아파요.
너무 아파요.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엄마. 아빠. 어디갔어.
나 너무 아파. 힘들어.
못 일어날 것 같아.
제발. 제발. 누가. 누구라도 좋으니까. 날.
“그 발 치워.”
옆에서 들려온 낮고 매서운 목소리에 벌벌 떨며 고갤 돌렸더니 바닥에 넘실거리는 어둠과 지팡이. 둥글게 말린 금발. 핏발이 선 청색의 눈동자.
상대를 향한 증오로 가득 찼던 눈동자에 고통이 거두어짐과 동시에 자애가 담겼다.
“루시. 이제 괜찮아요.”
“꺼져라! 잡년! 주신의 사도는 홀로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가 있단 말이다!”
“헛소리 좀 적당히 하지? 그 누가 홀로 모든 시련을 극복한다고 그러는 거야.”
“다시 꺼져라!”
조이의 아래에 어둠이 깔리고 그녀가 사라질지도 모른단 공포에 다급히 그 쪽으로 손을 뻗었다.
허나 내가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권능이 따스한 빛을 내뿜으며 어둠을 물린 것이다.
빛을 따라 다시금 고갤 돌리자 수많은 전투 끝에 더러워진 백의와 산발이 되어 약간 더럽혀진 머리카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얗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여성이 죄책감이 잔뜩 담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어버렸습니다. 허나 이젠 아닙니다. 평생 당신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허나 그 죄책감은 순식간에 자애와 의지로 바뀌어 내 마음을 지탱해줬다.
“성녀시여! 당신이라면 아실테지요! 시련은 홀로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란 걸!”
“당신께서 가르쳐주었을 땐 그랬죠. 허나 이젠 그게 틀렸다는 걸 압니다. 미련한 이여. 이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잘못? 내가 잘못했다고? 그대를 만들어준 것이 나거늘 감히 그딴 말을!”
한 순간에 거리를 좁힌 악신의 주먹이 페이비에게 닿으려했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방패가 그 충격을 받아냈다.
“젠장. 루시 알른을 흉내내는 게 뭐 이리 힘든지 모르겠군!”
고통에 뒤로 밀려나면서도 꿋꿋이 대지에서 버텨낸 남자는 날 보고 한 순간 침묵했다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귀한 모습이군! 사진이라도 찍어야겠어!”
“3왕… 아니. 아서. 죽고 싶어요?”
“3왕자님. 설교가 필요하겠군요.”
“농담이다! 농담! 분위기 좀 풀자고 말을 꺼낸 건데 왜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냐!”
“빌어먹을 것들. 자신들이 주신의 사도를 무너트렸단 것도 모르는 잡놈들이 의기양양해하다니.”
“시끄러.”
교황의 입을 가르고 조각내어 목소리를 막아버린 검사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내 앞에 와서 조심스레 날 일으켜줬다.
“루시. 괜찮아?”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프레이가 걱정이 잔뜩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게 너무도 놀라워서 자꾸만 흘러나오던 눈물이 멎고 말았다.
공포라는 감정이 아예 다른 감정으로 뒤덮일 수도 있는 거구나.
“당연히 괜찮지. 바보 프레이.”
“프레이. 응! 나 프레이! 완전 바보야!”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동안 페이비가 내 몸을 치유해줬다.
그녀의 치유마법은 나와 달리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치유가 끝난 순간 조이가 내 무기를 집으려다 휘청거렸다.
결국 육신으로 마력을 강화한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건네 준 메이스와 방패를 치켜 든다.
“감히. 감히. 감히.”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여느 때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모두의 앞에 섰다.
“그렇게 꼬였으니까 외톨이지♡ 허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