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권능에 의해 뒤로 밀려난 베네딕은 내 옆에 도달해선 여러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다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파파가 안 늦었지?”
“응. 파파. 오늘은 쪼오끔 멋있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좋아!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겠구나!”
베네딕이 고함소리와 함께 앞으로 내달리고 그 뒤를 알른의 기사들이 따라간다.
검은 색의 파도의 비견될 마물들이 말 그대로 갈려나가는 광경은 모니터 너머에 있을 적 보았던 성경의 한 장면 같았다.
그를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옆에서 마물의 군세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아아아. 진짜 열 받네. 뭐야. 그 괴상한 던전은!”
교황이 던져넣은 던전에 대해 한탄하던 그녀는 이 울분을 갚겠다는 것처럼 홀로 군세의 한 가운데로 달려갔다.
보통이라면 자살행위라며 말릴 일이었지만, 음. 군세 한 가운데에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구멍이 생겨나는 걸 보면 괜찮으리라.
…검성이란 자리에 도달한 작자는 하나같이 저 꼴인 걸까.
“걱정마십시오. 주신의 사도시여. 저 분의 곁은 제가 지킬테니까요.”
검성과 비슷한 타이밍에 등장한 루엘의 인형은 정중히 고갤 숙이고는 학살의 현장으로 내달렸다.
“오오오! 알른 영애! 너무도 아름답고 고귀한 당신을 뵙는 걸 허락받는 걸 여쭤보는 걸 허락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나타난건지 모를 변태사도는 여느 때처럼 열정적인 눈으로 날 훑는 대신 땅을 쳐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얘 대체 왜 이래?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생각하던 중 나 대신 페이비가 그의 귀에 무어라고 속삭였다.
“과연! 알겠습니다! 알른 영애! 이 전쟁이 끝난다면 부디!”
두 주먹에 권능을 더하며 변태사도가 떠나간 후 페이비를 가만 바라보자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이번에 활약하면 허락하실 거라고 말했어요.”
“…겨우 그거야?”
“네. 영애님을 보는 것조차 황송하신가봐요.”
지금 내 모습이 그 정도야? 요정의 시야로 보고 있지만 그저 그런 것 같은데. 너무 호들갑 떠는 거 아냐?
“이해한다. 나도 지금 그런 마음이니.”
오랜만에 듣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겹고 징그러운 목소리에 고갤 돌렸더니 코를 가린 얼빠여우가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를 줄줄 흘리는 그녀는 언제라도 빈혈로 죽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번에 애완동물인 날 유기했으니 후일 제대로 된 보상을 주리라 믿는다. 루시야. 여태 쌓인 것들이 꽤 많잖느냐.”
들은 즉시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말을 남기고서 안개 여우무리와 함께 얼빠여우가 나아갔고 그 뒤에 수많은 숲의 주인들이 마물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듯 2왕자가 이끄는 왕국의 군세가 지나간 후 르네가 걸음을 멈추고서 내 옆에 섰다.
“오랜만이군. 그대의 활약상은 잘 들었다.”
“죄송해라. 전 음침왕자님에 대해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하하. 바빴을 테니 그럴 수도 있지.”
조금도 꺾이지 않은 르네는 내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나만을 바라봤다.
“그런데 말이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키가 좀 자란 듯 하군.”
“정말요!?”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다만 자란 건 분명해. 내 관찰력은 꽤 뛰어나거든.”
진짜!?
정화의 권능을 제대로 다루게 되면서 메스가키 스킬의 패널티가 약간 더 약해진 건가?!
사탕발린 말이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에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지라 난 그의 말이 부디 사실이길 빌며 주변을 둘러봤다.
“좀 자랐나?”
“네. 네! 자라신 것 같습니다! 영애님!”
“1왕지님의 안목은 의심할 여지가 없죠.”
“그런가? 내 눈엔.”
“쉿!”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프레이 켄트! 정말 눈이 안 좋군!”
역시 키가 큰 거지!? 그치?!
눈 앞의 위협마저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행복한 소식에 히죽 웃고 있으려니 르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차나 한 잔 하지. 내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을 간식을 주마.”
“아부하는 꼴이 너~무 애처로워서 들어줄 수밖에 없겠네요!”
“좋다. 나중에 연락주마.”
할 말을 끝마치고서 1왕자가 떠나고 나니 주변의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왜. 왜?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날 봐?
“고용주님. 은근히 쉽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폐기물 아줌마. 공짜나 다름 없는데 안 팔리는 사람이 쉽다는 말을 하니까 같잖네.”
“…진짜 이 상황에서까지 그딴 소리를 지껄여야겠어?! 나 방금 진짜 죽을 뻔 하다 살아온 거거든!?”
파괴의 사도를 상대하는 게 얼마나 까다로운 일이었는지 아냐는 외침은 반대로 파괴의 신을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렵잖았단 걸 증빙했다.
다른 둘에 비해 피지컬보단 스펙과 준비를 요구하는 보스니까. 대륙에서 온갖 물건을 구할 수 있는 카리아의 입장에선 별 것 아닌 일이었겠지.
그걸 알고서 보낸 거기도 하고.
“그래서 다른 허접들은?”
“대륙 각지의 상황은 괜찮아. 요정들의 개입도 있고, 성직자들의 힘도 강해진데다가, 여러 나라도 군대를 준비해 둔 상황이었으니까. 던전의 폭주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어.”
결국 이 전투가 분기점이라는 거구나.
숨을 돌리고서 다시금 앞을 바라본다.
끊임없이 대지를 더럽히는 마물의 군세 앞에서 한 치 물러섬도 없이 계속 전투를 거듭하는 이들을 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손을 뻗는 이들을 본다.
그리고 두 손을 끌어 모아 기도를 올린다.
아무것도 하질 않는 개허접 무능 주신이시여.
최소한 저들에게는 축복을 주소서.
저들의 고결함이 헛되지 않을 수 있도록 이 전장에 승리를 주소서.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제대로 해!
이 허접아!
– 띠링.
오랜만에 들려온 알림음을 따라 눈을 뜬 순간 내 앞에 익숙한 푸른 색 창이 떠올라 있었다.
[악신의 부활이 도래했습니다.]
[진행률 90%]
[퀘스트 발생!]
[저 자의 계획을 저지하십시오.]
[그 어떤 시련이 당신의 앞에 닥쳐도 당신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머문 축복과 권능이 영원토록 당신을 지킬 테니까.]
[목표 : 세상을 구원하라.]
그 안에 적힌 글자를 본 순간 난 자연스레 무얼 해야할지를 깨달았다.
성물의 도움을 필요치 않았다.
내가 일으킬 기적은 이전에도 일어난 적 있으며 지금의 나라면 능히 일으킬 수 있는 일이니까.
웃음과 함께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자 신성이 그 위에 모여들었다.
정화의 권능을 담은 신성은 내 의지에 따라 마법진으로 변모해 커다란 원을 만들어갔다.
불의 악신의 앞에 선사했던 태양보다도 더 크게.
과거 할아버지가 만들어냈던 그 태양보다도 더 크게.
신화의 시대 당시 아르마디가 대지에 강림했던 그 순간처럼.
하늘 위에 또 하나의 태양을 만들어내는 거야.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메이스 위에 완성된 거대한 구를 하늘 위로 놓아주자 신성으로 만들어진 태양이 당연하다는 듯 하늘 높은 곳으로 떠올랐다.
정화의 빛을 담은 태양은 어둠을 물리고, 먹구름을 도망치게 만들더니, 푸르른 하늘 위에 올라 당당히 태양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주신의 신성이 담긴 태양이 대지를 내리쬔다.
마물을 불태우고, 저주를 지우고, 부정한 것을 없애고, 상처를 치유하고, 의지를 복돋아주고, 나아갈 길을 알려주고, 쓰러트려야 할 적을 비춘다.
“가자.”
그 빛의 아래에서 무기를 다잡으며 앞으로 향한다.
왕국의 기사들이 만들어낸 길을.
요정의 장난이 만들어낸 길을.
숲의 주인들이 만들어낸 길을.
변태사도와 다른 사도들이 만들어낸 길을.
그리고 베네딕.
아니.
파파와 알른의 기사들이 만들어낸 길을 지나 끝에 다가가고 있는 적에게로.
저 먼 곳에서 끝에 도달해가는 교황을 본다.
방금 전까지 끝의 권능에서 벗어난 반동인지 어둠에 휘감긴 그는 붉은 눈동자만을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난 안다. 저게 끝의 악신이 되기 직전에 일어나는 현상이란 것을.
게임 속에선 개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걸.
“다들! 준비해!”
기적을 일으킬 시간이야!
*
용사는 전장에 늘어선 인간들의 군단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대지에 늘어선 인간의 군대와 그 반대편에 서 있던 마물의 군세.
그들 사이에 흐르던 무수히 많은 피.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치는 이들과 그들을 붙잡으려 소리치는 지휘관들.
그리고 그 선두에서 마물의 시체를 뒤집어쓰며 희망을 전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자신과 동료들.
다른 이들은 전장에 선 용사를 칭송했지만 정작 용사에게 있어서 전장이란 악몽의 공간이었다.
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헛구역질이 나오게 만들 만큼.
그가 잘못된 선택에 매몰되었던 것도 이 악몽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새로이 그려진 태양이 대지를 환히 비춘 순간 용사는 이게 악몽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눈 앞의 정경은 너무도 행복한 꿈이었다.
용사라는 인간이 그 누구보다 간절히 기원하던 정경이었다.
이 풍경이 이루어지길 꿈꾸었으나 평생토록 이루지 못한 이상이었다.
“…내가 타인에게 구원받는 순간이 올 줄이야.”
“이제 성불할 마음이 좀 들었냐?”
가라드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용사는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했다. 나 따위는 그저 이 세상에 스쳐 지나가는 존재 중 하나였을 뿐이거늘 내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여겼어.”
“그 때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
“그래. 그대만의 잘못은 아니다.”
루엘과 가라드의 위로에도 용사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눈물을 흘렸다.
“주신께서 말씀하신 끝이 다가오고 있다만, 이러한 끝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듯 하군.”
용사의 말에 가라드는 고갤 끄덕이는 걸로 동의를 표시했지만 루엘만큼은 그 어떤 답도 하지 않은 채 가만 화면 너머의 영웅을 바라봤다.
시작과 끝이 격돌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