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내 몸을 휘감는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지겹도록 느꼈던 감각.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나를 섬짓하게 만들었던 느낌.
끝의 악신이 개입한 순간부터 진하게 느껴졌던 불쾌함이 내 주변을 무겁게 짓누른다.
몸을 움직인다는 상상조차 하기가 어렵다.
갑작스레 심해에 내던져진 것처럼 육신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숨을 쉬기가 힘들고 어깨 위에서 느껴지는 무게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정말이지 고맙네. 주신의 사도여. 나의 어리석은 사도가 벌일 계획이 성공하면 나도 꽤 곤란했거든.”
간신히 압박감을 견디고 있던 난 어깨를 툭툭 내리치는 감촉에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내 뒤에 있는 존재 자체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이 정도로 차이가 날 리 없는데?
신화의 시대가 시작되며 힘 대부분을 잃었을 끝의 악신이 어떻게 이만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거야?
계속해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이들이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내 친구들도. 전선에 서 있던 인간의 군세도. 그리고 그 군세와 맞서던 마물들도.
모두 한 존재의 앞에 고갤 조아리고 있었다.
“자네의 계획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야. 신화의 시대가 시작되면 끝의 권능이 약화되는 게 사실이지. 허나 자네가 생각하지 못한 건 이 세계에는 더 큰 흐름이 존재한단 거다.”
“그럴 리가.”
끝의 권능에서 벗어난 교황이 당혹 어린 목소리를 내자 아그라가 코웃음을 쳤다.
“네 녀석이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건 대지의 미물 따위가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하하. 참 아쉽게 됐구나. 네가 악신이 되고서 좀 더 시간이 흘렀다면 이를 알게 되었을 텐데 말이야.”
악신의 이야기를 듣고서 떠올린 것은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해온 것들에 의해 그 게임의 엔딩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만약 게임의 엔딩이 악신이 이야기하는 끝이라면 지금 아그라가 지닌 권능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하겠지.
“주신의 사도여. 오. 빌어먹을 주신의 사도여. 이 세상의 끝을 막으려 발악한 미물이여. 이해가 되느냐? 아르마디가 이 곳에 온다 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놈은 이 시대와 함께 세상이 끝나는 걸 막을 수 없어.”
난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고 여겼을까.
그게 허접 주신이 만들어 낸 것인 이상 결말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게 당연한데.
“재밌는 생각이 났다. 내 예전에 네 저주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지? 그 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느냐? 네 저주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메스가키 스킬의 유용성에 대해 논하는 것인가 생각했던 난 아그라의 손이 내 머리 위에 닿은 순간 자신의 안이함을 깨달았다.
저토록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비릿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날 가지고 놀려 드는 아그라가 도발 능력 같은 걸 말할 리 없잖은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
나의 정신.
메스가키 스킬의 디메리트에 불평만 했던 난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것.
“이상하다 생각한 적 없느냐?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은 적 없는 네가 순식간에 근성을 얻었다는 것이. 그 어떤 시련에도 무너지지 않을 강철의 정신을 지녔다는 것이.”
난 소울 아카데미의 세상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경이로운 근성을 지닌 채였다.
한 모금 마신 것만으로 극악한 음료를 효과적이란 이유만으로 들이킬 수 있었다.
단순히 힘든 정도가 아니라 손끝 발끝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발을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처음으로 겪은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열이 오른단 이유만으로 입을 재잘재잘 거릴 수 있었고, 그 뒤에 무수한 고난을 겪고 나서도 꺾이는 일이 없었다.
난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단순히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란 이유만으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한다는 게 말이 될까?
전생에 비루한 삶을 살던 내가 스스로의 성장을 체감할 수 있단 이유만으로, 내가 사랑하던 세계 안에 발을 디뎠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고통을 견뎌낸다는 게 정말 가능한가?
목숨이 위태롭다 한들 현실과의 타협 한 번 하지 않고 오롯이 앞만을 바라보는 게 현실적이냔 말이다.
“네 저주가 끝나는 순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해왔던 많은 일들의 기반에 메스가키 스킬이 존재한다면 이 스킬이 사라졌을 때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네 저주가 널 지탱하고 있었단 사실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근육이 망가지고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뒤틀려서 온 몸을 뒤틀게 만드는 고통.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다고, 이토록 아플 바에야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단 생각을 들게 만드는 아픔은 비명소리조차 허락하질 않았다.
양 어깨를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으려니 머릿 속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죽고 싶지 않아.
아니 이럴 거면 차라리 죽고 싶어.
난 여태 이런 걸 어떻게 해 온 거지?
내가 왜 저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거야?
저 쓰레기들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
여자아이 하나한테 세상의 구원을 바라는 개새끼들은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아?
애초에 난 방구석에 처박혀서 게임이나 하는 폐인새끼였단 말야.
내가 싸움 같은 걸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난.
나는.
거칠어지는 숨.
공황 탓에 뚝뚝 끊어지는 생각.
새어 나오는 울음.
그 사이사이로 스며 나오는 패배근성에 찌든 목소리.
“하하하! 지극히 인간답구나! 널 지옥에 내던진 아르마디를 저주해라!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는 주신을 욕해라!”
희열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시야 너머의 두 손을 바라본다.
루시의, 나의 자그마한 손.
자그마하고 귀여운 외견과는 달리 거칠고 딱딱한 어린아이 답지 않은 손.
귀족 가문의 영애가 아닌 전사의 손.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발악한 끝에 얻은 손.
내가 좋아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얻었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손.
“그리고 체념한 채 이 세상의 끝을 마주하거라!”
아아. 그랬지.
내가 지키려던 건 이 세상 같은 거창한 게 아냐.
그냥 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계속 남아있길 바랐을 뿐이야.
내 친구들. 지인들. 가족.
날 사랑해주는 모든 이들이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다른 놈들이 어찌 되건 내 알 바야?
제멋대로 구원받고 제멋대로 찬양하라 그래.
난 그저 지금의 일상을 지키고 싶은 거니까.
떨리는 손에 힘을 더한다.
잘 쥐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구겨서, 힘을 잔뜩 넣어서 바닥을 밀어낸다.
자꾸만 무너지려는 다리를 후려쳐가면서 억지로 힘이 들어가게 만든다.
그래도 잘 서지지 않아서 허벅지를 부여잡다가 간신히 두 발로 대지에 섰다.
그리곤 멍하니 날 바라보는 아그라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조. 좆까♡ 허. 허. 허접아♡ 너 같은 버러지 따위!♡ 저. 전혀 안 무섭거든?!♡”
스스로도 알 수 있을만큼 뻔하디 뻔한 허세.
나를 보는 누구라도 코웃음을 칠 모습.
눈물을 질질 짤 모습이 기대되어서라도 달려들 것처럼 나약한 형상.
참으로 비루하고 한심스럽지만 뭐 어때?
메스가키가 사실 허접이란 건 지겹도록 나오는 클리셰잖아.
“어떻게 일어난 거지?”
“그. 글쎄에♡ 네가 답도 없는 허. 허접새끼라 그런 게 아닐까!♡”
“신기하고 놀랍지만 동시에 이해가 되기도 하는군. 저주가 아니라도 고결하기에 역겨운 위선자가 택했을 테니.”
두려움이 가신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내 안엔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손은 떨리고, 머릿속은 당장 도망치란 목소리로 가득하고, 마음속엔 잘못된 선택을 했단 의심이 차오르고,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그치질 않지만.
그래도 방패를 다잡고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더하고 모두의 앞에 선다.
“괜찮겠나?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날 막을 수 있겠느냐? 두려움에 권능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태인데 날 막을 수 있을 성 싶더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런저런 말이 떠오른다만 그 모든 걸 한마디로 요악한다면, 그래. 난 탱커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적의 앞에 서겠어?
“당연한 걸 왜 물어본담?♡ 혹시 쫀 거야?♡”
결심을 끝마쳤기 때문일까.
방금 전까지 무너져가던 마음이 다시금 붙어가기 시작했다.
그에 호응하듯 내가 지닌 권능이 주변에 따스함을 전하고 끝의 권능 앞에 짓눌렸던 이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킨다.
“크흡♡ 파하핳♡ 허접 새끼♡ 그러니까 네가 발리기만 하는 거야♡ 병~신아♡”
“그러니까요. 나올 때마다 발리면서 질리지도 않는 걸까요?”
“나 이거 뭔지 알아. 마조 변태야! 루시가 자주 그랬어!”
“대륙에 공포를 전하던 악신이 사실 성욕에 미쳐사는 마조였단 말인가. 참 놀라운 일이군.”
“…그. 그러게요! 차. 참 잘 어울리네요! 매번 주신께 싸움을 거는 것도 얻어맞고 싶어서겠죠오!”
애써 강한 체 하는 친구들을 보며 미소 지은 나는 다시금 싸울 태세를 갖췄다.
의지가 굳건해지는 게 느껴진다.
“좋다. 발악해봐라. 저항이 크면 클수록 그 끝에 도달할 절망도 거대해지기 마련이니. 그대들의 절망을 보며 즐길 수 있게 해다오.”
여전히 승기는 희미하다.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단 기대조차 과분하다.
눈 앞의 적을 쓰러트리는 게 불가능하단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기적이란 발악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니까.
“맞습니다. 저의 사도시여. 제 아무리 희미한 가능성일지라도 도전하지 않으면 거기에 도달할 수 없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내 어깨 위에 여리고 따스한 손이 올려진다.
“당신이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면 저도 이 곳에 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요. 당신이 가능성을 만들어냈기에 기적이 일어난 거에요.”
눈앞에 적을 놔두고서 고갤 돌리면 안된단 걸 알면서도 난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것이었으니까.
“오랜만이에요.”
그녀가 지은 따스한 웃음은 루시의 기억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의 기억과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