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마디라는 신은 선함이라는 단어가 현실에 나타난 것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어떤 것이 사실이라 말한다면 모두들 그것이 사실이라 믿게 될 것이다.
그녀가 어떤 것을 믿으라 말한다면 모두가 그걸 신용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모두들 그 말을 따를 것이다.
존재 자체에서 느껴지는 절대적인 신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녀만 믿으면 모든 게 잘 풀릴 듯한 모습은 아르마디가 왜 주신인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왜 그녀를 신앙하는지를 알려주는 듯 했다.
만약 내가 그녀를 처음으로 보았다면 나도 순순히 감탄하며 그녀의 앞을 지켰겠지.
허나 난 아르마디와 처음으로 만나는 게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루시 알른은 이전에 아르마디의 외형을 본 적이 있었다.
허리춤까지 길게 늘어져 내린 붉은 색 머리카락도.
침착하고 지혜롭단 느낌을 선사하는 실눈도.
부드러운 웃음이 어울리는 입가도.
루시라는 이름을 담는 잔잔하고 따스한 목소리도.
하나 같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들이었던지라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이 개같은 년이.
넘어도 될 선이 있고 안될 선이 있어.
아무리 내 관심을 끌고 싶었어도 선신이란 작자가 이럼 안 되지!
‘할아버지! 이 변태새끼가 이렇게 쓰레기 같은 작자였어요?!’
이건 죽은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이며 산 자에 대한 도발이잖아!
아그라가 저지를 법한 일을 주신이 저지른다는 게 말이 돼?!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네 진짜!
진심어린 분노를 담아 소리쳤지만 할아버지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라? 할아버지? 어디 갔어요?
대답하기 곤란해서 안 하는 눈치는 아닌데?
항상 곁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졌단 사실에 멈칫한 순간 아그라가 목소리를 냈다.
“아주 여유가 넘치시는군. 누가 보면 모든 일이 끝났다 생각하겠어.”
뒤편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이를 악문 채 몸을 움직였다.
당장에라도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여자애 발에 밟히고 싶어서 환장한 변태새끼의 멱살은 나중에 붙잡아도 괜찮다.
사실 당장 붙잡고 싶긴 하지만 조금은 뒤로 미뤄둬야한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변태새끼와는 달리 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자 상황이 바뀐 게 느껴졌다.
루시의 어머니를 흉내낸 아르마디가 열받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지상에 강림함에 따라 아그라의 존재감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거기에 더해 신성영역 안에 도사리는 우릴 제외한 이들도 악신의 무게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다시금 군세와 군세가 맞부딪힐 준비가 끝났다.
“참 외로움도 많이 타네♡ 잠시 무시했다고 그새 삐진 거야?♡ 푸핳♡ 진짜 관심종자잖아~♡”
아그라의 어그로를 끌어당기기 위해 도발을 입에 담았지만 그의 시선은 내게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오롯이 내 뒤에 선 아르마디만을 바라봤다.
“준비한 게 겨우 이것 뿐인 건 아니겠지? 끝이 다가왔단 걸 알지 않나. 겨우 인간의 군세만으로 날 막는 건 불가능하다.”
웃음과 함께 아그라가 손을 치켜 든 순간 대지 아래에서 몇 개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종도 문화권도 제멋대로인 이들이지만 한 때 죽었던 자들은 눈을 뜨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그라의 군세. 저 녀석의 발악패턴을 못 끊었을 때 등장하는 사형선고.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아그라. 제가 당신을 알 듯 당신께서도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갑작스레 내 옆으로 온 아르마디가 메이스가 손을 가져다 댄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운이 깃들더니 메이스에서 환한 빛의 무리가 빠져나왔다.
“오랜만이군. 패배자여. 우리가 선물해준 땅 속은 즐거웠나?”
순백의 갑옷을 걸친 기사 가라드가 검 끝을 까딱이며 도발의 말을 꺼낸다.
“필시 즐거웠을 것이다. 어두침침하고 음험한 놈과 잘 어울리잖나.”
그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르기누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꺼냈다.
“이 지긋지긋한 인연을 이제 끝내자. 아그라.”
과거 세상을 구했던 용사가 검 끝으로 아그라를 가리키며 살의를 드러낸다.
“현실에서 보는 건 처음이구나. 루시.”
그리고 내 옆에 선 할아버지는 내 머리카락을 꾹 누르며 살가운 웃음을 지었다.
“어떠냐. 실제로 보니 믿음직하지?”
“으으음. 그건 모르겠고 쉰내가 나긴 하네. 나이를 감추는 게 많이 힘든가봐?”
“…기이하군. 저 놈이 저주를 끝냈을 터인데 어찌 어투가 달라지질 않는가.”
아. 맞다. 그랬었지. 무의식 중에 예전처럼 말해버리고 말았네.
실수했단 생각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더니 할아버지가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에 대한 건 나중에 추궁하도록 하마.”
“그냥 깜빡해주시면 좋겠는데요.”
“가기 전에 한 마디만 하자면, 루시. 주신께선 널 우롱할 의도가 없으시다. 그러니 저 분께 분노를 드러내지 말거라.”
“…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할아버지가 앞으로 달려간다.
*
“이제와 한다는 것이 과거의 영웅들에 기대는 거냐?”
아그라의 핀잔 어린 목소리에 아르마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 홀로 당신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아니까요.”
“저 녀석들이 있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을 듯 한데?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끝이 눈 앞에 온 상황이지 않나.”
과거 신화의 시대가 종말에 이르던 시절과는 다르다.
끝의 권능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
세상이 끝에 이르는 순간이다.
저들이 인간의 격을 뛰어넘은 변수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봐야 인간. 작금에 이르러서 아그라를 위협할 순 없다.
“그건 해봐야 아는 법!”
아그라의 군세를 뚫고서 돌진한 용사가 그의 목을 향해 검을 들이민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아그라는 검을 그냥 받아주고는 얼굴을 붙잡아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아님 지난 번처럼 네 존재를 찢어발겨가며 내 힘을 흝어볼 테냐?”
자신의 목에 파고 든 검을 대충 뽑아내 던진 그는 다시금 아르마디를 보며 웃었다.
“부디 그래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 때의 희생으로 나약해진 네가 또 다시 힘을 잃으면 어찌될지 궁금하거든.”
그렇다 하여 아르마디가 위협적이지도 않다.
전성기 시절 홀로 세상에 축복을 선사하던 주신 아르마디는 제 살을 갈라 신화의 시대를 끝마치며 사라졌으니까.
다시 신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들 대지에 흩어져버린 신성이 돌아올리도 없으니 지금의 아르마디는 완전히 부활한 아그라와 대적하는 게 불가능하다.
“체념하고 납득하라. 최선의 판단을 거듭해도 결국 끝은 찾아오기 마련.”
결국 이 상황은 최초 아르마디가 승리했을 그 때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아르마디는 자신을 희생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끝의 지연일 뿐.
그걸 알았기에 아그라는 기꺼이 패배를 받아들였다.
훗날 그가 다시 부활하는 그 순간 아르마디가 자신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당신의 말이 틀렸다고 하진 않겠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게 세상의 이치고, 우린 이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니까요.”
“말하는 것치곤 체념할 기색이 전혀 안 보인다만?”
“허나 지금이 끝날 때는 아닌 듯 합니다.”
살풋 미소를 지은 아르마디가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교황에게로 다가간다.
“아그라. 당신의 사도에게서 기이함을 느낀 적 없으십니까? 이 분은 제가 나약해졌음을 아시는데 어떻게 제게 모든 권능을 주려 하셨을까요.”
“…잠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그라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의 팔과 다리를 어둠이 사로잡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추해지는 건 여전하군.”
“악당스러워서 참 좋아. 가책 없이 괴롭힐 수 있으니까.”
자신의 권능을 펼쳐 어둠을 떼어내려는 아그라의 움직임을 가라드가 가로 막고.
“비켜라!”
“가만 있도록. 네 놈은 지나갈 수 없다.”
루엘이 앞을 지키고.
“주신이시여! 기적을 일으켜 주소서!”
어디선가 검을 되찾은 용사가 목소리를 드높인다.
“나의 군세여!”
그에 따라 여유를 되찾은 아그라의 군세가 아르마디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번엔 루시와 동료들이 그들을 밀어낸다.
“오오오! 위대하신 주신이시여!”
그렇게 얻어낸 시간 속에서 교황의 앞에 도달한 아르마디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아아아아아! 알고 계셨군요! 당신께서 저를 이 곳으로 인도하신 거군요! 이해했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다급히 자신의 품을 뒤진 교황은 소중히 보관해두었던 성물을 꺼냈다.
십자가의 모양을 지닌 목걸이.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대지의 수많은 장소와 연결 되어 있는 물건.
교황이 교회에서 벌였던 수많은 악행의 목적이 되는 것.
목걸이를 받아 든 십자가를 바라보다 아르마디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내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무릎을 꿇더니 교황의 귓가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교황은 기대감이 잔뜩 서린 얼굴로 아르마디의 말을 기다렸지만.
“설마 제가 당신을 칭찬할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은 교황의 기대와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지상의 당신을 보는 내내 역겨워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제멋대로 오해를 품어선 제게 기도할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돋더군요.”
“오해…라니요?”
“전 당신을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아니다. 아르마디는 방황하는 어린양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그. 그럴 리가.”
“제가 왜 당신 같은 악인을 구하겠습니까.”
방황하는 그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길 바라며 빛을 선사했다.
“전 당신의 빛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 망상인가요?”
“부정하지 말아주십시오! 전 당신께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세상을 저버렸단 말입니다!”
허나 그 구원의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잘못된 이에게 손을 내민 죄로 대지의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해야만 했으니까.
“자신의 악을 감당하지도 못해 제게 뒤집어 씌우시려는 겁니까. 한심하군요.”
아르마디가 깊고도 깊은 분노를 담아 이를 갈며 비난의 말을 내뱉자 몸에 힘이 풀린 교황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럴 수가.”
“영원토록 지옥을 헤매세요. 역겨운 자여. 당신에게는 지옥이 어울립니다.”
갈 곳을 잃어버린 눈동자를 등진 채 고갤 돌린 아르마디는 십자가를 움켜쥔 채 앞으로 나섰다.
거친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붉은 빛 머리카락의 옆에.
아르마디 자신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그 곳에서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재회와 함께 사과의 말을 전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