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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06

잠에서 깬 페이비는 눈을 비비다 어둑해진 바깥 하늘을 눈에 담았다.

제가 언제 잠들었던 걸까요. 분명 마지막 기억이 망가진 성지의 복원을 지휘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나 보네요.

정말 전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군요. 영애님께서 재회를 위해 자리를 비우셨으니 마땅히 그 자리를 제가 대신해야 할 터인데.

한숨과 함께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려던 페이비는 자기 어깨를 꾹 누르는 감촉을 느꼈다.

“좀 쉬어. 급할 거 없잖아.”

퍼뜩 고개를 돌린 페이비는 따스한 온기에 경계를 누그러트렸다.

“영애님. 위대하신 주신이자 당신께서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어머님과의 재회는 끝마치셨나요?”

“…놀란 눈치는 아니네? 페이비라면 좀 더 호들갑을 떨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영애님께서 주신의 격을 이었다는 건 충분히 납득가능한 일이거든요.”

성지의 전투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다 루시가 아르마디의 자식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기적이 일어난 자리에서 이루어진 감동의 재회는 제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둘의 관계를 인지하게 만들었으니까.

사람들은 주신의 사도가 사실 반신이었단 사실에 놀랐지만 그들의 동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부터 루시는 자신의 비범함을 모두에게 보였다.

단순한 인간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당연하다는 듯 이뤄왔다.

그런 루시라면 반신의 격을 지녔다 해도 납득이 가능한 것이다.

“영애님을 거의 신처럼 여겼던 저입니다. 놀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는 건데, 광신도마냥 엉엉 울면서 달려들면 바로 도망쳐버릴 거야.”

“후후. 걱정 마십시오. 영애님. 당신께서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루시 알른이 어떤 존재더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단 걸.”

이제와 루시가 반신이란 사실이 밝혀졌다한들 페이비의 입장에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영애님께서 신의 격을 지니고 있는 건 분명 놀라운 일입니다.

허나 제가 영애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저 분이 지닌 비범함 때문이 아니에요.

저 분이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고결함과 선함을 좋아하는 거죠.

예전에는 그걸 착각했지만 여러 번의 실수를 거친 지금은 아닙니다.

“영애님은 제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건 바뀌지 않습니다.”

전 영애님의 곁에 서고 싶어요. 마냥 동경하며 멀리서 기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이 분의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길 바랍니다.

그러니 전 영애님의 신도가 아니라 영애님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언젠가 루시를 위해 무엇이라 하겠다 결심할 때와는 달리 지금 페이비가 보여주는 웃음은 부드러웠다.

가만 페이비의 미소를 마주하던 루시는 이내 가볍게 웃고는 팔짱을 꼈다.

“그럼 날 향해서 기도도 안 올릴 거지?”

“그건 좀 다른 이야기죠.”

“뭐가 다른데.”

“주신 교회의 얼굴로서 주신과 그 사도에게 경배를 바쳐야 하거든요. 모두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핑계를 댈 순 없잖아요?”

“그…런가?”

“이제와 말하기엔 새삼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해요. 이미 전장에 섰던 이들에게 영애님은 숭배의 대상인 걸요.”

페이비는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솔직하게 전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던 이들.

승리의 영광을 모두 다 루시에게 전하던 기사들.

신과 함께 전장에 섰단 사실에 즐거워하던 용병들.

루시가 그려진 장신구를 잃어버렸다며 오열하던 사람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영애님께선 어딜 가더라도 환호를 받을 테니까요.”

“진짜 끔찍한 소리하네.”

“익숙해지면 여러모로 괜찮답니다. 사람들이 먼저 호의로 다가온다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거든요.”

“난 싫어! 진짜 싫어! 변태사도 같은 놈들이 양산될 거 같단 말야!”

“…음.”

어지간하면 일이 좋게 풀릴 것이라고 말할 페이비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루시가 걱정하는 일이 이뤄질 확률이 너무도 높았으니까.

당장 그 전장에 서계시던 분들 중에서도 위험해보이는 분들이 많았으니까요. 그건 피할 수 없는 재앙이라 봐야 하겠죠.

“평판. 평판을 떨어트려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위엄을 없애야 해!”

“아그라와 한 번 더 싸우는 편이 더 쉬울 것 같네요.”

“이럴 때는 그냥 좋은 말 해주면 안 돼?! 페이비 너 그런 거 잘하잖아!”

“그치만 영애님께 거짓을 고할 순 없는걸요.”

“허락해줄테니까 그냥 하얀 거짓말을 해 줘어어어!”

울상을 짓는 루시의 모습에 페이비는 그녀의 저주가 풀렸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표정의 자유를 얻은 뒤에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당당함을 지녔던 영애님입니다.

허나 지금은 아니에요. 영애님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아이가 그러하듯 생생한 표정을 보여주고 계세요.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더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요.

이토록 솔직하고 활달한 분께서 모든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셨다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또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자신의 마지막 이해자마저 잃어버린 그 순간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아아아. 됐어. 이런 건 그냥 나중에 걱정할래. 당장 생각하고 싶지 않아. 생각한다고 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그것도 그렇죠.”

“그러니까 당장 거슬리는 걸 지적할래. 페이비. 너 언제까지 날 영애님이라고 부를 거야?”

“…네?”

“우리 친구라며? 친구인데 왜 자꾸 딱딱한 호칭을 쓰는 거야?”

“그게…”

루시의 지적에 페이비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진짜 저 따위가 영애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도 되는 걸까요?

저 분의 옆에 서기로 결정하긴 했지만 루시라는 호칭을 사용할만큼 격의가 없어도 괜찮지는 않을 듯 한데.

“뭐야. 조이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난 못 하겠다는 거야? 아하? 말로만 친구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란 거구나?”

“네에!? 아니요! 그럴리가요! 전 언제나 영애님을…!”

“됐어. 말로만 그러는 건 누가 못 해? 아~ 맞네. 내 앞에 있는 허접은 그것도 못 하는 구제불능의 바보였구나?”

부. 불러야 하는 건가요?

진정해요. 페이비. 예전에도 한 번 해 본 적 있잖아요.

못 할 건 전혀 없어요. 겨우 이런 걸로 긴장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라고요!

악신 아그라의 앞에도 서봤던 제가 이 정도를 못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님 혹시 일부러 나 화나게 만들려는 거야? 그렇게 괴롭힘 당하는 게 좋았어? 또 의자로 써줄까?”

“할게요! 하겠습니다! 할뚜 있어요!”

“그으래? 그럼 해 봐. 할뚜 있다며?”

“으으으…”

붉어진 얼굴을 두 손 아래에 감춘 페이비는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하다가 퍼뜩 고갤 들었다.

“루. 루. 루. 루시.”

“으응? 뭐라고? 작아서 잘 안들리는데?”

“루. 루시이!”

“한 번 더.”

“루시! 루시! 루시! 이러면 되나요!?”

“푸흫. 퍄하하핳. 그래. 하면 잘 하네. 바보야.”

키득키득 웃던 루시는 어찌할 줄 몰라하는 페이비에게로 다가와선 자연스레 그 옆에 앉았다.

“페이비. 이젠 네 의무니 뭐니 하는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당분간은 우리 바보 마마가 여기에 있을 예정이거든. 그러니까 좀 편하게 지내. 여태까지 쫓기듯이 살아왔잖아.”

그리고는 자신의 자그마한 손으로 페이비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의 외견처럼 가녀리지만 고생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친 손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나왔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사람이 나뿐만은 아냐. 페이비. 너도 마찬가지야. 우리 무능한 마마 때문에 고생만 했으니까. 이제라도 어린 시절을 되찾아 주고 싶어.”

영애님께선.

…아니죠. 루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저 또한 자신과 같은 피해자라고.

어렸을 적에 느껴야 할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이제 행복해져야 한다고. 모든 게 끝났으니 등에 짊어진 것을 떨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고.

“루시도 저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군요.”

“하. 내가 뭘 모르는데?”

“전 이미 보답을 받았다는걸요.”

저와 루시는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루시와 성녀라는 이름 아래에서 웃음을 지었던 저는 같을 수 없습니다.

제가 시련을 겪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어린 시절을 가득 채운 불행이 가볍다고 얘기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전 그 고생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아왔습니다.

주신 교회에서 지내던 무렵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과분한 행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전 앞으로도 주신 교회의 성녀로서 일할 겁니다. 여태까지 받았던 것들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요.”

저라 해서 일상을 살아가는 게 싫지는 않습니다.

친우분들과 함께 웃으며 떠드는 시간은 상상만 해도 즐거우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전 제가 지닌 의무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전 위대하신 주신께서 선택한 대리인 중 한 사람입니다.

루시가 구원한 이 대지가 행복으로 가득 차길 바라는 신도입니다.

거짓으로 시작하여 결국 진짜가 된 성녀입니다. 루시가, 아르마디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입니다.

전 여태 제가 받은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페이비가 단언하듯이 이야기를 하자 루시가 눈을 굽혔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 구나.”

“어라?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알지. 넌 이런 부분에선 절대 타협하지 않잖아.”

“아하하. 역시 루시보다 앞설 순 없나 보네요.”

“그래서 어떤 대답을 할지도 준비해뒀어.”

“궁금하네요. 루시가 절 설득하기 위해 준비해둔 거라니.”

“네가 안 쉬면 나도 안 쉴 거야.”

“…네?”

“내가 편하게 일상을 즐기길 바란다면 너도 아무것도 하지 마.”

에. 에에엑?!

그. 그런!

루시! 너무해요! 자기 자신을 인질로 삼다니!

“왜애? 나도 그냥 너랑 똑같이 생각할 뿐인데?”

“루시와 저는 달라요!”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그건. 그건 아니지만.”

페이비가 이도 저도 못한 채 눈을 떨자 루시가 헛웃음과 함께 고갤 내저었다.

“아예 아무것도 하지 말란 거 아냐. 멍청아. 그냥 좀 쉬엄쉬엄하라는 거지.”

“그…런 건가요?”

“대신 내가 놀자고 할 땐 다른 거 다 내던지고 찾아올 것. 알겠지?”

“물론이에요! 루시의 말이라면 대륙 반대편에서라도 달려가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는 꼼지락대는 두 손을 등 뒤에 감춘 채 페이비를 바라봤다.

“그 동안 옆에서 지탱해줘서 고마워. 페이비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믿음직스러웠는지 몰라.”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루시. 당신이 있었기에 제가 있을 수 있었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 잘 자.”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루시를 향한 찬양을 줄일 방법을 고민해볼게요.”

“하핳. 그래. 좋은 방법이 나왔으면 좋겠네.”

루시가 요정의 날갯짓과 함께 모습을 감추고서 방 안에 홀로 남은 페이비는 버릇처럼 두 손을 끌어모으려다 말고 다시금 침대에 누웠다.

굳이 오늘까지 기도를 올릴 필요는 없겠죠.

신께도 자유로운 시간이 필요할테니까요.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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