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
“준비를 잘 하셨네요.”
루카는 1층의 공략을 끝마친 아서 일행을 보고서 칭찬하듯이 목소리를 냈다.
“1학년이 이렇게 깔끔하게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 줄이야.”
그것은 비꼬는 것도 뭣도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전투학 교수로써 몇 년간 아카데미에 재직한 루카는 수많은 신입생들을 만나보았다.
그 중에는 유망주니 천재니 하는 소리를 달고 있는 이들이 참 많았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첫 던전 공략부터 뛰어난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던전을 공략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니까.
아무리 많은 것을 들고 있다 하더라도 그를 활용하기 위한 경험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리 오래 합을 맞췄다 한들,
던전에 대한 정보를 많이 구했다 한들,
여러 물품을 준비해두었다 한들.
그걸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일까.
허나 이들은 달랐다.
아서를 중심으로 한 이 세 명은 아카데미의 고학년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말끔한 공략을 선보였다.
“왕자님께서 준비를 잘해 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성직자인 매튜가 그리 말을 하자 자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했다.
허나 정작 그 칭찬의 대상인 아서의 얼굴은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잔 실수가 많았다.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었어.”
1층의 난이도가 아무리 쉬운 편이라고는 하지만 이 안을 돌파하는 걸 30분 안팎 만에 끝냈으면서 만족을 하지 못하다니.
향상심이 좋은 사람이네.
그러니 부족한 핏줄을 가지고서도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거겠지.
아서가 기대했던 만큼 괜찮은 인재라는 확신을 얻은 루카는 속으로 진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 신입생들 중에서는 재밌는 사람들이 많군요.
여기에 있는 세 사람은 당연하고.
켄트 영애, 파르탄 영애, 성녀님, 거기에다가 루시 알른.
당장에 눈에 띄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아직 재능을 개화하지 못한 사람들은 더더욱 많겠죠.
교수라는 직함을 맡은 보람이 있네요.
“왕자님. 너무 조급해 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겁니다. 루시 알른이 어떻게 저희 보다 빠를 수 있겠습니까.”
조금 느긋하게 가도 괜찮지 않겠냐는 자칼의 말에 루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루시 알른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여도 결국은 1학년이다.
아서처럼 치열하게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이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들로 파티를 구성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처럼 빠를 수 있겠는가.
“아니다. 승부에 있어서 방심은 필요 없다. 압도적인 승리가 방심 후의 패배보다 나으니까. 가지.”
허나 아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이 유리함을 알더라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다.
재능이 있는데 마음까지 굳건하다니.
이 사람이 제대로 된 핏줄을 타고서 태어났다면 왕국은 융성했겠네요.
루카는 그리 생각을 하면서 아서 일행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알른 영애. 제가 생각하기에 이번의 승부는 당신의 패배겠네요.
당신이 지닌 재능은 3왕자보다 뛰어나지만 안타깝게도 그 오만함이 승부를 그르쳤습니다.
과연 당신은 이번 패배의 굴욕을 기점으로 해서 무너질까요. 아니면 더 성장할까요.
알른 가문의 피를 생각해보면 후자의 가능성이 높지만 저는 전자가 되면 좋겠어요.
무너져버린 사람은 유혹에 약해지니까요.
*
루시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려있는 비시의 얼굴은 창백했다.
문제는 여러 가지였다.
우선 루시 알른의 속도가 마차의 말보다 빠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
그리고 어깨에 매달려 있는 탓에 안정감이 없다는 것.
무엇보다 루시 알른이 자길 업고 있단 사실을 잊은 것처럼 온갖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도 그랬다.
루시 알른은 길을 가로 막고 있는 목없는 처형인을 보고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다 처형인이 도끼를 치켜 든 순간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콰앙!
사람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릴 듯한 도끼가 바닥에 내리 꽂힘과 동시에 루시 알른은 처형인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실수하면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은 기행을 루시 알른은 밥 먹듯이 반복했다.
상황이 이러니 비시는 루시 알른의 어깨에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도 마음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속을 게워내지 않은 것만 해도 칭찬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알른 영애! 조금만 안전하게 가주시면 안 될까요?!”
“시끄러워. 들러리. 어차피 안 죽는데 왜 이렇게 겁이 많은 거야? 밤에 화장실가기가 무서워서 침대에 지리는 꼬맹이야?”
비시가 간청을 해보았지만 루시 알른의 대답은 단호했다.
누가 이 안에서는 절대 안 죽는 거 모르냐고요!
그걸 알아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잖아요!
당신처럼 목숨을 내던지듯이 움직이는 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괴물 같은 망나니!
비시는 속으로 투정을 부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버리고 가는 게 어디냐.
켄트 영애님에 비하면 나는 짐덩이나 마찬가지인데.
알른 영애도 괴물이지만 켄트 영애님도 만만찮다니까.
이 트롤 같은 망나니를 어떻게 따라… 어?
“알른 영애?!”
“왜.”
“저기 켄트 영애님이.”
켄트 영애는 목없는 처형인을 상대로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무표정한 눈이 한 곳을 향하는 걸로 보아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루시 알른은 그를 확인하자마자 내달려서는 켄트 영애의 목덜미를 붙잡아 끌었다.
“민폐 허접 검사! 당신 닭대가리야?!”
“그치만 쟤 강해 보였어.”
“쌈닭마냥 머리 비우고 달려드는 건 혼자 있을 때 해!”
켄트 영애는 아쉬운 듯 목없는 처형인을 바라보았지만 다시 달려들진 않았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의 공략 속도는 경이로웠다.
1층을 공략하는 데 10분이 걸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비시라는 짐덩이를 배려했기 때문.
진심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루시 알른의 던전 공략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2층을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분.
다른 층을 공략하는 데도 그보다 빨랐으면 빨랐지 느리진 않았으니.
아카데미 던전에 들어고 나서 40분이 지났을 무렵.
10층의 보스룸이 모습을 드러냈다.
*
보스룸을 앞에 두고서 숨을 가다듬었다.
짐덩이를 업고 달리니까 확실히 운동이 되네.
다음에 아침 구보를 뛸 때는 중량을 더 늘려서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칼이야 알른 가문에서 이보다 더한 일을 많이 해 보았으니 멀쩡했지만 다른 둘은 달랐다.
자신의 발로 나를 따라와야 했던 프레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내 어깨에 업혀 있던 비시 같은 경우엔 내가 바닥에 내려주자마자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둘 다 너무 약해.
비시야 게임에서 제대로 된 언급도 안 나오는 NPC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프레이가 이걸로 지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근접전 최강 캐릭터의 위용은 어디로 가버린 거야.
확실히 현실이 되니까 이런 부분이 불편하네.
게임을 할 땐 NPC들의 체력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으으. 스피드런을 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해야 하다니.
이 한 순간 한 순간에도 타이머는 움직이고 있다고!
“아가씨.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팔짱을 낀 채 초조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칼이 웃으며 내게 조언을 건넸다.
“지금 아가씨의 던전 공략 속도는 초월적일 정도로 빠릅니다. 여기서 한 시간을 쉬어도 3왕자님은 아가씨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도 그런가.
아서가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더라도 결국은 NPC일 뿐이니까.
다른 고인물과 스피드런 대결을 할 때처럼 필사적일 필요는 없겠지.
‘조언 고마워요. 칼.’
“허접. 쓰잘데기 없는 조언하지 마.”
“아하하. 죄송합니다. 아가씨.”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고 프레이가 기운을 차렸을 무렵에 난 보스룸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비시? 걘 여전히 반쯤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괜찮다.
어차피 쟤는 뒤에서 구경만 하면 충분하거든.
보스룸의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전에 본 적 있던 녀석이었다.
입학시험에서 보스룸에 등장했던 상대인 골렘 기사.
이번에는 대검이 아니라 창을 들고 있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봐야 난이도는 비슷했다.
“먼저 갈게.”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허접 검사. 시키지도 않은 짓 하지마. 목줄 채우기 전에.”
나는 알새틴에게 빌려온 아공간 주머니에서 준비해 둔 물건 중 하나를 꺼냈다.
짜잔! 부식 물약!
이거 한 방이면 골렘계열 보스들은 꼼짝 못하지!
상위 던전에 가면 부식 저항을 달고 다니는 미친 놈들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건 나중에 고레벨이 된 후의 이야기.
이런 초보용 보스가 그런 걸 들고 있을 리가 없잖아.
창을 든 골렘은 그 육중한 무게 탓에 움직임이 꿈떴다.
그 때문에 내가 던지는 물약병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부식물약을 뒤집어 쓴 골렘이 눈을 붉히면서 다리를 움직인다.
육중한 몸으로 바닥을 울리면서 다가오는 기사 골렘의 모습은 위협적으로 보인다.
근데 그럼 뭐해.
부식물약에 얻어맞아서 물렁살이 되어 버렸는데.
지금이라면 조무래기 영식이 칼을 휘둘러도 갑옷을 벨 수 있을 걸?
우리 미친개의 이빨은 더 잘 파고 들 테고.
‘프레이. 달려들어요.’
“허접 민폐견. 물어.”
“왕. 이라고 하면 돼?”
프레이는 답잖게 농담을 하면서 골렘에게 달려들었다.
*
“저번에는 말이죠…”
“어머어머.”
다른 귀족 영애들과의 관계를 위해 다과회에 참여하던 조이였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다.
알른 영애. 그 사람은 무슨 자신감으로 제가 준비한 걸 거부한거죠?
그 분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맨땅에서 공략하는 것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건 전혀 다를 텐데.
거기에다 상대가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3왕자님이잖아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
그런 분을 상대하는 데 아무 준비도 안 했으면서 허세나 부리기는.
만약에 지면 3왕자님인 뭘 시킬 줄 알고!
아아. 안되겠어요.
“파트란 영애님?”
“잠시 던전 앞에 다녀와야겠어요?”
“3왕자님이 걱정되시는 건가요?”
“괜한 걱정을 하시네요. 당연히 3왕자님이 오만한 알른 영애를 이기지 않겠어요?”
그게 걱정되는 건데요?!
조이는 속으로 그리 소리쳤지만 겉으로는 웃고 말았다.
그녀가 웃음을 지으니 다과회 장에 있던 그 어떤 귀족 영애도 조이를 붙잡지 못했다.
바깥으로 나온 조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던전의 입구로 향했다.
던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오롯이 소울 아카데미의 교수들 뿐이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학생들에게도 공개되어 있는 정보가 하나 있다.
각 학년마다 상위 100명의 학생이 몇 층까지 공략했는지에 대한 것.
지금 1학년은 던전에 들어갔다 온 사람보다 던전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
그러니 던전에 들어간 순간 랭킹에 이름이 오를 터.
랭킹을 확인하면 3왕자님과 알른 영애의 대결 양상을 알 수 있을 거야.
“뭐야?”
“또 올랐어?!”
“무슨 부정이 있는 거 아냐?”
“말이 안 되잖아.”
그런 생각을 한 조이가 던전 입구에 도달한 순간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조이는 근처에 있던 학생 하나를 붙잡고 그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
“파트란 영애님! 먼저 인사 드리지 못해서 죄송…”
“그런 건 됐어요. 그보다 다들 왜 이러는 거죠?”
“저어. 1학년 던전 공략 랭킹을 맨 위를 보면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랭킹? 3왕자님이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기록을 써 내려 가고 있는 건가?!
알른 영애! 그러게 제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요!
조이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면서 랭킹을 확인했다.
‘루시 알른 : 20층’
…내가 환각 마법에라도 걸렸나?
20층이요?
2층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