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7
이걸로 미노타우르스를 상대하는 건 두 번째인가.
첫 번째 승부는 나의 처참한 패배였다.
사실 그건 승부라고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건 일방적인 폭력이었지.
미노타우르스의 주먹질 한 방에 나의 방패는 부서졌고, 그 다음 공격에 나의 의지가 무너졌으며, 그 뒤로는 그저 죽음을 앞에 두고서 공포에 벌벌 떨고 있어야만 했다.
지금은 어떨까.
당시의 난 레벨만 올랐을 뿐인 깡통이었지만 지금은 숙련도를 꽉꽉 채운 고인물이다.
전체적인 스텟도 엄청나게 상승했고 신성마법도 익혔다.
전투 경험은 말할 필요도 없지.
거기에 더해 방금 전에 지금 할 수 있는 도핑까지 모두 끝마쳤으니 루엘의 시련을 돌파했을 때와는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다.
만일 이게 게임이었다면 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으리라.
레벨 1짜리 캐릭터로도 미노타우르스를 때려잡던 나인데 이만한 스펙이 있으면 농락하면서 가지고 놀 수 있지.
허나 이것이 현실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지난번의 처참한 패배 때문일까.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괜찮으냐?>
‘뭐가요.’
<한 번 패했으니 두려울 터이다만.>
‘그 때 생각하니까 화나네요. 할아버지. 오랜만에 짬통 구경 좀 하실래요?’
<…>
한 마디를 해주었더니 할배가 입을 다물었다.
일부러 언급 안 하려고 그랬는데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시면 어쩌자는 거야.
그거 할배 업보거든요? 저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거든요?
어쨌든 결과가 잘 풀려서 짬통 한 번 담가주고 끝낸 거지 아직 마음이 다 풀린 게 아니란 말이에요.
후우.
…
무서운 건 사실이다.
나는 어느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강인한 인간이 아니다.
처음에 영약을 먹었을 때도 스킬이 없었다면 고통이 두려워서 두 번째 영약을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단련을 시작했을 때도 그렇다.
스킬이 나를 움직여 주었기에 무작정 내달릴 수 있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거다.
오크를 처음 상대할 때도 그랬다.
공포극복이 아니었더라면 거기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지금도 딱히 다르지 않다.
여전히 저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무섭다.
미친 듯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고되다.
그렇지만 할 수 있다.
스킬이 있으니까.
원래 게임에 빙의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킬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잖아?
나도 똑같은 거야.
공포극복이 내 두려움을 없애줄 것을 믿고.
무너지지 않는 의지가 내 포기를 허락하지 않을 거란 걸 믿고.
철벽이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막아줄 거라고 믿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 거다.
‘갑니다.’
“따라와요. 불쌍왕자님.”
골목에서 빠져 나와 미노타우르스의 앞에 선다.
그 거대한 덩치와.
붉게 물든 눈동자와.
뜨거워서 살결이 익어버릴 듯한 숨결과.
나를 반으로 쪼개버릴 수 있는 도끼를 본다.
심호흡을 하고서 방패를 치켜들었다.
“안녕♡ 징그럽고 냄새 나고 멍청한 소대가리♡”
미노타우르스의 눈이 나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메이스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허접 주제에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도축해주길 바라는 피학성향의 변태인거야?♡ 하핫♡ 알겠어♡ 내가 메이스로 연육을 해줄게♡”
메스가키 스킬이 선사하는 고양감과 함께 미노타우르스가 고함을 지르며 내게 달려든다.
빌어먹을. 덩치에 비해서 더럽게 속도가 빠르네.
그렇지만.
이 정도면 대응할 만해.
콰앙!
미노타우르스가 두 손으로 내리치는 도끼를 방패로 막아낸다.
철과 철이 부딪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로를 갈아댄다.
강하네. 더럽게 강해.
방패를 들고 버티고 있는 손이. 팔이. 어깨가. 부서질 것만 같아.
근데 소대가리야. 그거 아냐?
나 아직 버프 걸기 전이다?
‘신께서 대지에 자신의 사도를 보내오니…’
속으로 기도문을 읊는다.
성기사가 지닌 특기 중 하나.
신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
체력을 더하고.
힘을 키우고.
신체와 마음에 강건함을 키우고.
굳은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아르마디의 사도인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신성마법은 나를 싫어하는 요한 주교마저도 경탄할 수준이었으니.
미노타우르스와 나의 격차를 어느 정도 좁히기엔 충분했다.
나와 미노타우르스 사이에서 이어지던 대치를 무너트린 것은 아서였다.
마검사인 그가 불러낸 바람의 마법이 미노타우르스의 얼굴을 공격한 것이다.
주춤거리며 물러선 미노타우르스를 쫓아 그 허벅지를 향해 메이스로 치켜든다.
미노타우르스의 가죽은 두텁고 근육은 단단하지만 상관없다.
얘랑 나랑 레벨 차이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방어력이 얼마나 높던 간에 트루뎀은 그대로 박히거든?
그리고 메이스를 내리 찍은 순간에
“쿠어어어!”
손맛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분노한 걸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미노타우르스는 나를 지나쳐 아서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고통의 원흉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야. 지금 어디를 보는 거야.
작고 귀엽고 배빵을 날리고 싶은 여자애가 있잖아.
여기서 눈을 떼다니 수컷으로써 탈락이라고 밖에 말 못하겠는 걸.
너 설마 암컷이니?
암컷치곤 너무 징그럽게 생겼는데.
으음. 아! 남색가인 거야?
그럼 나한테서 눈을 뗄 만도 하네.
그렇지만 그걸 허락해 줄 순 없어.
난 탱커니까.
“좆밥 소대가리♡”
네 앞에 있는 적을 봐.
“설마 내 방패를 뚫을 자신이 없는 거야?♡ 맞네♡ 네 허접한 도끼로는 불가능하겠지♡”
너를 약올리면서 무시하는 나를 보라고.
“겁쟁이♡ 허접♡ 병신♡”
그렇지.
날 봐라. 소대가리야.
네 적은 나다.
이성을 잃은 미노타우르스가 나를 짓뭉개기 위해 돌진한다.
연이어 내리쳐지는 미노타우르스의 도끼를 방패로 막아낸다.
공격을 할 겨를은 없다.
아무리 버프로 신체의 격차가 좁혀졌다 한들 여전히 우위에 선 것은 미노타우르스.
저 놈이 이성을 잃은 채 내지르는 공격 중 하나라도 직격하는 순간 나는 치명상을 입고 만다.
그러니 기다린다.
방패를 든 채. 물속에 숨은 악어가 되어서.
상대가 강에 발을 디디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미노타우르스의 생명력은 질기다.
모든 몬스터를 따져 보아도 상위권에 들 정도로.
그렇지만 질기다는 게 무한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 놈도 어쨌든 간에 생물.
육신이 없는 유령도 아니고. 지침을 모르는 언데드도 아니지.
언젠가는 틈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글쎄?
그렇게 버티고 또 버티던 중 미노타우르스가 커다란 공격을 준비했다.
허리를 크게 돌리면서.
팔을 뒤로 빼며.
자신의 가죽 아래에 얼마나 많은 근육이 있는 지를 증명하려 든다.
저 일격은 위험하다.
막을 수 없으니 흘리거나 피해야 한다고 철벽이 소리친다.
달려들어서 상대의 공격을 끊어내야 한다고 할배가 말한다.
나도 그 이야기가 옳음을 안다.
여태까지 얼마나 고된 훈련을 반복했는데 그를 모를까.
그렇지만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지쳐버린 몸은 내 의지를 따르지 않았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는 것이었다.
옆으로 크게 휘두른 미노타우르스의 일격이 내 방패에 닿음과 동시에 내 몸이 붕하고 떠올랐다.
아. 이거 비슷한 짓을 당해본 것 같은데?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자마자 내 몸이 벽에 처박혔다.
씨이발. 더럽게 아프네.
벽에서 떨어진 흙먼지를 마시며 몇 번인가 기침을 하다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쉴 틈을 주지 않고 나를 박살내기 위해 달려드는 미노타우르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몸상태라면 저 공격을 막아낼 순 없겠지.
방패를 들어봐야 방패채로 부서져 버릴 걸.
그를 알면서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공포 극복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르마디의 자비.
무능 허접 변태 쓰레기 주신의 이름이 붙어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성능만큼은 확실한 스킬.
그를 사용하자마자 다시금 몸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난 별 어려움 없이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자 미노타우르스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하하. 뭐야. 네가 이긴 줄 알았냐?
안타깝게 됐네.
소대가리야. 재밌는 거 알려줄까?
나 있잖아. 아직 이 아르마디의 자비를 열 번은 사용할 수 있거든?
주머니에 든 물약을 사용하던 더 많이 쓸 수 있고.
자아. 그러니까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소대가리를 한 짐승이 지닌 생명력이 질긴지.
아니면 나라는 성바퀴가 질긴지 말야.
“덤벼♡ 허접 소대가리♡”
*
루시 알른은 굳건하다. 그녀가 한 손에 든 방패가 우그러들었음에도.
갑옷이 깨졌음에도.
머리에서 피가 흘러 얼굴을 붉게 물들였음에도.
항시 두 갈래로 묶여있던 머리카락이 풀려 엉망이 되었음에도.
수도 없이 공격을 받아내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고 있음에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굳건히 서서 미노타우르스의 앞을 가로 막고 특유의 얄미운 웃음을 지을 뿐.
그에 반해 미노타우르스는 어떤가.
우리가 결코 쓰러트릴 수 없었을 것 같은 대적자는 어떤가.
손은 도끼를 쥘 힘조차 잃어버린 상태다.
수도 없이 공격을 받은 다리는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듯 휘청거리기 일쑤다.
이미 미노타우르스에게 공세를 유지할 힘은 없다.
마물의 자존심 때문인지 억지로 버티고 서 있지만 그 뿐이다.
처음 보여주었던 거센 공포는 지금 그 어디에도 존재치 않았다.
그리고 미노타우르스가 간신히 지키던 마지막 자존심조차도 루시 알른이 메이스를 휘두른 순간에 부서졌다.
미노타우르스의 다리가 무너지고 무릎을 꿇는다.
압도적인 괴물과 여아의 대결은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시작이 되어서 그와는 정반대의 결과에 도달했다.
내려다보는 것은 루시 알른이었고 그를 괴물 바라보듯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는 건 미노타우르스였다.
저것이 알른 가문의 핏줄인가.
수도 없이 많은 영웅을 배출해 낸 가문의 여아인가.
재능뿐만이 아니었구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그 이상의 악기를 지녔기에 저런 괴물이 될 수 있었던 게로구나.
하하. 이제는 하다하다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내가 루시 알른에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될 줄이야.
일주일 전의 내게 이런 말을 했다면 정신이 나갔냐고 그랬겠군.
미노타우르스의 앞에 도달한 루시 알른이 메이스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를 아래로 내리친 순간 미노타우르스의 뿔이 바닥에 떨어졌다.
“가죠. 불쌍왕자님.”
자신의 얼굴에 칠해진 붉은 피를 닦아내며 웃어보이는 루시 알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
*
<위험했구나.>
‘그러게요.’
미노타우르스를 상대하는 건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진짜 더럽게 질기다니까.
저 소대가리 새끼.
단적으로 말해서 버티는 건 그럭저럭 할 만 했다.
여러 신성마법도 있고 아르마디의 자비도 있고 다른 스킬들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딜이 안 나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트루뎀이 박힌다 해도 겨우 내 공격력의 5%.
지난 번 사령처럼 물몸이면 괜찮지만 질기기로 유명한 미노타우르스를 때려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중간중간에 아서가 틈을 만들어 주고 마법으로 급소를 공격해주지 않았다면 힘든 승부가 되지 않았을까.
뭐어. 그래도 어쨌든 간에 이겼고 레벨업도 했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안 그래?
– 띠링
그리 생각을 하며 안전구획에 발을 디딘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아그라한테 한 번 당했던 난 흠칫 놀라서 다급히 메시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퀘스트 클리어!]
다행히 이번 것은 빌어먹을 허접 무능 변태 쓰레기 좆밥 주신의 것이었다.
아그라의 저주도 못 막아주는 무능 주신 주제에 튀어나와서 놀라게 하고 난리야!
으으. 열 받네 진짜.
[스토페의 스페셜 티켓이 지급됩니다.]
그래도 보상은 제대로 챙겨 주는 구나?
하긴 이것도 안 주면 주신이 아니라 사기꾼이지. 암.
자 빨리 줘요. 주머니에 넣고 쉬게.
[…]
[아그라의 손길을 무사히 뿌리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네?
[보상이 추가됩니다.]
뭐야?
무능 주신이 갑자기 왜 이러지?
얘 원래 이런 신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