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바닥에 쓰러졌던 나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허접 기사가 변변한 공격 한 번 한 적이 없는데 내 몸을 못 가눠서 넘어진 게 도대체 몇 번째야?
적어도 열 번은 넘은 건 확실해. 그 때까진 세고 있었거든. 그 뒤로는 귀찮아서 안 셌지만.
심호흡을 하고서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낸 후 고개를 든다.
내 반대편에 서 있는 기사는 얼굴이 찌푸려진 걸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아가씨 앞인데 표정 관리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허접 기사라니까. 그래서야 신데렐라 마치로 인생 역전을 할 수 있겠어?
“포기하시죠. 아가씨.”
“포기시켜 봐. 허접 기사.”
“이러다 다치실 겁니다.”
“여자아이를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하는 것도 어려워? 역시 허접이네♡”
내 도발에 기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하하. 저러다가 진심으로 한 대 치겠다? 응?
저런 놈이 고결한 기사는 무슨. 저런 녀석한테 어울리는 건 고자 기사 정도야.
웃음을 흘리며 거친 숨을 달랬다.
내가 이 허접 기사와 대련을 시작하고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사와 병사, 시녀를 가리지 않고 구경꾼이 늘어난 것을 보면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고 싶은데 아가씨가 건드리지 말라 명하셨어.”
“그렇지만.”
“일단 기다려. 지금 기사단장님이…”
루시의 악명에 오늘만큼 감사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하도 패악질을 부린 탓에 주인이 다치는 것을 말려야 할 이들이 망설이고 있지 않나.
만약 루시가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다면 상황이 과열되기 전에 다른 이들이 우리를 말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허접 기사에게 한 방을 먹이고 말겠다는 내 목표도 달성할 수 없었겠지.
숨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지만 얼마 전까지 체력단련을 한 덕분에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얼마든지 메이스를 휘두를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내달렸다.
기사는 여러모로 허접하긴 했어도 어쨌든 기사였다.
도발을 당해서 잔뜩 화가 난 와중에도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는 듯 내게 싸움의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발을 움직이는 걸 멈춰서는 안 된다.
항상 상대가 무얼 할 지를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상대의 손을 보는 것이 아니라 팔과 몸이 움직이는 걸 봐라.
결코 상대의 동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계속 상대를 봐야 한다. 등등.
실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알려줬지.
그 방법이 결코 온건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실력이 많이 늘어난 건 사실이었다.
오늘 아침에 무작정 메이스를 휘두르던 나랑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걸.
그래봐야 이 빌어먹을 허접 기사에게 쪽도 못 쓰는 건 똑같지만.
허접 기사는 강했다.
공격 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고, 발악하듯 메이스를 휘두른다 해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냥 가볍게 대처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에게 허접 기사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압도적인 상대였다.
계속되는 대련 속에서 계속 허접 기사를 도발해서 스텟을 엄청나게 올렸음에도 그랬다.
이게 PC로 하는 게임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고인물 특유의 테크닉으로 이 허접 기사를 쓰러트렸을 텐데.
허접 기사의 앞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허접 기사는 검을 움직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계속해서 이랬다. 허접 기사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공격하는 걸 자제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감정조절에 실패해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난 이전과는 달리 마음껏 메이스를 휘두를 수 있었다.
허접 기사는 묵묵히 내가 휘두르는 메이스를 받아냈다.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쳐내는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세련되어서 나의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공격을 이어가다 제풀에 쓰러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틈을 만들어야 해.
그리고 틈을 만들 방법이라면 생각해둔 바가 있지.
“뭐야!… 허접 기사. 막기만 할 거야?!”
“예. 그럴 겁니다.”
“하♡ 공격을 막는데 급급한거구나? 약해빠졌네♡”
허접 기사의 눈썹에 살짝 힘이 들어가더니 그가 휘두르는 목검의 속도가 빨라졌다.
메스가키 스킬에 아무리 도발이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너무 잘 넘어오는 거 아냐?!
기사의 공세가 시작된다.
잔뜩 스텟이 늘어나 있어서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연격이 쉴 새 없이 방패를 때린다.
진짜 인정사정 안 봐주는데?!
방패의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고!
얼마나 힘을 강하게 준 거야 넌!
철벽 스킬이 고하는 대로 기사의 공격을 막아내던 나는 기회를 포착했다.
분노에 찬 기사가 평소보다도 더 힘을 실어서 검을 휘두르는 순간.
내가 막을 것을 가정하고 검을 움직인 순간.
그 검을 쉬이 멈출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 나는 나를 지켜주던 방패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기사의 당혹스러워 하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가 당연히 막아내리라 생각하고 검을 휘둘렀다.
힘의 가감을 했을 지언정 내 방어를 버겁게 만들 만한 강격을 날렸다.
그런 상황에 갑자기 내가 검을 내려버린 것이다.
이전에 공세를 퍼부울 때도 내게 단 한 번도 검을 닿게 하지 않은 녀석이다.
혹시나 자신이 실수를 할까 두려워 공격을 자제하던 녀석이다.
그러니 내가 검을 맞을 상황이 되면 어떻게든 검을 멈추겠지. 분명했다.
이는 도박이었다.
기사의 실력을 믿고, 그가 아직까지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리라 믿고 내건 도박.
실패한다면 저 목검에 얻어맞아 상처를 입을 게 분명한 도박.
그 순간에 주변의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다.
봐. 네가 그토록 바라던 대로 지금 난 검이 바로 앞에 왔는데도 눈을 감고 있지 않잖아.
네 성과야. 기뻐해야지. 허접 기사.
기사가 자신의 휘두른 검을 멈추는 동안 나는 메이스를 위로 치켜 들었다.
머리 깨부수기.
내가 요 며칠간 수천 번도 넘게 반복했던 동작.
어제는 꿈에서까지 반복했던 동작.
검을 멈추는 데 급급했던 기사는 내가 메이스를 휘두르는 걸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퍼억!
손맛이 있었다.
메이스에 얻어맞은 기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성공했다. 드디어 성공했어.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했다고!
잔뜩 찌푸려진 허접 기사의 얼굴을 보던 나는 방패를 든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일종의 승리선언을 내뱉었다.
‘한 방 먹으셨네요?’
“좆밥♡ 여자애한테 농락당한 쓰레기♡”
그 비아냥을 듣자마자 갑작스레 허접기사가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가 발을 땅에서 떼어낸 순간 나는 이미 기사의 신형을 놓친 상태였다.
뭐지?
당혹스러움을 느끼던 중에 철벽 스킬이 내게 위협을 고했다.
방패를 들라고 외쳤다.
방금 전까지 전투를 하며 잔뜩 날이 서 있던 본능은 철벽 스킬이 시키는 바를 따랐고.
콰아아앙!
방패가 위치한 자리에 기사의 주먹이 꽂혔다.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막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사의 주먹에 담긴 힘은 내가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먹에 떠밀려 나면서 기사의 눈을 보았다.
분노에 사로 잡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 눈을 보았다.
위험해.
그대로 날아가 몇 번인가 바닥을 구른 나는 공격을 막은 팔에서 심대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본능이 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능은 틀리지 않았다. 고개를 든 순간 바로 나의 앞에 기사가 도착해 있었다.
이성을 잃은 그는 주먹을 쥐어 위로 치켜들었다.
저기에 맞으면 어떻게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아프긴 하겠지.
정말 장난 아니게 아플 거야.
어쩌면 영약을 먹었을 때보다도 더.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공포 극복이 내 마음에 담겨 있던 공포를 훔쳐가 버렸다.
…하. 스킬이 일을 잘하긴 하네.
좋아. 한 대 맞아줄게. 한 방을 먹이겠다는 내 고집으로 너를 도발해서 이 사단을 만든 건 나니까 말이야.
으으. 결국 메스가키가 한 도발의 결과는 참교육으로 끝나는 건가.
가만 눈을 뜨고 기사가 주먹을 내지르기를 기다리던 순간 갑작스레 누군가가 나와 기사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베네딕에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덩치를 지닌 중년 남성 하나가 기사의 주먹을 한 손으로 가로 막았다.
*
“칼 도대체 왜 그랬냐.”
알른 가문의 기사단장인 포셀의 말에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바라보던 칼이 고개를 들었다.
포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잔뜩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살벌했다.
“내가 막아서 미수로 그친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가씨가 크게 다치셨을 거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묻자. 왜 그랬냐. 아가씨가 험한 말을 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칼은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이없는 대답에 포셀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칼과 그 사이를 가로막은 철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러자 어지간한 기사 수십이 달려들어도 요동도 않는 철창이 구부러졌다.
“네가 저지른 짓인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지?”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포셀의 살벌한 목소리에도 칼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왜 그랬던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칼은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아버지에게 훌륭한 기사란 게 어떤 건 지를 듣고 자랐던 그는 자신도 아버지처럼 멋진 가사가 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랬기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훈련을 거듭했고, 여러 고위 귀족들과 아카데미에서 경쟁을 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소울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그 성과 덕에 여러 기사들이 선망하는 알른 가문의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칼은 기사가 되고 나서도 어릴 적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스스로가 꿈꾸는 이상적인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가 처음 루시에게 다가간 것도 고결한 기사가 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 루시가 벌인 여러 패악질을 알고 있음에도.
동료들이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아냥 대는 루시의 말에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자신이 모시는 가문의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 아래 기사된 자로써 그를 도와야 한다 믿었기에 루시에게 다가갔다.
허나 호의에서 시작된 일은 오늘에 이르러 하나의 참사를 만들어 냈다.
지켜야 할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다니! 아무리 루시 아가씨가 계속 안 좋은 말을 했다 한들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다니!
일이 있고서 많은 이들이 칼에게 왜 그랬냐고 화를 냈지만 칼은 거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칼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칼 자신이었다.
“단장님.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안다.”
“아카데미 시절 여러 귀족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버텼고. 전장에 나가 다른 용병과 기사들을 상대하면서도 감정 때문에 실수한 일은 없었습니다.”
“안다니까?”
“그런데 아가씨의 비아냥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루시의 비아냥은 그리 험한 말이라 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들었던 여러 욕설에 비하면 그 비아냥은 강도가 약했다.
아카데미의 귀족들에게 들었던 비난에 비하면 음습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의 비아냥은 너무도 쉽게 칼의 이성을 날려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이렇게 된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자괴감에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