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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1

사각사각.

책상 앞에 앉은 소녀가 펜을 든 손을 바쁘게 놀렸다.

소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색 잉크가 반듯한 네모 칸을 벗어나 종횡무진 내달렸다.

소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네모 칸 밖을 벗어난 글씨를 불만족스럽게 쳐다봤지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손이 특별히 더 신중해지는 일은 없었고, 소녀의 손에서 태어난 글씨는 다른 형제들이 그랬듯이 자신을 옥죄는 네모난 틀에서 벗어나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

다은은 소녀의 분홍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셀린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없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네요. 그렇게 고생하실 걸 알았으면 저도 같이 가드렸을 텐데….”

“에이~ 아니에요. 카나 덕분에 고생은 하나도 안 했는데요 뭘. 물론 카나한테 업혀서 하늘을 날았을 땐 에델 님 곁으로 떠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요.”

“후후.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한 번 겪어보고 싶어지는데요?”

“어우, 빈말로라도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너스레를 떨었더니 더한 너스레로 답하는 셀린.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다은이 식겁하고 그녀를 만류했다.

그건…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처음 카나의 등에 업혔을 때만 해도 영화 속의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손을 잡고 하늘을 걷는 낭만적인 광경을 상상한 다은이었지만, 현실과 영화는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현실….’

혼자서 생각하던 다은이 그 두 글자를 속으로 곱씹었다.

시청자들이 들었다면 필시 게임 중독이라고 놀렸을 생각.

그렇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시청자들이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뭐, 만약 들었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지만.”

“네?”

“아, 혼잣말이었어요.”

다은이 셀린의 의문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양 넘겼다.

사실대로 말해봤자 어차피 셀린은 필터링 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알아듣기는커녕 듣지도 못하겠지.

‘….’

다은은 머리를 흔들어 씁쓸한 기분을 털어냈다.

“아무튼, 발토라에서 일주일 정도 더 머물러야 할 거 같아요.”

일주일. 브론딘이 마도구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

일반적인 마도구도 아니고 드래곤 오브를 재료로 쓴 마도구를, 그것도 주문 제작으로 만드는 시간치곤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다.

브론딘의 말을 들은 아시에도 그걸 걱정했지만, 드워프는 수염을 휘날리며 껄껄 웃을 뿐이었다.

‘까짓거, 며칠 밤새우면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아무리 들어도 걱정밖에 들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을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건을 만드는 일에 있어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인 드워프가 그렇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거기에 대고 반박하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브론딘과 제휴를 맺은 막스가 없어져서 마법을 새길 이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제가 말입니까?’

‘싫어?’

‘아뇨! 하겠습니다! 하게 해주세요!’

그 문제는 막스를 찾는 걸 도와준 마법사와 새로운 제휴를 맺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그 외에, 작업 기간 동안 카나가 낀 반지를 보여달라는 등의 조건도 있었지만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면 두 분이 발토라에 온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된 셈이네요.”

“음… 그렇긴 하죠? 과정이 좀 찝찝하긴 했지만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자비를 미덕으로 삼는 에델 님도 그런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런가요?”

“물론이랍니다.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걸 보면 저니 님은 역시 상냥하시네요.”

“아우, 부끄럽게 왜 그래요?”

훅 들어오는 셀린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른 다은이 손부채질했다.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정도까진 아니지만, 괜히 부끄러워서 셀린과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던 다은이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 마침내 카나가 끄적거리고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종이 위에서 춤추는, 글자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잉크의 흔적도.

“아앗, 카나야! 칸에 맞춰 써야지, 이렇게 다 삐져나오게 쓰면 어떡해!”


“…귀찮아.”


“귀찮다고 대충 쓰면 글씨체가 예뻐지지 않는다구!”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 그래도 똑바로 써야 집중도 더 잘되고, 또 알아보기도 쉽고….”


“흐응.”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이유를 댔건만 카나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카나의 고집에 다은이 결국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삐뚤빼뚤하게 쓰면 어린애가 쓴 것처럼 보인다구. 그렇죠 셀린?”

“네? 아, 그, 그럼요. 저니 님 말씀이 맞아요.”

“…바보 같아.”

다은의 기세에 셀린이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던 카나는 한숨을 쉬고는 잠시 중단되었던 글씨 쓰기를 재개했다.

흰 종이를 수놓는 검은 잉크는 아까와 달리 네모반듯한 틀 안에 얌전히 갇혀 있었다.

* * *

일주일 후.

날이 밝고, 짐을 챙겨 교회에서 나온 우리는 브론딘의 공방으로 향했다.

“와아…!”

다은의 입이 벌어짐과 동시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때, 마음에 좀 드나?”


“물론이죠!”

이걸 보고 어떻게 마음에 안 든다 하겠어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웃는 다은이 마음에 들었는지, 브론딘의 얼굴에 가득하던 피로가 조금이나마 걷혔다.

나는 브론딘이 다은에게 건넨 반지 형태의 마도구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심미안이 없는 나로서는 ‘예쁘긴 해도 저렇게 반응할 정도로 예쁜가?’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받는 사람이 좋으면 됐지.’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낄 것도 아니고 말이야.

“고마워 카나…! 잘 쓸게!”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그야, 카나가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테니까! 돈도 카나가 냈고…. 돈 정도는 내가 내도 되는데. …지금이라도 줄까?”

“됐어.”

내 고집 때문에 위험천만한 락시아에 데려가는 건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다은의 성격이라면 고집이 아니었어도 따라왔을 거 같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손 떨면서 말하는데 어떻게 돈을 받겠어.”

“뭐? 내, 내가 손을 떨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물론 돈이 쪼오금 부족한 건 맞지만…!”

“흐, 농담이야.”

다은이 식겁하며 제 손을 내려다봤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처음 산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가까워진 다은과의 사이.

나보다 몇 뼘은 더 큰 그녀에게 팔을 뻗자 손목에 걸린 팔찌가 찰랑 흔들렸다.

“팔찌의 답례야. …생각해 보니 답례를 안 한 것 같아서.”

“…이런 걸 받을 정도로 대단한 걸 주진 않았는걸. 그냥 노점에서 파는 팔찌일 뿐인데.”

“으응, 아니.”

그녀의 말을 부정한 나는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나한테는 대단했어.”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가격이 전부가 아니니까.

가만히 내 말을 듣던 다은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차올랐다.

순간, 불안감이 등골을 스쳤다.

이 패턴이라면 분명….

꼬옥!

“카나야…!”

“윽.”

또, 또. 다은의 품에 끌어안긴 나는 체념하고 포옹을 받아들였다.

…역시나 이렇게 되는구나.

이제는 이런 전개도 익숙해.

그래도-

“답답해….”

안지 말라고는 안 할 테니까 조금만 살살 안으면 안 될까?

그러나 날 끌어안은 다은의 팔은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하게 나를 안았다.

그렇게 포기하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으니, 머리 위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정말로 소중하게 여길게.”

“…마음대로 해.”

…이런 간질간질한 분위기는 내 취향이 아닌데.

멀뚱하게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다은의 등을 두드렸다.

실수로라도 터뜨리거나 부러뜨리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팔이 스르르 풀렸다.

목소리가 촉촉하길래 울고 있는 게 아닐까 했는데 포옹에서 풀려나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엔 눈물 자국 하나 없었다.

코끝은 빨갛고,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물기가 가득했지만.

“크흠흠!”

헛기침 소리에 돌아보니 브론딘이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이 좋은 자매구만. 아주 보기 좋아.”

그래도, 이젠 설명해도 괜찮겠나?

다은이 나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며 민망한 듯 웃었다.

“앗… 죄송해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네. 다만,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아서 말이야. 사실 이런 설명은 나보다 마법사가 하는 게 맞겠지만… 작업을 마치자마자 뻗어버렸으니 어쩔 수 있나.”

브론딘이 벌겋게 충혈된 눈을 비볐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충혈되던 그의 눈은 이제 토끼 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빨갛게 되어있었다.

매일 그를 찾아온 나였기에 그의 변화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내가 낀 반지에 와서 닿았다.

“…솔직히 말해서 아쉬운 건 사실이라네. 내 실력이 더 뛰어났다면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브론딘에게 부탁할 때, 나는 마도구를 어떤 형태로 만들어 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은을 위한 마도구가 반지 형태로 만들어진 건 오롯이 브론딘이 정한 것이었다.

내가 가진 그라시드의 가호를 본 그가 영감이 떠올랐다고 날뛰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형태였을지도 모르지.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군. 어떤 장인이 저런 물건을 만들었는지….”

질투하는 것 같기도, 경외하는 것 같기도 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에게 끝까지 장인이 아니라 드래곤이 만든 물건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못 믿을까 봐 그런 건 아니야.

오히려 그가 내 말을 믿을 걸 알아서 그런 거지.

술에 취해서 드래곤 오브를 샀다는 걸 떠벌리고 다닌 사람한테 그런 걸 말해줄 리 없잖아.

브론딘도 반쯤 푸념처럼 한 말이지, 내 대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는 더 캐묻는 대신 반지로 화제를 돌렸다.

디자인은 왜 이렇게 만들었고, 내구도가 어떻고, 마법은 어떤 게 들어갔고.

중간중간 자기 자랑까지 잊지 않고 곁들이며 신나게 떠벌대던 브론딘이 입을 찢어져라 벌리며 요란하게 하품했다.

이야기가 그의 유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을 때쯤이었다.

눈꼬리에 걸린 눈물을 훔쳐낸 그가 충혈된 눈을 비볐다.

“이젠 정말 자러 가야겠군. 아직 못다 한 얘기가 많은데.”


“이, 이런 좋은 물건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으니까 푹 주무세요!”


“맞아요 스승님. 그러다 쓰러지실지도 몰라요.”

다은과 저번 일을 통해 정식 제자가 된 아시에가 힘을 합쳐 브론딘의 등을 떠밀었다.

“피로라면 제가 회복시켜 드릴-”

“-쉿.”

지금 셀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내버려두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직감적으로 그걸 느낀 나는 셀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엉?”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극구 버티던 브론딘은 결국 두 사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침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찾아온 평화에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한숨을 쉬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셨는데….”

딱 한 사람만 빼고.

셀린은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침실 문을 바라보았고, 우리는 그런 셀린을 질린 눈으로 보았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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