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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3

“아시에.”

“….”

“아시에!”

“아, 스, 스승님! 언제 오셨습니까?”

“언제 오기는. 아까부터 와 있었다 이놈아!”

정신을 놓고 있던 아시에가 브론딘의 호통에 정신을 차렸다.

브론딘은 그를 보며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그 꼬마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나?”

“…꼬마 아가씨라고 하면 제가 이상한 놈 같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별로 차이도 안 나는데…. …아니, 그보다. 스승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

“안절부절못하면서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어떻게 눈치를 못 채나? 지금도 뭐 마려운 개처럼 끙끙 앓고 있으면서.”

“…뭐 마려운 개라니.”

참 드워프다운 비유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이 내심 찔렸던 아시에는 차마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고백이라도 시원하게 하지 그랬냐? 남자답게, 엉? 사내자식이 소심해 빠져서-”

“…했습니다.”

“…응?”

“고백, 했습니다. 세 번이나.”

“….”

그라시스 시절에 한 번, 며칠 전에 재회한 날에 한 번, 떠나는 날에 한 번.

총 세 번에 걸친 고백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낙심한 아시에의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대체 뭐가 부족했던 걸까.

아시에는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그의 근육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힘내라. 세상에 여자가 어디 그 녀석뿐이겠냐.”

설마 했는데 벌써 차였을 줄이야.

의도치 않게 제자에게 상처를 더한 브론딘이 서툰 손길로 아시에의 등을 토닥였다.

아시에는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투박한 손길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마대륙 락시아로 간다니.’

아시에도 락시아를 직접 본 적은 없다.

애초에, 그렇다 할 경지도 이루지 못한 그가 그곳에 간다면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마기에 중독되어 죽어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고문서를 비롯한 여러 문헌을 통해 락시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카나가 그곳으로 향한다고 했을 때 그는 카나를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안 가면 안 되냐?’

카나를 사랑하기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꺼낸 게 짝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그냥 지인이라 할지라도 아시에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카나가 강하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기가 범람하는 락시아 한복판에서도 소녀의 강함이 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것을 판단할 만큼 사료가 많지 않았으니까.

‘왜?’

‘왜냐니! 사지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하는데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그런가?’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태도.

사지라는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건지, 아니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단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답답한 건 매한가지라 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보다 한발 앞서 카나의 조그만 입이 열렸다.

‘그래도 가야 해.’

늘 그렇듯 덤덤한, 그러나 강한 의지가 담긴 말.

가리드가 엮인 일 외에 카나가 이렇게 강한 의지를 보인 적이 있던가.

잠시 생각했던 아시에는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카나가 제국을 증오하고, 제국의 황실 마법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던 것도 결국 가리드의 죽음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목소리를 들은 아시에는 더 이상 카나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절망이 아닌 희망을, 누군가를 향한 증오가 아닌 미래를 향한 기대를 품은 아이를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그러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심해서 다녀와라.’

끝내 카나를 붙잡지 못한 아시에는 덤덤한 척 작별 인사를 남겼다.

하다못해 그가 더 강했더라면 같이 가자는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지금만큼 자신의 약함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스승님.”

아시에는 문득, 어설픈 말로 그를 위로하는 브론딘에게 말했다.

“엉?”

“스승님은 연애해 보신 적 있습니까?”

“….”

“….”

“….”

순식간에 고요해진 공방 안.

대답 없는 대답에 둘 사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일하자.”

“…예 스승님.”

두 남자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축 처진 분위기 속에서, 망치를 들고 스승의 뒤를 따라가던 아시에의 머릿속에 카나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기다리지는 마’…라니.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이 녀석아!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해!”

“아, 갈게요! 갑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에 중얼거리던 아시에는 그를 부르는 스승의 목소리에 서둘러 대장간으로 뛰어들어갔다.

* * *

“…밝아.”

나는 나를 내리쬐는 햇빛을 올려다보며 눈을 찡그렸다.

여름철 한낮에 내리쬐는 햇빛보다는 못해도 얼굴을 찌푸리게 하기엔 충분한 세기였다.

흐린 날보다 맑은 날이 좋다.

비를 맞으며 청승 떠는 것보다 햇볕을 쬐며 늘어져 있는 게 좋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지, 그런 날씨를 특별히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야.

‘흐린 날과 맑은 날. 둘 중 어떤 날씨가 더 좋아?’라고 묻는다면 맑은 날을 고르는, 딱 그 정도의 호감.

그러니 나는 지금 나를 내리쬐는 햇빛이 딱히 반갑지도, 싫지도 않았다.

…만약 이 상황이 정상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지금 몇 시지?”

“응? 어디 보자….”

다은이 부산스럽게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름에는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진다.

지구와 다른 세계인 실리아도 그 법칙은 다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름이 아니었고, 설령 여름이었다고 해도 이런 시간엔 해가 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태양은 여전히 내 머리 위에 있는 걸까.

“….”

“…카나야. 태양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달려들면 안 된다? 보기엔 가까워 보여도 엄청, 어어어엄청 멀리 떨어져 있거든.”

“…나도 알아.”

대체 다은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무래도 조만간 날을 잡아서 그녀와 면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으읏, 갑자기 오한이…!”

다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추운 날씨가 아닌데 왜지…?”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 날씨는 무척 따사로웠다.

너무 따사로워서 이대로 낮잠을 취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몇 번이나 말했듯이 지금은 낮이 아니라 밤이었고, 따라서 지금 자는 잠은 낮잠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 카나는 ‘백야’를 처음 보는구나?”

“백야?”

어렴풋한 전생의 기억 속, 그런 단어가 있었던 것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인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밤이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었던 거 같은데.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있었나?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셀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에델 님, 뜻, 이에요.”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다은이 떠오르는 어눌한 말이었으나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 수 있었다.

“이 현상이 에델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음… 뭐, 그렇다고 하더라.”

확인을 위해 다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지 사뭇 자신 없는 태도로 답했다.

차원수와 싸운 여파일까?

아니면 에델이 의도적으로 만든 현상인가?

이유야 어찌 됐든 에델 때문에 생긴 현상은 맞는 모양이다.

어쩐지 이 지역에 들어오면서 기묘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이 현상 때문이었나 보네.

나는 하늘을 못마땅하게 올려다보는 것을 멈추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대낮처럼 환한데 야영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한데….

주변이 밝을 뿐이지, 시간 자체는 평소에 야영 준비하던 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밝으면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어깨를 으쓱이며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을 그러모았다.

* * *

결과를 말하자면, 제대로 못 잤다.

“….”

“…괜찮아?”

“안 괜찮아.”

몸 상태는 괜찮다.

마스터의 몸은 하루 이틀 정도 자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생길 정도로 연약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정신은 다르다.

며칠 안 잔다고 해서 졸려서 죽을 것 같다, 이런 건 물론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잘 시간에 잠을 제대로 못 자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햇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데 잘 수가 있어야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에델에게 달려가서 왜 이런 걸 만들었는지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셀린은 잘 주무셨… 음, 잘 못 주무셨구나.”

침낭을 정리하는 셀린의 눈가도 평소와 다르게 거뭇한 느낌이 있었다.

나처럼 제대로 못 잔 게 분명한 그녀였지만 다은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온화했다.

“…부끄럽게도, 그렇답니다. 저니 님은 잘 주무셨나요?”


“아하하…. 저는 신경이 조금 무딘 편이라서요.”


“부럽네요.”

우리 둘과 다르게 다은이 멀쩡한 이유.

그건 그녀가 지구인이기 때문이겠지.

정말로 잠을 청하는 우리와 다르게 그녀는 잠을 청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헤헤, 하고 웃는 다은이 얄밉게 보여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쿡.

“꺄앗?! 가, 갑자기 왜 그래?”

“흥.”

혼자만 꿀잠을 즐긴 벌이야.

삽시간에 기습당한 다은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어벙한 얼굴을 보니 기분이 조금 풀려서 뾰족하게 세웠던 검지손가락을 접었다.

내가 잠을 못 자고, 다은은 제대로 잔 게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한 건 단순한 심술이었다.

“카나가 왜 이러지?”

다은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얼굴이었다.

단순한 심술일 뿐이니 이해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냥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거 아니냐고? 그, 그런가? 확실히 뭔가 기분 나빠 보이긴 하는데….”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다은.

다 들리지만 눈치껏 안 들리는 척 딴청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

“얍! 잡았다!”

길쭉한 팔이 내 허리를 감싸안고,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내 몸을 가볍게 안아 든 다은이 나를 내려놓은 곳은 그녀의 말 위였다.

“피곤하지? 오늘은 언니랑 같이 타고 가자. 혹시 졸다가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딱히-”

졸 정도로 피곤한 것도, 졸다가 말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다치지도 않을 텐데.

그렇게 반박하기도 전에 다은이 훌쩍 몸을 날렸다.

예전에 말에 오를 때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올라탄 다은이 내 등에 몸을 바싹 붙였다.

“이렇게 있으니 셀린이랑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지 않아?”

“…그렇네.”

웃음기가 담긴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예전 일처럼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그때는 내가 고삐를 잡고 있었지만 지금 고삐를 잡고 있는 건 다은이었다.

낯설게 느껴졌던 등 뒤의 온기도 지금은 포근하게 느껴졌다.

짧은 사이에 참 많은 게 달라졌구나.

나는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며 등 뒤의 온기에 살며시 몸을 맡겼다.

…잠깐 눈 붙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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