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
아서가 기꺼이 동의를 해 준 덕분에 던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인원이 채워졌기에 우린 즉시 던전으로 향할 수 있었다.
칼?
걔는 내가 한 마디만 하면 바로 달려와서 꼬리를 흔드니까 괜찮아.
그렇게 던전의 입구에 도착하기 직전 지난번의 일이 생각난 나는 급히 발을 멈추고 아서에게 물었다.
‘아서. 혹시 던전에 트라우마가 있진 않죠?’
“불쌍왕자님. 혹시 던전 입구를 보면 오줌을 지린다거나 그러는 건 아니죠?”
“조이의 일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거라면 괜찮다. 본인에게 목숨의 위협이란 일상적인 것이었거든.”
아서는 농담을 하듯 장난스레 이야기를 했지만 저게 단순한 농이 아님을 나는 안다.
이 나라 왕위계승권을 두고서 일어나는 다툼이 꽤나 살벌하거든.
뒤를 봐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을 지켜 줄 어머니도 없는 아서는 몇 번이나 지워질 뻔 했을 거다.
그러니 목숨의 위협 정도로는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으로 당황하기엔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되래 반대로 묻고 싶군. 루시 알른. 그대는 어떻지? 던전의 입구를 보면 울고 싶어지지 않나?”
‘전 괜찮아요!’
“제 뒤에서 벌벌 떨던 불쌍왕자님이 걱정을 해주실 줄이야. 걱정 마세요. 전 괜찮답니다.”
“왕자님. 벌벌 떨었어요?”
“난. 전혀. 겁먹지 않았다.”
내 비웃음 섞인 어투와 순수한 의문이 담긴 프레이의 물음에 아서의 입술이 점차 굳었다.
나 하나는 어떻게 버틴다 치더라도 옆에서 아무런 악의 없이 쏘아지는 물음은 견디기 어려운 가보다.
“칼 교수. 자네는 이걸 어떻게 견디고 있지?”
“익숙해지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서서히 닳아가니까요.”
“고생이 많군. 정말로.”
남자 둘이서 서로를 위로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움직였고 그렇게 던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래서 오늘은 몇 층까지 올라갈 생각이지?”
‘오늘은 던전 등반 안 할 건데요?’
“뭔가요. 불쌍왕자님은 저를 이용해서 등반을 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안타깝네요. 전 오늘 층을 올라갈 생각이 아니라서요.”
소울 아카데미의 1학기 던전 공략자가 나오는 것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정확히 2주가 지났을 시점이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만 아카데미의 던전을 완전 공략한다면 던전 최초 공략자에게 주는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던전을 완전 공략할 수 있는 사람.
당장 필요도 없는 보상을 위해 당장 던전 공략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난번에야 아서와 스피드런 대결을 한다 생각해서 진심을 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
“흠? 그럼 왜 던전에 들어가는 거지?”
‘레벨업하러요!’
“경험을 쌓기 위해 들어가는 거죠.”
지난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지금 내 레벨은 많이 상승해서 벌써 15가 되었다.
지금 주변 캐릭터들의 레벨이 보통 4~5라는 걸 생각해보면 한참은 높은 수치지.
그렇지만 아직 모자라다.
게임이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 내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이제 곧 메인 스토리가 시작되면서 악신의 사도와 부딪히게 될 거거든?
그 때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제압할 준비를 해둬야 된다.
계획상으로는 나중에 있을 일까지 생각해서 오늘 내로 레벨 23을 찍어 놓고 숙련도만 죽어라 쌓을 생각이다.
예전에 내가 이걸 게임으로 즐길 적엔 레벨 노가다 너무 하면 노잼이니까 일부러 아슬아슬한 레벨을 맞추고 놀았었는데.
그 때가 좋았지. 빌어먹을.
“경험이라. 그대에게 그런 게 필요한가?”
메스가키 번역이 말한 경험이라는 단어가 애매모호 했던 걸까 아서가 물음을 던졌다.
게임 속 NPC인 아서에게 레벨이니 숙련도니 설명하는 건 귀찮으니까 일단 대충 넘길까.
‘물론이에요.’
“불쌍왕자님. 저도 사람이랍니다?”
“으음. 그랬지. 그대가 보여줬던 것 때문에 트롤이나 악귀의 피를 잇지 않았을까 생각했다만.”
“왕자님. 저도 동감해요.”
내가 여태 했던 모욕에 반격하려는 걸까.
아서가 트롤이니 악귀니 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프레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칼은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트롤이니 악귀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루시의 아버지인 베네딕이 트롤같은 인간인 건 사실이지만 그 여파가 나한테까지 오는 건 이상하잖아!
‘제 어디가 트롤 같단 거죠?!’
“불쌍 왕자님. 눈이 많이 허접하신가요? 절 보고 트롤이라 하시다니.”
“외모를 가지고 한 이야기가 아닐세. 행동을 이야기한 거지.”
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근거를 읊어줬다.
지난 번 미노타우르스를 상대할 때 보여주었던 경이로운 회복력.
평소 훈련을 할 때 보이는 사람같지 않은 끈기.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힘.
하나하나 듣고 있자니 인간이 아니란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대충 들 수 있는 근거는 이 정도가 된다만 반박할 거리가 있나?”
사람을 놀리는 데 철저한 모습을 보이는 아서 왕자님.
자신만만하게 웃으시는 게 정말 짜증이 나네요.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를 트롤로 만들겠다 그거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드리도록 하죠.
‘아서가 날 트롤로 만들고 싶어한다면 인정해 드릴게요.’
“불쌍 왕자님께서 여자아이를 놀리는 데 이렇게 필사적이실 줄이야. 이리도 애처롭게 이야기를 하시다니 어쩔 수 없네요. 인정해 드리죠.”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주었더니 아서가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하하. 정면돌파를 할 줄은 몰랐겠지?
자 이걸로 너는 여자애를 놀리는 데 진심인 쪼잔 왕자가 된 거야!
“잠깐. 루시…”
‘가죠!’
“가죠. 던전으로. 언제까지 잡담만 하고 있을 건 아니잖아요?”
이제 여기서 뭐라고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떠나버리는 거지.
완벽한 승리야.
“근데 결국 트롤이란 걸 인정한 거 아닌가?”
뒤에서 프레이가 무어라고 했지만 무시했다.
프레이. 눈치 챙겨.
나중에 대련할 때 잘근잘근 밟히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경험치 작을 하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아카데미 바깥에 있는 외부 던전 중에 에반스의 던전처럼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던전을 가는 거다.
그런 던전을 반복해서 클리어하는 게 효율적이거든.
그렇지만 소울 아카데미에서 외부 던전으로 갈 수 있는 건 2학년부터라서.
1학년 때는 꼼짝없이 아카데미의 던전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지.
문제는 없다.
게이머라는 족속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효율을 찾아내는 사람들.
당연히 소울 아카데미 1학년에서 어떻게 하면 레벨업을 제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는 이미 연구가 끝난 상태다.
몇 가지 루트가 있지.
지금 나는 레벨 15에서 23까지 올릴 생각이니까 34층에서 시작하면 되겠네.
던전의 안으로 들어온 나는 주변 풍경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공략 최고층부터 시작을 하겠다고 설정을 하고서 안으로 들어왔는데 왜 7층인 거야?
‘뭐지?’
“흐응? 왜 7층이지?”
분명 지난번에 30층까지 클리어 해뒀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아서가 새롭게 일행이 되었다는 걸 떠올렸다.
‘아. 맞다. 아서는 7층까지밖에 공략 못했었지.’
“아 참. 맞다. 불쌍왕자님은 7층까지 밖에 공략 못한 허접이었죠?”
나도 모르게 새나온 혼잣말이었지만 메스가키 스킬이 붙인 비웃음 때문에 도발이 되어버렸다.
슬쩍 아서의 얼굴을 살피니 분명 입은 웃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은 그대로였다.
“허접이라 미안하군. 트롤 영애.”
‘아뇨. 괜찮아요! 금방 올라갈 수 있어요!’
“뭐어. 괜찮아요. 전 허접한 불쌍 왕자님과는 달리 금방 올라갈 수 있거든요.”
“그래? 기대해보지.”
*
“골목 지나가면 좆밥 고블린이 허접한 화살을 쏠 거야. 막을 테니까 프레이 네가 목을 날려.”
루시의 말이 옳았다.
골목이 끝나자마자 반대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이 화살을 쏘았고 그게 막히기 무섭게 프레이가 검을 휘둘러 고블린의 목을 날려버렸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확신을 지닌 루시와 그녀의 말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프레이의 조화.
경이롭군. 아서는 그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지난번에 함께 함정에 빠졌을 때도 느낀 거지만 루시 알른이 던전을 공략하는 능력은 초월적이었다.
루시 알른이 이 던전을 만들 때부터 개입했다고 누가 말을 한다면 그럼 그렇지. 하고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아무리 축복의 효과로 던전 내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지만 저런 지휘는 정보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것은 재능이다.
신이 내려준 정보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거야.
이 정도면 어지간한 기사단의 지휘관보다 루시 알른이 나은 수준 아닐까 싶은데.
저러니 아르마디께서 축복을 내린 거겠지.
저런 인간이 있다면 나 같아도 힘을 줘 보고 싶을 테니까.
아서는 이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진 않았다.
칭찬을 하면 또 어깨가 잔뜩 놀라서는 허접이니 좆밥이니 하는 소리를 내뱉을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일행은 루시의 지휘 속에 놀라운 속도로 던전을 공략해 나갔다.
짐덩이였던 비시가 유효전력인 아서로 바뀐 것이다.
당연하게도 던전을 공략하는 속도는 지난 번보다 훨씬 더 빨랐다.
7층에서 10층까지 도달하는 데에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고, 10층에서 20층까지 도달하는 데엔 30분이면 충분했으니.
루시가 목표로 하는 34층에 도착한 것은 아카데미 던전에 진입하고서 2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뭐에요. 불쌍 왕자님. 힘드신가요? 처음엔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진짜로 죽을 것 같군.
전투는 거의 수행하지 않고 달리기만 했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아서가 무릎을 붙잡은 채 벅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다스리고 있자니 앞에서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허접한 체력으로 시비를 거니까 굴욕을 당하는 거랍니다. 불쌍왕자님?”
그가 슬며시 고갤 들자 한치 흐트러짐도 없이 여유로운 루시 알른의 얼굴이 보였다.
땀이 살짝 흐르기는 했지만 그 뿐. 그녀의 숨은 평소와 같았다.
저 무거운 갑옷과 방패를 들고서 뛰었는데 어찌 저리 평온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이 자가 순수한 인간이 맞는 것인가?
아무리 보아도 인간이 아닌 것의 피가 섞여있는 것 같다만.
“마음 같아선 좀 더 움직이고 싶은데.”
여기서 더 강행군을 펼치겠다고?!
이 자는 악마인가!
그랬다간 마물을 상대하기도 전에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허접한 불쌍 왕자님이 쉬고 싶다고 간절히 비신다면 조금 쉬고 갈 수도 있어요.”
빌라고?
이 왕국의 3왕자인 내가.
그대에게?
“어떡하실래요? 불쌍왕자님?”
살짝 굽어진 채 반달을 그린 눈이 아서를 내려다본다.
루시의 의도는 뻔했다.
아서가 이미 한계에 달했음을 알고서 저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를 놀리기 위해서.
어떡해야하는가.
이미 몸은 한계에 달했다.
이를 악물고 움직이려 한다 한들 머잖아 무너질 테고 그럼 또 놀림거리가 되겠지.
이 자에게 빌미를 주고 싶지는 않지만.
자존심을 세우다 무너질 바엔 차라리.
“…쉬게 해주겠나?”
아서가 새어나가는 숨소리마냥 작은 목소리로 그리 이야기하니 루시가 고갤 갸웃거렸다.
“네? 뭐라고요 불쌍왕자님? 잘 안 들리는데요?”
이 녀석!…
네 놈처럼 뛰어난 신체능력을 지닌 이가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거늘!
그리 본인에게 굴욕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냐!
본인이 트롤이라 불렀다 해서 그러는 게야?!
치졸하구나! 실로 치졸해!
아서는 속으로 울분을 터트렸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마땅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네.”
“아핫. 알겠어요. 불쌍왕자님께서 그~렇게 쉬고 싶으시다면이야. 잠시 쉬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