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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5

잠은 깼지만 여전히 다은에게 기댄 채로 몸 상태를 살폈다.

컨디션은… 응, 나쁘지 않네.

조금 눈을 붙였던 게 효과가 있었는지 기분이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

아무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앞을 보았다.

한쪽 팔이 없는 외팔 검사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거 때문에 깬 거기도 하고.

‘흐음.’

기억에 있는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나와 싸우고 싶은지 투기를 풀풀 풍기는 걸 보면 저쪽은 날 아는 모양이네.

아마, 전쟁터에서 나를 만난 사람 아닐까.

어쩌면 비어 있는 왼팔도 그때 잃었을지도 모르지.

‘외팔 검사라니.’

이 세계에서는 한쪽 팔이나 다리 같은, 신체 한구석이 불편하거나 없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웃 나라와의 전쟁, 마물이나 몬스터와의 사투, 차원수의 침공 등, 실리아 세계는 평화와는 거리가 꽤 먼 세계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으니.

그들의 몸에 남은 상처는 그들이 이겨낸 치열한 투쟁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를 가로막은 남자의 팔이 하나밖에 없다는 점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고.

다만, 팔 한쪽을 잃고도 검을 들고 일어선 것이 상당히 놀라울 뿐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가벼운 상처라면 몰라도 신체 한구석이 날아가는 부상을 입으면 다시 무기를 들 생각을 하지 못하니까.

특히 팔은 사소한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생기는 중요한 신체 부위인데, 하물며 목숨이 오가는 전투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팔이 하나라면 두 손으로 검을 잡을 수 없다.

한손검을 쓴다고 해도 검을 휘두르는 동안 균형을 잡아줄 다른 팔이 없으니 필연적으로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팔을 잃고도 전장에 복귀하는 검사는 매우 드물었지만….

“신기하네.”

그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한쪽 팔을 잃고 나서, 내 앞에 다시 서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겠지.

몸 곳곳에 난 흉터가 그가 지금까지 한 노고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일어났어?”

“아까부터 깨어 있었는데.”

“미안해.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지?”

“으응….”

도리도리.

“그 전부터 일어나 있었어.”

“그, 그랬구나. …어라? 그러면 왜 계속 자는 척한 거야?”

“…자는 척한 거 아니야.”

그냥 눈을 감고 있었던 거지 속이려고 한 게 아니라고.

다은이 푸스스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졸리면 더 자도 되는데.”

“아니.”

잠은 이 정도만 자도 충분해.

“손님이 왔으면 맞이해야지.”

그게 집주인의 도리잖아?

물론 시시콜콜 따지면 여긴 집이 아니고, 저 남자도 손님이 아니지만, 어쨌든 나를 찾아온 건 맞으니까.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폴짝 말에서 뛰어내리려고 할 때였다.

가느다라면서도 건강미 있는 팔이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카나. 이번 일은 나한테 맡겨주지 않을래?”

“…응?”

“나도 증명이란 게 하고 싶어졌거든.”

“증명?”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남자와 대화를 했으니 그가 좋은 의도로 나를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저런 말을 한다고?

뚱딴지같은 말에 눈만 껌벅껌벅 뜨고 있으니 다은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읏차.”

다은은 이젠 말에서 내리는 것도 제법 익숙해진 듯했다.

깔끔하게 땅에 내려선 그녀가 검을 뽑았다.

“저 남자는 자기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어. 마침 나도 카나한테 검을 배운 후로 얼마나 강해졌는지 궁금했으니까 딱 좋은 기회 아니야?”

“…너 누구야.”

“엑?!”

다은은 다은이지, 대검 삐약이가 아니다.

즉, 저런 호전적인 발언을 할 리 없다.

눈을 세모꼴로 뜨고 노려보니 다은이 짐짓 상처받은 시늉을 했다.

“너, 너무해….”

“하나도 안 너무해.”

당연히 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용병과 싸워보라는 말에 벌벌 떨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달라졌을 리 없으니까.

사람의 본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였다면 나한테 얻어맞은 귀족 놈들이 모가지를 뻣뻣하게 들고 돌아다니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다은의 속마음은 분명 저게 아닐 것이다.

그걸 아는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쯧.”

“…??”

결과만 말하면 택도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저 사람의 심리가 어떤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충 알 수는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생각을 읽는 재주는 나에게 없었으니까.

“진심이야?”

“그럼! 이 기회에 나도 카나한테 증명할 거야. 내가 이렇게 강해졌다고! 그러니까 훈련 시간을 늘리자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

앞의 말은 몰라도 뒷말에서는 다은의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녀를 빤히 보니 자신만만하던 그녀가 슬쩍 눈을 피했다.

“…매일 그런 훈련을 시키는 카나가 나쁜 거야.”

눈은 피했지만 의견을 굽힐 순 없었던 모양.

은근슬쩍 나를 살피며 책망하는 듯한 말을 하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파드득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무리야.”

검을 쥔 자세만 봐도 지금 다은의 수준으로 저 남자를 상대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팔이 하나 없는 걸 감안하고도 남자는 다은보다 강했다.

강자와의 대련은 도움이 된다지만, 글쎄.

저 남자가 봐주면서 상대할 것 같지는 않은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려나.

“왜?! 저번엔 용병들이랑 싸우라고 했으면서.”

“걔넨 어중이떠중이였잖아. 그마저도 직접 고르라고 했고.”

별 같잖은 짓을 하고 다니는 놈들답게 실력이 형편없었지.

그래서 그때는 다은에게 싸우라고 시킨 것이다.

“…그 정도로 강해?”

“응. 그 정도로 강해. 대검 삐약이가 와도 질걸.”

알기 쉽게 설명해 주자 다은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녀가 생각하는 강함의 척도는 나와 대검 삐약이인 듯했다.

“그래도 정 싸우고 싶다면 내 말을 쟤한테 전해줘.”

“…갑자기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증명하고 싶다며. ‘나와 싸울 때 목숨은 살려줄 테니 너도 죽이지 마‘라고 전해.”

“안 하면 안 될까?”

“빨리.”

“히잉….”

죽고 죽이는 싸움을 했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다니.

묘한 감흥이 들어 잠시 입을 다문 사이, 울상을 지은 다은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의아한 듯이 듣던 남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했어?”

“응. 하지만 자기는 봐주지 않아도 된대. 예전에 살려준 값이라고 생각한다나 뭐라나.”

“흐응.”

정말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네.

애초에 죽음을 각오하고 왔는지 남자는 내내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셀린.”


“네?”


“여기.”


“네?”


“…여기, 와.”


“아, 이리로 오라고요?”


“응.”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셀린을 끌고 전장에서 한 발 물러났다.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를 대비해 언제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마친 나는 다은에게 손짓했다.

“화이팅….”

“응원할 거라면 적어도 좀 더 의욕 있게 해주면 안 될까? 볼 뽀뽀라든가….”

“내 의욕은 몰라도 저니의 의욕이 생기게 해줄 순 있어.”

“꼭 이기고 올게!”

후다닥 도망간 다은이 남자의 앞에 섰다.

아무튼 의욕은 제대로 생긴 모양이네.

* * *

“흐으….”

몰려오는 긴장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다은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부여잡으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와 악마는 무슨 관계지?”

“동생이에요. …피가 이어져 있진 않지만.”

카나와의 관계가 궁금했는지 묻는 남자의 질문에 다은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왜 카나를 악마라고 불러요? 하는 행동을 보면 악마를 대하는 것 같진 않은데.”

정말 악마라고 생각하면 인정사정없이 달려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은의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말버릇이다.”

“…아, 네.”

그렇군요.

반론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 말에 다은이 입을 다물었다.

다은과 남자 사이에 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색해!

다은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음. 선수를 양보하지.”

“…고마워요.”

어색함을 느낀 건 다은만이 아니었는지 머쓱하게 머리를 긁던 남자가 말문을 텄다.

다은은 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레벨은… 보이지 않네.’

은근히 흔하게 있는 경우라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 채로 생각하던 다은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첫 공격은….

‘내려 베기…!’

다은은 그녀가 가장 많이 연습한 동작으로 싸움을 열었다.

상당히 빠른 공격이었지만 남자는 하나뿐인 팔로 문제없이 다은의 공격을 쳐냈다.

챙!

남자의 검과 부딪힌 다은의 검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왔다.

‘이 정도는 예상했어!’

그녀는 검끼리 부딪치며 생겨난 반동에 거스르지 않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은 그녀가 빛살처럼 쇄도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는 카나의 눈엔 빛살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다은이 느끼기에는 그러했다.

채앵!

이번에도 막힌 공격.

이번에는 다은도 살짝 동요했다.

찌르기는 그녀가 카나와 대련할 때 가장 대응하기 힘들어했던 공격이었다.

타점을 정확히 읽기 힘든 데다가, 읽는다 해도 워낙 빨라서 제때 공격을 막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은은 찌르기가 다가올 때 몸을 날려 피하는 방식을 주로 선택했는데, 남자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양 쉽게 막아냈다.

“이익…!”

그렇다면 더 빠르게!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검.

언뜻 보면 남자의 힘이 더 세 보였지만, 둘의 힘 차이는 의외로 별로 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따금씩 날아드는 남자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다은이었지만-

공방이 계속될수록 그녀의 발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퍼억!

“흐읏?!”

검격 후 날아드는 발차기.

검을 막느라 미처 발을 보지 못한 다은이 발차기에 맞고 주르륵 밀려났다.

지금까지와 다른, 경쾌하지 않은 소리가 울리고, 밀려오는 고통에 그녀가 얼굴을 구겼다.

‘…빨라. 그리고, 강해.’

얼얼한 복부를 어루만지며 참았던 숨을 토했다.

하나 남은 팔을 노려도, 다리를 노려도, 하다못해 목숨과 직결된 심장이나 목을 노려도.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검을 쳐내고 반격했다.

마치 이쪽이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다은이 속임수를 섞어 목을 노리는 척, 팔을 노렸을 때도 남자의 검은 그림자처럼 다은의 검에 따라붙었다.

검사의 거리는 곧 검의 길이.

자신의 거리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한 그녀였지만 그 모든 것들이 막혔다.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은의 공격이 조급해졌다.

한 손으로 잡던 검을 두 손으로 잡으면 검격에 담긴 위력도 늘어난다.

그녀와 근력이 비슷한 남자가 이 공격을 맞는다면 자세가 무너질 것이다.

본능적으로 계산을 마친 그녀가 두 손으로 검을 고쳐 잡고 그를 향해 강하게 내려 베었다.

다은이 이때까지 해온 공격 중 가장 강한 공격이었다.

“하앗!”

챙!

“…!”

늘 정직하게 받아치던 남자의 검이 비스듬하게 다은의 검을 받았다.

검면을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검에 다은이 눈을 부릅떴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검을 따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훤히 열린 다은의 몸을 향해 매정한 검날이 날아들었다.

사아악-

쿠당탕!

“크, 읏…!”

가까스로 몸을 비튼 덕분에 치명상은 피했으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고 일어난 다은의 어깨에 붉은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아, 아파….’

시스템 덕분에 줄어든 통각이 이 정도라면 원래는 대체 얼마나 아프다는 걸까.

심장이 하나 더 생기기라도 한 듯, 다은의 어깨가 두근두근 열기를 뿜었다.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얼굴엔 이미 패색이 짙게 어려있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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