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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6

견고한 돌담.

그것이 외팔 검사를 보는 다은의 심정이었다.

손을 뻗어 만질 수 있고, 넘으려고 시도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돌담을 넘어 가거나 무너뜨리기엔 그녀를 가로막은 담은 높고 견고했다.

“하아… 하아….”

피가 뚝뚝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은 다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은을 보는 카나의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언뜻 못마땅한 기색이 내비쳤다.

카나의 생각보다 못 싸워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밀리는 게 안타까워서일까.

‘…후자였으면 좋겠네.’

다은은 후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카나가 검술을 가르칠 때면 유독 엄격해지는 걸 아는 터라 쉽게 장담하지 못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몇 번의 심호흡이 끝나자 거칠었던 숨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흥분에 찼던 그녀의 마음도 차분해졌다.

‘인정하자.’

무리라는 카나의 말이 옳았다.

남자는 그녀보다 한 수 위였다.

그전까진 비등비등했고… 공격도 나름 잘 방어했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은의 검은 남자의 방어를 뚫지 못했고, 남자의 검은 다은의 방어를 뚫었다는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할까.’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시도해 봤다.

가장 많이 연습한 동작도, 가장 위력이 높은 스킬도 무위로 돌아갔다.

차라리 난공불락인 성이었다면 포기했을 텐데, 넘을 수 있을 듯 말 듯 애매하게 높은 탓에 더욱 감질이 났다.

‘카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다은은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사람, 카나를 떠올렸다.

카나와 대련할 때도 다은의 검은 카나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닿지 못한다는 표현은 틀렸을지도.

대련할 때마다 카나가 휘두르는 검을 방어하는 데 급급해서 공격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분명 막아냈다고 생각한 검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려 목을 노릴 때도 있었고, 가공할 속도의 찌르기가 날아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음. 역시 이건 무리네.’

대련을 복기하던 다은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다은에게 카나의 검술은 마술과 같은 것이었다.

사라졌던 동전이 컵 안에서 나타난 건 보이지만, 어떻게 하여 그 결과에 도달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다은은 카나가 했던 검술을 따라 하려고 해도 따라 할 수 없었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던 다은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속임수를 더 섞어 볼까? 아니면 수비를 포기하고 좀 더 공격적으로 해보는 것도….’

팽팽 돌아가는 다은의 머리가 금방이라도 펑-하고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생각이 많은 것 같군.”

빙글빙글 돌아가던 다은의 머리를 멈춰 세운 건 남자의 말이었다.

“이제 알겠다. 너는 사도라고 불리는 이들 중 하나군.”

“맞아요.”

“어쩐지 경지에 비해 검술이 형편없는 게 이상했는데 그래서였군.”

“…형편 없, 군요….”

…형편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카나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초면의 남자에게 난데없이 명치를 맞은 다은이 휘청거렸다.

정작 남자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왜 저러는 건가 하는 눈으로 봤지만.

의아함을 접은 그가 말했다.

“내가 한쪽 팔이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눈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죠.”

“그러면 내가 나의 왼편으로 오는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도 알겠군.”

“그야….”

전투가 익숙하지 않은 다은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내 약점을 노리지 않는 거지?”

“네?”

조금 전까지 그녀와 검을 섞은 사람이 저런 말을?

심지어 그 말이라는 게 왜 약점을 노리지 않느냐는 말이었던 터라 순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 다은이 멍청하게 반문했다.

“나를 동정하는 건가? 팔 하나가 없어도 나는 너보다 강하다. 그건 몸소 느꼈을 텐데, 동정을 베풀 여유가 있나?”

“아니, 동정을 베푼 건….”

남자의 말을 부정하려던 다은이 멈칫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 가끔씩 그의 왼편을 향해 검이 날아들곤 했다.

물론 그 공격도 막혔지만, 다른 곳을 노렸을 때보다 반응이 느렸다.

왜 그녀는 그의 비어있는 왼쪽을 노리지 않았는가.

고심하던 다은은 시야 한구석에서 이유를 찾았다.

장애인을 공격하는 거냐, 나, 락, 비겁하다 등 온갖 야유로 가득한 채팅창.

대부분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다은을 놀리기 위해 하는 말일 것이다.

그걸 알고 있지만.

“그랬구나.”

이건 처절하게 서로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사투지, 어린애들의 소꿉놀이도, 누군가의 장난거리 따위가 아니었다.

채팅창을 없애버린 다은이 검을 들자 남자도 그녀를 따라 자세를 잡았다.

이어지는 공방은 방금까지 이어졌던 공방보다 더 치열했으며, 또한 더 처절했다.

“크읍…!”

남자가 대놓고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짓쳐들어오는 검을 위에서부터 강하게 내리쳤다.

강한 힘에 검끝이 흔들리고, 균형이 무너진 다은이 바닥을 구르려던 찰나.

부웅-!

그대로 땅을 짚은 그녀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다리를 휘둘렀다.

왼팔이 있었다면 통하지 않았을 공격이었지만, 다은의 검을 쳐내느라 가지고 있는 공격 수단을 모두 쓴 남자에겐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피하거나, 맞고 버티거나.

남자의 선택은 회피였다.

무너진 자세로 내지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은의 발차기가 위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순수한 육체의 강함.

사도들이 가진 강점을 살린 공격이었다.

“이제야 좀 이해했나 보군.”

스스로의 강점은 살리고 적의 약점은 찌른다.

마침내 싸움의 대원칙을 깨달은 듯한 그녀의 공격에 남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소를 지운 남자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래도 아직 어설프다.”

약점이 있는 걸 알면서도 보완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다.

심지어 남자의 약점은 훤히 드러나 있어서 다은의 말처럼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챌 수 있으니.

그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남자의 검에 푸르스름한 마나가 덧씌워졌다.

쐐애애액!

“히익?!”

몸을 일으켰던 다은이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푸른 검기에 기겁하며 몸을 돌렸다.

핏-

미처 피하지 못한 검기의 잔흔이 그녀의 볼에 붉은 실선을 남겼다.

그녀를 스치고 지나간 검기가 뒤에 있는 나무를 박살 냈다.

깔끔하게 반으로 쪼개진 나무가 쿠웅-하고 땅에 몸을 맡기는 걸 본 다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검기는 반칙!”

“왜지? 너도 마나를 다룰 수 있지 않나?”

“못 해! 그런 건 못 한다구요!”

“그런가.”

다은의 외침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검을 들었다.

“잘 됐군.”

“…뭐, 뭐가 잘 됐다는 거예요?”

“검기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니까.”

“…에?”

남자는 다은의 의문에 푸른 검기 다발을 쏟아내는 것으로 답했다.

“꺄아아악!”

쏟아지는 검기 다발에 다은이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검의 거리가 곧 검사의 거리라고 하지만, 검에 마나를 두를 줄 아는 검사라면 얘기가 달랐다.

물론 검기를 쏘아 보내는 주체는 검이니만큼, 파훼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 다은은 계속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빈틈…!”

그럼에도 승기를 놓지 않은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기회를 노렸으나.

“어림없다.”

“흐윽!”

이미 그녀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휘두르는 검을 급하게 막아냈다.

“거기까지.”

그녀의 몸에 붉은 실선이 몇 개 더 그어졌을 무렵, 보다 못한 카나가 끼어들어 싸움의 끝을 고했다.

“셀린.”

“알았어요.”

다은을 포근하게 감싸안은 신성력이 생채기 사이로 스며들자 새살이 돋아났다.

다은의 몸에 있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피부에 말라붙은 붉은 핏자국만이 그녀가 상처 입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은이 한숨 돌리는 사이 작은 발걸음 소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땠어?”


“힘드네….”

진심을 한가득 담은 말을 토해내며 주저앉은 다은.

카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내가 무리라고 했잖아.”


“그러게. 카나 말 들을 걸 그랬어.”

다은은 남자가 자신을 상대하며 한 번도 전력을 보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숨소리만 조금 흐트러진 걸 보면 마지막에 쏟아내던 검기의 폭풍도 그의 전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구나.

진이 쭉 빠진 다은이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맞다. 먼지….’

먼지가 묻는 걸 걱정했던 것도 잠시, 만사가 귀찮아진 다은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땅에 뉘었다.


“어땠어?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지지 않았어?”


“달콤한 거짓, 씁쓸한 진실. 어느 걸 원해?”


“나, 뭔가 이 대화 예전에도 했던 거 같아.”

그리고 썩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푸흐흐.”

떨떠름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푹 숙인 그녀의 고개 위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많이 좋아졌어.”

무심코 고개를 든 다은의 눈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과 둥글게 휜 눈꼬리가 들어왔다.

무구한 웃음을 짓는 분홍색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다은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 훈련 시간은 늘리지 않아도-”


“훈련을 더 했으면 이길 수 있었을 거야.”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추욱.

다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서툰 손길로 그녀를 쓰다듬은 카나가 앞으로 나섰다.

“오래 기다렸지?”

“음.”

싸움이 끝난 지 얼마 쉬지도 못하고 연전을 치르게 되었지만 남자의 얼굴엔 그다지 억울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소소하게 소모된 체력은 이미 회복되었고, 검기를 줄기차게 뽑아낸 것치고 마나도 많이 소모되지 않았다.

까딱.

카나가 검을 까딱이는 걸 본 남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고양감에 휩싸인 남자의 몸은 만전, 그 이상의 기량을 발휘했다.

다은과 싸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

첫 공격이 막힘과 동시에 다음 공격이 이루어졌다.

머리, 가슴, 다리, 그리고 다시 머리.

‘세상에….’

차마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오가는 검들을 다은은 넋을 잃은 채 구경했다.

살벌하게 날아드는 맹공에도 카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받아냈다.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시끄럽게 귓가를 때렸다.

카나는 공격을 받아내기만 할 뿐, 주로 공격하는 사람은 외팔의 검사였다.

두 다리로 굳건하게 땅을 디딘 남자가 소녀의 목을 향해 검을 내둘렀다.

단 한 걸음.

오른발을 뒤로 빼며 몸을 비트는 것으로 피해낸 카나가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팔을 회수한 남자가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곧바로 공격을 멈춘 카나가 검을 세로로 들었다.

횡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막을 때 하는, 정석적인 방어.

스르르-

“…!”

기대했던 날카로운 검명 대신 깃털이 스치는 듯한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온 힘을 담아 휘두른 검이 검신을 타고 흐르더니 아무런 저항 없이 바닥에 메다 꽂혔다.

가로로 이어지던 힘의 방향을 강제로 수직으로 바꿔버리는 신기에 가까운 기교에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남자의 머릿속에 아까 전 다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팔을 땅에 짚고, 균형을 잃은 상태 그대로 몸을 돌리며 다리를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반격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얍.”

“커헉!”

균형을 잃은 그의 등에 앙증맞은 기합과 어울리지 않는 강한 충격이 내리꽂혔다.

안 그래도 무너지던 자세에 박차를 가하는 충격에, 남자는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땅에 처박혔다.

스릉-

한쪽 팔로 다급하게 일어나려던 그의 목덜미에 차가운 검 끝이 들이밀어졌다.

등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의 감촉을 느끼며 남자는 검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졌다.”

싸움의 승패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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