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6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의 스토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메인하고 서브.
여기서 메인 퀘스트 쪽은 그리 엄청난 스토리라고 할 수는 없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악신들을 주인공이 다시금 봉인한다는 전형적인 용사물 계열이라서.
개인적으로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무난한 스토리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오히려 여러 서브 퀘스트 쪽이었지.
각 캐릭터들과 관계된 이야기라던가 어느 지역에 숨겨진 스토리라거나 특정 아이템과 관계된 이야기라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결국에 서브 퀘스트는 서브 퀘스트일 뿐.
그것들을 클리어 하건 말건 세상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메인 퀘스트는 수행하지 않으면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분명하게.
그들이 완전히 부활할 경우에 세상이 얼마나 엉망이 될지는 모른다.
메인 퀘스트의 실패는 곧 게임오버니까.
그 후의 이야기가 어찌 되는지는 주인공을 잃어버린 세계의 주민들만이 알 일이다.
내가 그를 어찌 알겠는가.
다만 확신하는 건 악신들이 부활하는 게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 거라는 것.
아르마디의 사도인 내 입장에서는 더더욱.
지금도 외부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사사건건 아그라가 시비를 거는데 걔가 완전히 부활해봐라.
무슨 꼴을 당하겠는가.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메인 퀘스트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다.
뭣보다 말야.
[아카데미 광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십시오.]
[보상 : ???]
우리 허접 주신님께서 그걸 원하시는 것 같거든.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런 메시지를 보내주셨다니까?
당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던 간에 나만 괴롭히면 족한 거 아니냐 싶었는데 그래도 신경을 쓰긴 하는 구나?
아니면 이걸로 또 날 어떻게 엿 먹일 지에 대해 구상을 하고 있는 건가?
고민이 되긴 했지만 어차피 하기로 마음먹었던 일이다.
보상까지 주겠다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난 아침에 준비를 마치자마자 혼자서 거리로 나섰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칼을 데리고 왔겠지만 그 녀석 나 때문에 아카데미의 일이 많이 밀린 것 같더라고.
일단 명목상 교수가 된 칼이지만 그래도 교수는 교수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정해져 있는데 칼은 그걸 다 미뤄두고 내 요구를 최우선시 한 것이다.
지극히 칼 그 녀석다운 판단이었지만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어쨌든 교수로써 일을 해야 계속 이 곳에 머무를 수 있지 않은가.
‘알른 영애. 부디 이 녀석이 제 일은 다 끝마치게 해주십시오.’
전투학 교수인 안톤이 고개 숙여가며 저리 이야기를 하는데 그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서 칼에게 일을 끝마치라고 명령했다.
어차피 오늘 있을 일은 메인 퀘스트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
주인공이 있든 없든 간에 아카데미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해결하는 일이다.
거기에 나라는 사람 하나가 끼어들었다고 해서 무어가 달라지겠는가.
설령 위험이 생긴다 하더라도 바로 옆에 도와줄 사람들이 가득할 텐데 칼이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있겠어?
그렇게 생각을 하며 아카데미의 광장에 미리 도착한 나는 슬며시 광장을 훑어보았다.
항시 여기에 대기하는 경비병들도 그대로고.
주말마다 나와서 봉사하는 신관들도 있고.
주말에 거리에 나와서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 없는지 순찰하는 아카데미 교수도 존재한다.
이 정도 전력이면 어느 악신의 사도가 습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가뿐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
어디 보자. 메인 스토리의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 분명 2시에서 3시 사이였지?
그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다른 할 일을 해두고 올까.
우선은 알새틴을 만나러 가자.
새로운 방패를 구해야 하니까 말야.
*
“드워프 대장장이가 만들어 낸 방패를 구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시지요?”
‘네. 맞아요!’
“정확해. 정보팔이.”
지난번의 내기로 돈을 얻어낸 날부터 난 어떤 방패를 구하면 좋을 지를 고민했다.
어차피 2학년이 되기 전에 종결급 방패를 구해 놓을 예정인데 백금화 10개를 꼬라박을 이유는 없잖아?
이제 좀 있으면 슬슬 돈 쓸 곳이 생길 테니까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게 낫지.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 바로 판타지 세계관 종족 중 하나.
망치질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 끝장나는 드워프가 만든 방패를 구하는 것이었다.
드워프가 직접 마법처리까지 끝낸 방패라면 1학년 내내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적절한 가격을.”
‘여기요. 비싸게 쳐드렸어요!’
“여기. 정보 팔이. 이거면 아무리 양심을 팔아먹은 장사치라도 부족하단 소리는 안 하겠지?”
알새틴의 앞에 백금화 한 개를 밀어 주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비싸게 쳐 준 것이었다.
보통 드워프가 만든 방패를 금화 7개로 구할 수 있단 걸 생각해보면 금화 3개를 유통비로 쳐 준 셈이니까 말야.
아무리 알새틴이라 하더라도 이걸로 불평을 할 순 없을 걸?
“최대한 빠르게 구해드리겠습니다.”
일주일 내에 구해 놓겠다는 확언을 듣고서 가게 바깥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으음. 이렇게 된 이상 아카데미 거리 여기저기를 둘러보도록 할까?
여태까지 너무 바쁘게 사느라고 편하게 쉰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어디부터 가볼까.
주인공과 한 히로인이 비극적인 이별을 겪었던 다리 위에서 싸구려지만 맛있단 이야기를 듣던 꼬치나 먹을…
어?
뒷골목의 거리를 걷던 중에 익숙한 옆모습이 내 눈에 뛰었다.
평소에는 잔뜩 컬을 집어넣은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서 넘겼고,
옷도 평소에 입지 않은 하얀색 계열을 입은데다가,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가면까지 썼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저 복장 소울 아카데미 게임 내에서 조이가 변장을 할 때마다 입는 옷인 걸.
조이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쟤 원래 같았으면 지금쯤 귀족 영애들이 모이는 사교 자리에서 하하 호호 웃고 떠들 시간 아닌가?
그것이 의아해 고갤 갸웃거리던 나는 조이가 허망하게 올려다보고 있는 가게의 간판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아. 조이. 빵 먹으러 온 거였어?
여기도 괜찮은 곳이긴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빵집은 따로 있지 않아?
아직 아카데미 초반이라서 여기저기를 다니고 있는 건가?
‘조이!’
“얼빵 영애. 거기서 뭐 해?”
내 목소리에 조이는 버릇처럼 고개를 돌렸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다급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 이미 정체를 들킨 셈이었지만 조이는 이를 수습할 수 있다 생각하는 지 내 말을 못 들은 체 하며 내 반대편으로 걸었다.
‘조이. 이미 다 들켰어요.’
“얼빵 영애. 설마 아직 안 들켰다고 생각하는 거야? 공작 영애치고는 너무 허접하고 멍청한 판단 같은데.”
그녀의 등 뒤에다 대고 소리쳤더니 조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조이가 평소 말하는 것보다 한참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얼빵 영애? 그게 누구죠?”
‘파핳.’
“푸훗.”
<…큭.>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아. 진짜. 목소리를 바꾸고 싶은 건 알겠는데요 얼빵 영애.
변조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목소리가 널뛰고 있는 데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지금 할배까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고요.
내 웃음소리가 커질 때마다 어깨의 부들거림이 커지던 조이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가면을 벗었다.
“…어떻게 아신 건가요?”
‘뻔히 보이는 걸요.’
“얼빵 영애. 뻔히 보인다고. 네가 얼빵 얼빵 하면서 걷는 게 말야.”
“그런 식으로 걷는 사람이 어디있나요!”
조이는 그리 소리를 치고는 얼굴을 쓸어 내렸다.
“알른 영애님.”
그리곤 특유의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빵을 먹기 위해서입니다.”
‘알아요. 조이가 이상한 짓을 할 리 없잖아요?’
“알아. 얼빵 영애. 넌 이상한 짓을 벌일 용기가 없는 허접이잖아.”
내가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자 조이가 눈을 크게 떴다가 입을 우물거렸다.
이렇게 쉽게 믿어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하긴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모든 사정을 아는 나라서 그렇지 입 가벼운 영애였으면 난리가 났을 걸.
상황이 무척 이상하긴 하잖아. 파트란 공작 영애께서 변장을 한 채로 뒷골목을 돌아다녔다니.
가십거리로 소모하기에 너무 좋은 소재라고.
“정말요?”
‘네. 정말이에요.’
“얼빵 영애는 은인도 못 믿는 거야? 의심 많은 겁쟁이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뇨. 아닙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조이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저 혼자 고개를 젓더니 이내 턱을 끄덕였다.
과연 조이는 나란 사람을 믿는 걸까.
내가 소문을 퍼트릴 수 있는 인맥이 없다는 걸 믿는 걸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전자겠지만 후자도 사실이란 말이지.
내가 다른 사람한테 뒷담화를 한다 쳐도 누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겠어.
기껏해야 칼 아닐까?
‘어쨌든 조이. 조심하세요.’
“얼빵 영애. 자꾸 얼빵한 행동 하지 마. 자꾸 그러다 질 나쁜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
“…제가 알른 영애께 이런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조이는 내 말을 듣고는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확실히 조심성 없이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조이. 잃을 게 많은 사람하고 잃을 게 없는 사람의 행동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잖아?
<허? 잠깐. 여아야. 악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풀이 죽어 보이는 조이에게 이 빵집이 일요일마다 쉰다는 걸 알려주려던 순간에 할배가 목소리를 냈다.
뭐야. 벌써 이벤트가 시작되려는 거야?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잖아.
사도 니네들 왜 이렇게 부지런한 건데.
우리 허접 주신이 그거 봐야 보상을 준다고 했단 말야.
얘가 평소에 무능하긴 해도 보상 하나는 제대로 챙겨 줘서 꼭 받고 싶은데.
조이한테 수고하라고 인사한 다음에 바로 광장으로 뛰어 가야 하나.
‘어디인데요?!’
아직 습격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그 전에 도착할 수 있을…
<여기로 오고 있다.>
여기? 이 뒷골목이요?
왜요?
걔가 마물을 이끌고 습격하는 건 광장에 있는 신전이잖아요.
대체 뭘 노리고 여기에.
<도망쳐라! 기운이 짙은 자다. 지금의 너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
생각을 하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조이를 내버려 두고 갈 순 없으니까 일단 한 쪽 어깨에 업은 다음에 광장 쪽으로.
“아르마디의 기운이 느껴져서 왔다만. 자그마한 꼬맹이구나.”
아르마디.
악신들이 가장 증오하는 그 이름.
그리고 지금은 나의 주신인 자.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허접 무능 쪼잔 쓰레기 주신은 하여간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니까.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메이스를 꺼내 크기를 키우려 한 순간 내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그라가 주시하고 있느니 뭐니 하는 걸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버텨라]
[아카데미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올 때까지 버텨라]
놀랍게도 그건 허접 주신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