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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7

홍염 기사단에는 신입이 들어오면 으레 묻는, 전통에 가까운 질문이 있었다.

“넌 왜 기사단에 왔냐?”

그렇게 물으면 기상천외한 답을 하는 이도 있었고, 때론 다른 사람과 겹치는 답을 하는 이도 있었으며,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넘기는 이도 있었다.

세 번째 부류의 말로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의지를 잃고 제 발로 나가는 게 대다수고, 최악의 경우엔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빠르게 강해지고 가장 악착같이 버티는 부류는 ‘복수를 위해서’라고 답한 이들이었다.

부모, 형제, 연인… 때로는 친한 친구를 잃은 이들.

강렬한 계기가 있는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참고 이겨내곤 했다.

그런 이들을 봐왔던 나는 사람에게 있어 목표와 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각성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았고, 그런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음, 어쩌면 단순히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 걸지도.

아무튼, 외팔 검사 또한 그런 계기를 겪은 사람이었다.

동료를 잃고, 왼팔을 잃은 후 강해지겠다고 결심한 인물.

그리고 그에게 계기를 제공한 건 나였다.

‘…그런데 왜 싫어하지 않는 거지.’

내가 그의 처지였으면 좋게 볼 수 없었을 거 같은데.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나도 그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대련이 한 차례 끝난 후로도 나는 남자와 몇 번 더 검을 섞었다.

“역시 아직 닿기엔 무리였군. 그래도 고맙다.”

힘을 빼고 검을 맞대어 준 게 꽤 도움이 됐는지, 마지막 대련이 끝났을 때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눌한 그라닉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남자가 서서히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다은이 말했다.

“대체 뭐였던 거지…?”

“글쎄.”

나로서는 답해 줄 수 없는 의문이었다.

적으로 상대했던 이가 복수심이나 공포가 아닌 감정으로 나를 대하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

단지, 홀가분하게 떠나는 모습이 어쩐지 인상 깊어서.

나는 그의 모습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 * *

“정들었는데….”

푸르릉-

다은이 아쉬운 내색을 숨기지 않은 채로 말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그녀에게 쓰다듬을 받던 말이 투레질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어.”

오르도에서 성국까지, 그리고 성국에서 대륙의 서쪽, 마족의 영토와 맞닿아 있는 도시까지.

몇 주 동안의 여정을 함께 했으니 정이 들 만도 하지.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말을 이 도시에 놓고 가야만 했다.

정을 준 말이 마기에 침식되어 마물이 되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렇다고 셀린이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겠지….”

시무룩하게 답한 다은이 마지막으로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은 후 손을 뗐다.

그렇게 눈물 겨운 이별을 한 우리는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마족의 영토와 맞닿아 있다는 건, 상시로 마물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몸에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사도들도 꽤 많았고.

나는 이쪽을 향하는 시선을 모르는 척 흘려넘겼다.

“살 것만 빠르게 사서 떠나자.”

“어? 여기서 쉬지 않고 바로 갈 거야?”

“응.”

우리가 지금 있는 이 도시의 분위기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협과 맞서 싸우며 살아가는 이들이니 그럴 수밖에.

혹자는 내 말을 듣고 ‘그러면 다른 도시로 이사가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런 도시라 해도 애써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서 새로운 터전을 일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도시를 거점으로 삼은 용병들도 목숨을 반쯤 도외시 할 정도로 돈이 급한 사람들이고.

아, 물론 사도들은 예외야.

아무튼….

도시가 이런 분위기인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해하는 것과 여기에서 묵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라서.

도시 입구부터 마장까지의, 멀지 않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주변에서 크고 작은 마찰이 일어나는 걸 몇 번이나 본 터라 쉬고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기서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닐 것 같아서 말이지.

와장창!


“~~~~~!!”


“~~! ~~~~!”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판대가 부서지며 과일이 날아왔다.

텁.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사과를 잡아챘다.

상태는… 응, 나쁘지 않네.

먹음직스럽게 익은 사과를 한입 깨물자 아삭한 과육과 함께 상큼한 과즙이 흘러나왔다.

너무 크게 깨문 탓일까, 미처 입에 들어오지 못한 과즙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려서 손등으로 닦아냈다.

으, 끈적거려.

나는 어디 닦을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옆에서 난 소란에 정신이 팔린 다은의 옷자락에 슥 문질렀다.

보아하니 과일을 팔던 상인과 용병 사이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무력으로 싸우면 당연히 용병이 이기겠지만,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서 칼부림을 할 리 없었다.

그러니까, 상인과 싸우는 저 용병은 제정신이 박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스릉!

용병이 번들거리는 도끼를 손에 쥐었다.

분노에 이성을 잃은 용병의 눈도 그가 든 도끼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어, 미쳤어?!”


“야! 잡아, 잡아! 빨리 이 새끼 잡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그를 지켜보던 주변 용병들이 그를 잡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그 덕분에 그의 행동은 미수에 그쳤지만, 주변 상인들의 시선을 보건대 끌려간 용병이 이 도시에서 원활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런 사과 하나를 사려고 해도 평균보다 더 값을 치러야 겨우 살 수 있지 않을까.

“정말 평화롭네.”

“…평화?”

당연히 반어법이지.

다은이 나를 황당하게 보거나 말거나 사과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사과는 여전히 맛있었다.

“카나, 그 사과.”

“응?”

사과가 왜?

야금야금 베어먹던 사과를 그녀에게 들어 보였다.

“저니도 먹고 싶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거, 아까 날아온 거 아니야? 그러면 값도 안 치렀겠네?”

“….”

“값은 치르고 먹어야지. 그냥 먹으면 어떡해!”

자랑스럽게 들었던 사과를 슬그머니 뒤로 숨겼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은 다은이 뚜벅뚜벅 상인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굴러온 사과를 제 동생이 주워 먹어버렸어요. 여기 사과값….”


“아이고, 그냥 지나쳤어도 몰랐을 텐데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괜찮으니 아무거나 주워 먹지 않게 동생한테 주의를 주세요. 길거리에 떨어진 걸 함부로 주워 먹다가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특히 이런 곳에서는….”


“이런 곳…?”


“아가씨. 아가씨는 이 도시에 처음 온 것 같은데, 맞죠?”


“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 난리통에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사과 한 알 값을 치르겠다고 오는 사람은 이 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보통 횡재했다고 생각하고 입을 닫죠.”


“헤에…. 그렇군요.”

찌릿.

상인과 대화하던 다은이 나에게 따가운 눈길을 보냈다.

나는 슬금슬금 셀린의 뒤에 모습을 숨겼다.

셀린은 어머나, 하고 난처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수녀복 자락으로 나를 가려주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거지 몰래 먹을 생각은 없었다고….

“이 도시 밖으로 나가서 조금만 가면 마족의 영향권에 들어가요.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도시 밖에 잘 안 나가요. 나간다 해도 내륙 방향으로 가지. 아, 용병들은 빼고요.”


“마기 때문에 그런가 보군요…. 이 도시는 괜찮아요?”


“네. 성국에서 온 사제와 수녀분들이 있으시거든요. 그분들이 힘써주신 덕분에 도시 안은 나름 안전합니다만….”

상인이 별안간 목소리를 낮췄다.

“…간혹 싸게 파는 척하면서 마기에 오염된 걸 파는 놈들도 있어서 조심해야 해요. 특히 먹을 건 더더욱이요.”


“아… 그러면 길거리에 떨어진 걸 함부로 주워 먹지 말라고 하신 게…?”


“네. 마기에 오염된 걸 먹었다가 중독되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요.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용병이 떨어뜨린 걸 먹었다가 큰일 날 수도 있고요. 여기 용병들은 다른 곳에 있는 용병들보다 거칠거든요.”


“아하….”

고개를 주억거린 다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 연신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셀린 뒤에 숨은 나를 발견하고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상인과 나눈 대화를 전해 주었다.

“알겠지? 카나. 맛있어 보인다고 해서 아무거나 입에 넣으면 안 돼.”

이야기를 마친 그녀가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내 소감은-

“…괜찮은 거 아니야?”

…뭐가 문제지?

라는 심정이었다.

마기에 조금 오염된 걸 먹었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진 않던데.

용병과 시비가 붙어도 이길 자신 있고.

“…카나!”

내 대답에 다은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이어서 그녀의 입에서 잔소리가 속사포처럼 튀어나왔다.

마기가 없다고 해도 길거리에 있는 걸 주워 먹으면 위생적으로 좋지 않다느니,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느니….

“으… 안 먹을게. 안 먹으면 되잖아.”

말 한마디 잘못한 대가로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들은 나는 백기를 들었다.

길거리에 떨어진 걸 먹은 것도 아니고,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애초에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걸 주워 먹을 리가 없잖아.

예전에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었지만 말이야.

“약속이야.”

“유치해…. 아, 알았어.”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것을 보고 투덜댔다가 다은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보고 재빨리 손가락을 걸었다.

이 상황에서 잘못한 건 나였기에, 순순히 그녀의 손에 끌려가 상인에게 고개를 숙이자 그는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그럴 수 있죠. 여기, 체리 하나 줄까?”


“고마…. 음… 고마, 워.

졸지에 과일이 하나 더 생겼다.

먹을 거냐는 의문을 담아 다은을 올려다보았지만, 상인과 이야기하느라 바쁜 그녀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셀린한테 내미니 그녀도 가볍게 웃으며 거절했다.

별수 없지. 내가 다 먹는 수밖에.

얌.

“-그런데 이 도시에는 어쩐 일로 왔어요? 귀하게 자란 아가씨들이 올 만한 곳은 아닌데.”


“아하하, 저도 나름 용병인걸요.”


“용병? 아하, 검을 차고 있는 걸 못 봤네요. 뭐, 여기가 용병들이 돈 벌기엔 나쁘지 않은 곳이죠. 그라시스 시절엔 지원금이고 뭐고 없었는데, 멸망한 후로는 마물 퇴치에 필요한 지원금이 꼬박꼬박 나오니….”


“그라시스 사람이셨어요?”


“아, 아뇨. 저는 다른 왕국 출신이에요. 돈벌이를 찾다보니 여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됐죠. 보시다시피 썩 형편이 좋진 않지만요.”

부서진 가판대를 가리키며 상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돈 버는 것도 좋지만,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얼른 돌아오는 게 좋을 거예요. 괜히 욕심부리다 골로 가는 사람 여럿 봤거든요.”


“음… 충고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돈 벌러 온 건 아니라서요.”


“엥? 그럼 왜 이런 곳에….”


“마족들의 마을에 가려고요.”


“…마족들의 마을?”

다은과 평이하게 대화를 나누던 상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혐오감을 여실히 드러낸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 ‘쓰레기장’을 간다고요?”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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