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8
무작정 내달리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 조이는 자신의 앞에 떨어진 가면을 보고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도망쳐야 해.
그러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괴한에게 살해당할 테니까.
조이는 그 괴한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그 사람이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이해했다.
그녀는 아직 배우고 있는 단계이긴 하지만 마법사다.
다른 이들이 펼치는 마법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추측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그 괴한이 펼치는 마법은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주변과 이 골목을 차단한 마법은 감히 조이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고위의 것이었고,
심지어 그가 장난스럽게 던진 검은 구체는 조이가 전력을 내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자는 재앙이었다.
결코 조이와 루시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래서 조이는 도망쳤다.
살기 위해서.
알른 영애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연금술사를 상대로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던 그녀이니 이번에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얼마 안 가 아카데미에서 구원이 올 테니 아무런 문제도.
정말로?
소란이 일어나는 반대편으로 향하던 조이의 발이 멈췄다.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해?
답은 분명했다.
아니. 그럴 리가.
알른 영애가 천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허나 그렇다 한들 알른 영애도 조이와 같은 학생일 뿐.
그런 괴물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알른 영애라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거다.
모든 걸 알면서도 그저 조이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자신을 희생한 거겠지.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험할 뿐 속은 그 누구보다 깊은 사람이니까.
예전의 루시 알른이 어떤 사람이었던 간에 지금의 루시 알른은 그러했다.
조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이를 믿는다고 생각하며 도망친 것은 그녀의 추악한 마음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강자를 마주하는 게 무서워서.
또 다시 악몽에 갖히는 게 싫어서.
죽는 게 두려워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버린 것이다.
무어가 은인인가.
무어가 감사인가.
루시 알른이 꿋꿋이 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 그녀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뒤로 도망치고 있지 않았나.
가만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지켜보던 조이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내가 간다고 도움이 될까? 아니겠지.
개미 한 마리가 두 마리로 늘어난다 한들 인간에게 위협이 되겠는가.
알른 영애가 여태까지 버티고 있을까? 모르겠어.
그렇지만 루시 알른이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조이는 생각했다.
상대는 괴물이다.
그 자가 아무리 힘을 빼고 루시를 상대한다 한들 루시가 버틸 수 있겠는가.
늦었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저 피웅덩이의 크기를 늘리러 가는 도중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조이는 달렸다. 자신이 여태 도망쳤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겨우… 이 정도야?…♡ 허세 멀대?♡”
그 끝에 조이가 마주하게 된 것은 여전히 두 다리로 서 있는 루시의 모습이었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뒤섞여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얼굴.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옷가지와 상처가 없는 곳보다 있는 곳이 더 많은 몸.
서 있는 것조차 기적처럼 보이는 모습을 한 채 여전히 루시는 얄미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당신은 아픔을 몰라?
공포라는 단어를 몰라?
죽음이라는 말을 잊고서 살아?
왜 서 있는 거야?
어떻게 서 있는 거야?
뭐가 당신을 서 있게 만드는 거야?
“질기군.”
괴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 위에 마법진이 그려진다.
여전히 조이는 저 마법이 어떤 것인지 추측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저 괴한과 그녀 사이에 있는 격차가 너무도 컸으니까.
그렇지만 저 마법이 위험한 것이라는 것만큼은 이해했다.
알른 영애가 버틸 수 있을까?
신성으로 만든 방패는 희미해졌다.
메이스를 들고 있는 팔은 부들거린다.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
무리겠지.
조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행동했다.
이전에 죽을 위기를 겪고 난 후 필사적으로 연습했던 대로 마법을 사용했다.
파이어볼.
기초적이고 원시적이지만 그만큼 위력적인 공격.
조이는 이를 쏘아내고 나서 마법이 착탄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저 정도로 초월적인 마법을 사용하는 자다.
당연히 방어를 할 게 분명했다.
다만 자신의 마법이 괴한의 집중력을 조금이라도 흐트러트리길 바라며,
그를 통해 알른 영애에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길 바라며.
조이는 마법을 사용했다.
허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당연히 막히리라 생각했던 화염구가 너무나도 어이없이 괴한의 얼굴에 착탄한 것이다.
그에 따라 괴한이 준비하던 마법이 흐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고갤 돌린 알른 영애의 눈길에 조이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접한 상대네요!”
*
조이. 넌 역시 연기는 하면 안 되겠다.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잖아.
하. 진짜. 왜 돌아 온 거야.
너 하나 살리려고 내가 지금 똥꼬쇼를 하고 있는데 이러면 곤란하다고.
혹시 조이 민폐 히로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라도 있어?
아니면 내 계획을 망쳐서 나한테 매도당하고 싶은 거야?
얼빵 영애한테 이상한 속성이 더 생기는 건 좀 그런데.
<저 아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었구나.>
‘그러게요.’
그렇지만 조이 때문에 잠시나마 숨 돌릴 여유가 생긴 건 사실이다.
그 전까지는 이런 농담을 생각할 틈조차 없었거든.
얻어맞고, 날라가고, 피부가 불타고. 몸에 구멍이 생기고.
이야. 용케도 버텼네.
허접 무능 쓰레기 좆밥 주신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 인간이 이름이 들어간 스킬은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
아르마디의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오래전에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을 테니까.
“하.”
조이의 마법이 일으킨 연기가 잦아들자 나크라드의 붉은 눈이 어딜 향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조이를 향해 있었다.
“제 발로 찾아왔구나.”
안 되지.
어디서 다른 데를 보고 있는 거야.
아무리 조이가 매력적이라지만 아직 학생이라고.
이 중2병 페도 새끼야.
이 세계에 등장인물은 모두 다 성인입니다. 라는 문구라도 달려있는 줄 아냐?
“자기 힘으로 굴복시킬 자신이 없나봐?♡ 허접하긴♡ 좆밥 악신을 믿는 좆밥은 어쩔 수 없다니까♡”
지금 내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은 전력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칼이 버티기 힘들어 할 정도다.
이미 냉정을 잃어버린 나크라드에게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쓰레기가.”
나를 향해 달려드는 나크라드를 보며 나는 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과 공방을 어느 정도 나누다보니 이 싸움에 익숙해졌다.
전투라기보다는 시간끌기라고 함이 옳은 것이지만 어쨌든.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송곳은 모두 막아낼 수 없다.
치명상이 아니라면 무시한다.
피부가 꿰뚫릴 때마다 정신이 나갈 것처럼 아프지만 죽는 건 아니니까.
육탄전으로 공격하는 건 최대한 방패로 막아낸다.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막아내나 안 막아내나 날아가는 건 똑같은데 그래도 직접 얻어맞는 것보다는 방패로 맞는 게 낫더라.
그리고 검은 구체는.
뭐 어쩌겠어.
이미 방벽을 형성할 힘이 없는 상황인데.
그럴 마력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아르마디의 자비를 써서 좀비마냥 일어서는 게 낫지.
그나마 조이가 합류하면서 조금이지만 여유가 생겼다.
중간중간마다 조이가 마법으로 나크라드의 움직임을 막아주는 게 꽤 유효하다.
나한테 눈이 멀어버린 나크라드는 조이의 공격을 신경 쓰지 못해서 원래 같았으면 피하거나 없애버렸을 공격을 허무하게 맞아주더라고.
키야. 이게 탱커지.
안 그래?
묵직한 맛이 있어야 하는 탱커치고는 너무 데굴데굴 구르는 거 같긴 한데.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이제는 방패를 형성할 마력도 없다.
메이스도 쥐고 있다기 보단 걸치고 있단 느낌이다.
이래서 방패는 실물이 좋다니까.
아. 실물 방패였어도 지금쯤 박살이 났으려나.
<앞으로 얼마나 더 일어날 수 있겠느냐.>
‘두 번 정도?’
그 이상은 무리일 것 같은데.
솔직히 지금 일어서는 것도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억지로 일어나는 거라.
육신의 문제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의 문제도 그렇다.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포는 댐을 무너트리고 나를 집어 삼키기 위해 이빨을 들이밀고 있으니까.
육신이 무너지는 순간 마음도 완전히 무너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될 게 분명해.
그러니까 운 좋으면 두 번.
아니면 한 번.
3분이라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긴 걸까.
타임 어택 같은 거 할 때마다 3분이 왜 이렇게 짧은 거야?! 같은 소리를 했던 거 같은데.
혹시 허접 무능 사디 주신이 나 괴롭히려고 시간을 멈추고 있는 거 아냐?
그 놈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거 같기도 해.
나한테 버프 주면서 급한 척 한 거는 연막이었던 거지.
이거 말이 되네.
정말 주신이란 새끼가 급한 거였다면 이딴 버프밖에 안 줬겠어?
그렇게 점차 아르마디에 대한 의심이 차오르고 있을 무렵.
주변을 감싸고 있던 결계에 금이 가더니 유리창이 깨지듯 부서지며 나크라드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눈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아래에 선 나크라드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망한 놈의 눈을 보고 있자니 한 마디를 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허접 새끼♡”
나를 괴롭히는 데 정신이 팔려서 지 결계가 부서지고 있는데 아무 눈치도 못 챘네?
응?
여자애 하나 괴롭히는 게 그렇게 좋았어?
왜곡된 취향에 심취해서 제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다니. 변태가 따로 없네.
안 그래?
“이걸 노렸나.”
이제와 눈치챈다 한들 아무것도.
“어쩔 수 없군.”
나크라드가 손을 치켜들자 그 위로 마력이 집약된다.
마법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이.
“굴복시키지 못한 건 아쉽다만 방해가 될 건 없애고 가야겠지.”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고 가시겠다?
악역 새끼들이 하는 짓은 항상 비슷비슷하다니까.
저걸 막아낼 수는 없다.
나크라드가 장난삼아서 던지는 마법에도 죽음의 위협을 겪어야 했던 나다.
이미 한계에 달한 상태에서 저걸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니까 지금은 완벽하게 게임 오버를 당할 상황이라는 거다.
본래라면 겁에 질려서 바닥에 주저앉아야 할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알른 영애!”
‘괜찮아요.’
“괜찮아. 얼빵 영애.”
조이의 앞을 가로 막고서 선다.
조이를 살리고 나는 죽겠단 생각은 아니다.
둘 다 죽을 생각도 아니다.
나는 배드 엔딩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인간이라서 말야.
여운이 남는 엔딩은 사양이라고.
“죽어라.”
마법을 사용하며 그리 소리치는 나크라드를 보면서 나는 감사함을 느꼈다.
만약에 저 녀석이 물리적으로 내 목을 꺾어버릴 생각이었다면 얌전히 죽어야 했을 텐데.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바람에 방법이 생겨나 버렸네?
나크라드. 그거 아냐?
소울 아카데미 1학년 던전의 80층 보스는 입장하자마자 즉사기 마법을 갈긴다?
그래서 그 놈을 공략하기 위한 제일 편한 방법은 그걸 무효화 시키고 그대로 되돌려 주는 거야.
마법을 되돌려주기 위한 수단은 이미 사용해 버렸지만.
마법을 무효화하기 위한 수단은 여전히 내 손아귀에 들려 있거든.
‘절 믿어요.’
“날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