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
괴한의 손에 집약된 마력을 본 순간 조이가 가장 먼저 생각한 단어는 죽는다. 는 것이었다.
막아내겠다. 파훼하겠다. 받아치겠다.
그런 단어들은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저 거대한 마력에 어찌 대항을 하겠는가.
복잡한 술식도 드높은 기술도 없었지만 괴한의 마력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폭력이었으니.
조이는 그를 앞에 두고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루시는 달랐다.
그녀는 괴한의 마력을 보고도 웃음을 지으며 조이의 앞에 섰다.
그녀의 상태는 처참했다.
피범벅이 된 육신도.
서 있는 것조차 한계인 듯 떨리고 있는 팔과 다리도.
평소엔 여유롭게 만들어내던 방패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마력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웃었다.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일어나서는 괴한의 손에 집약되는 마력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말했다.
“얼빵 영애.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가요.
저 마력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둘 다 죽는 거에요.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이 자리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거라고요!
그런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조이가 루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수히 많았지만.
“날 믿어.”
그 모든 투정들은 그 다음에 루시가 내뱉은 한 마디에 사그라들어 버렸다.
보통이라면 저 단어를 단순히 허세라 생각했을 것이다.
안심을 시키기 위해 무작정 내뱉은 단어라 여겼을 거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루시 알른이 내뱉은 그 말은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워서.
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의 뒤를 바라봤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괴한이 자신의 마법을 집어 던졌다.
이 뒷골목 전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다 마음을 먹은 듯한 압도적인 폭력이 루시에게로 향한다.
그 순간 루시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루시를 기점으로 기괴한 모양을 지닌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푸른색의 막을 형성했다.
막은 너무나도 허술해 보였다.
그 안에 담긴 마력의 양은 한없이 작았으니 어찌 견고할 수가 있겠는가.
허나 놀랍게도 괴한이 내지른 마법은 그 막을 뚫지 못했다.
어둠이 빛을 피하듯 검은 마력이 푸른색의 막을 피해 지나쳐갈 뿐.
이건 대체?
기적이라 해도 무방할 만한 광경에 조이가 눈을 크게 뜨고 있으려니 루시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여느 때와 같은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괜찮을 거라고 했지? 응?”
“…네.”
*
마법 왜곡의 두루마리.
이 물건이 지닌 효과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두루마리가 펼쳐진 공간을 기점으로해서 일정 범위내로 날아드는 모든 마법을 빗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들으면 개사기템 같지만 실제로도 개사기템이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냐고?
사기템인 걸 어떡해?!
발동 시간이 짧다거나,
이게 발동되는 동안에는 마법진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 어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거나,
소지한도가 있어서 한 개밖에 들고 다닐 수 없다던가,
아이템에 부여된 어중간한 마법들까지 다 날려버린다던가,
뒷세계의 사람을 통하는 게 아니라면 결코 구할 수 없다던가 하는 단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사기템인 건 사실이다.
상대의 위협적인 마법을 단 한 번 무효화 시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메리트인데.
초반부만 지나면 보스전용 필수 아이템 소리를 들었다.
패턴을 파훼하는 데 실패해서 전멸할 위기를 한 번 막아주는 기사회생의 물건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기템은 지금도 제 역할을 해내는 데 성공했다.
세상을 짓뭉개려던 거대한 마력이 서서히 흩어져감과 동시에 푸른 막 너머로 나크라드의 얼굴이 보였다.
놈은 이를 꽉 깨물고 있었지만 저 놈에겐 더 이상 방책이 없었다.
쟤가 분명 이 세계관 기준으로 강자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소울 아카데미에 있는 온갖 고인물들을 박살낼 수준은 아니거든.
저 놈이 신에게 부여받은 마법인 결계가 3분만에 박살난 것만 봐도 그렇지 않아?
나중에 타리키가 힘을 되찾는 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뭐 지금은 그저 양학충에 불과하지.
야. 그러게 기회가 있을 때 네 손으로 내 목을 날렸어야지.
왜 어중간하게 마법을 썼을까.
내가 하는 짓이 너무 꼴받아서 절대적인 절망을 주고 싶었던 거야?
하핫. 그렇다면 넌 메스가키한테 된통 당한거야 등신아.
내가 웃음을 지어주자 나크라드의 미간이 찌푸렸지만 녀석은 더 이상 무언가를 하는 대신에 다시금 하늘로 떠올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스토리를 생각해보면 뭐 저 알아 적당히 도망을 치겠지.
그를 보고 있자니 마법의 여파가 그침에 따라 푸른 막이 걷혔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 탄내. 먼지의 냄새.
점차 흐려지는 시야와 그칠 줄을 모르는 이명.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할배와 조이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에 뒤섞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소리.
이걸로 이번 사건은 끝난 건가.
안도감이 든 순간 여태까지 억지로 뒤로 미루고 있던 것들이 나를 향해 몰려왔다.
더 이상은 버텨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난 그 파도에 몸을 맡겼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마지막 순간에 보였던 것은 나의 앞에 몇 개의 메시지 창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
“알른 영애?!”
앞으로 고꾸라지는 루시의 모습을 보며 조이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안 돼. 안 돼요.
아직 당신에게 진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 이래서는 안 돼요.
당신이 귀찮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건 알겠지만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요.
저한테 빚만을 지워두고 떠날 생각하지 말란 말이에요!
조이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루시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순간에 그 옆에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루시를 꼭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허나 거기에 있는 것은 적이 아니었다.
백색의 복장을 입고 있는 신관이었다.
“주신교회의 사제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에 찬 목걸이를 보여주며 조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친구 분의 용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바닥에 내려놔 주시겠습니까?”
“…네. 네.”
조이가 조심스럽게 루시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사제가 자신의 마법을 사용했다.
그 모습을 노려보는 조이가 제발 루시가 괜찮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그 옆에서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파트란 영애님.”
고개를 돌린 조이는 그제서야 사제의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아카데미의 교수들. 경비병. 신관의 사제들. 이 곳에서 일을 하는 마법사들.
아카데미의 거리에서 즉전력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뭉친 듯한 풍경.
그 속에 대표를 맡은 것은 아카데미의 교수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
“제가 취조 당해야 하는 입장인가요?”
평상시에 부드럽게 이야기를 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게 조이의 어투다.
그런 그녀가 진심을 담아 정색을 한다면 어떻겠는가.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교수조차도 할 말을 잃어 허둥거리는 걸 보며 조이는 다시금 루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만들어 낸 침묵 속에서 사제가 루시를 관찰하는 걸 지켜보던 그녀는 사제의 마법이 끝나자마자 목소리를 냈다.
“어떤가요.”
“파트란 영애님.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합니다만…”
사제가 말꼬리를 끄는 것을 보면서 조이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상황이 안 좋나 보구나.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 줄타기를 했으니까.
상태가 멀쩡하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상황.
“멀쩡하십니다. 잔상처는 좀 있지만 그 뿐입니다.”
“네? 그렇지만 알른 영애께선 지금 쓰러지셨잖아요!”
“주무시는 겁니다.”
사제는 그리 이야기를 하면서 루시의 숨소리를 들어보라 이야기를 했다.
조이는 말도 안 된다 생각을 하면서도 사제가 시키는 대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놀랍게도 그 소리는 자그마한 아이가 낮잠을 잘 때 내는 고로롱거리는 소리처럼 평안했다.
“하.”
너무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안심이 된다는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다리에 힘을 잃어버린 조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정말. 놀라게 하지 말아주세요.”
*
잠에서 깨어나니 처음 보는.
아니네. 지난 번에 조이가 쓰러졌을 적에 보러온 적이 있으니까.
어쨌든 양호실의 천장을 보면서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몸을 일으키며 내가 왜 여기에 있는 지를 돌이켜 보았다.
분명히 나 오늘 광장에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는 걸 구경하려다가.
아. 나크라드를 만나서 개같이 굴렀지.
그럼 당연히 여기에 있어야지.
근데 그 때 상처 입었던 것치고 몸이 멀쩡한 거 같은데?
아무리 아르마디의 자비로 회복을 하면서 싸웠다고는 하지만 그게 완벽했을 리가 없어.
말도 안 되는 사실이 의아해서 고갤 갸웃거리던 나는 슬며시 뺨을 꼬집어보았다.
분명 아팠다.
다행히 꿈은 아닌 모양이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내게 현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을 찾던 중에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건 칼이었다.
우리 허접 강아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아무런 말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땅에다 이마를 박았다.
“아가씨! 부디 이 불충한 기사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얘는 또 왜 이러는 거야.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다른 이들이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아가씨의 옆을 지켰어야 했는데 저는…”
아아.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 그거야 내가 버려두고 온 거잖아.
네 잘못이라고 할 수가 있나?
‘칼. 괜찮아요.’
“허접. 괜찮아.”
오? 오?! 오오오?!
왜 루시가 칼을 허접견이 아니라 허접이라고 부른 거지?!
메스가키 스킬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건가?!
“개라는 문구를 빼시다니. 역시 제가 아가씨께 실망을.”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를 확인할 틈이 없었다.
호칭이 달라진 것이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칼이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다.
양호실 바닥을 박살내며 머리를 박는 그를 말리는 것은 나크라드를 상대하는 것보다 심적으로 고된 일이었다.
아니. 너는 개소리를 듣는 걸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아가씨…”
간신히 칼을 말린 나는 그에게서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기사로서 보고를 하던 경험이 있는 칼의 설명은 짧고도 명확했다.
악신의 사도가 등장했음을 파악.
거리를 경계하던 인원들이 그 기운을 쫓아가던 중 결계가 발생.
그를 해제한 후 안으로 들어가니 나와 조이를 발견.
두 사람을 보호한 후 일부 인원은 악신의 사도의 뒤를 쫓는 중이라고.
“그리고 아가씨께서 사용하던 무기는 지금 교회측에서 보관 중입니다.”
어쩐지 할배가 아무런 말이 없다 싶었더니 지금 내 옆에 없어서 그랬구나.
내 무기를 왜 교회에서 가져간 거야?
“바닥에 떨어진 메이스를 성녀님 이외의 다른 분께선 들지 못했던 지라.”
아아. 신성 특성에 귀속 무기라 어쩔 수 없었던 건가.
그럼 나중에 페이비한테 받으러 가야겠네.
그 이외의 특이사항은 없었다.
칼에게서 모든 설명을 들은 나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그를 내보냈다.
그는 내 곁에서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쟤가 붙어 있으면 마음 편하게 보상을 확인하지 못하잖아.
주인을 배웅하는 강아지마냥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칼을 내보낸 나는 내 앞에 떠올라 있는 무수히 많은 메시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중에서 가장 앞에 떠올라 있는 문구는 이것이었다.
[조이 파트란의 호감도가 70을 돌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