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0
호감도 70이 넘었다.
그 문구를 나는 한 번 보았다가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본 후에 얼굴을 쓸어내리고서 다시금 봤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그 문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진짜?! 조이의 호감도가 70을 넘었단 말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어서 그런지 내겐 이게 그 무엇보다 큰 보상처럼 느껴졌다.
내 최애캐가 나를 좋아해주고 있다니!
이것보다 커다란 게 무어가 있겠는가.
물론 그녀가 날 좋아한다는 게 친구로써 좋아하는 것보다는 은인처럼 여기는 것이겠지만 뭐 어때!
원래 친구라는 게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친구라는 건 같이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되는 거라고!
이 문구 하나만으로도 나는 방금 전에 죽을 뻔 했던 일에 충분한 대가를 얻은 느낌이었다..
조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이야 몸에 구멍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암!
이제 이 뒤에 무엇이 나오더라도 웃어넘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은 나는 미소와 함께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악신의 사도를 상대로 버티는 게 성공했습니다!]
[보상 : 몸상태를 완전 회복합니다.]
이거 때문에 내 몸이 멀쩡했던 거구나.
허접 주신. 장난감의 유지 보수 정도는 해주는구나?
근데 그럴거면 애초에 부서지지 않게 해주면 안 되는 거야?
왜 굳이 만날 부서지게 만들어?
진짜 사디스트라서 부서지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건가?
만약에 그게 사실이면 넌 진짜 존나게 악질인 거야.
사디 페도 주신아.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아닐 거라고 믿어줄게.
설마 한 세상의 주신이라는 새끼가 여자애가 피흘리는 걸 보면서 물개박수를 치는 변태겠어?
그리 생각하며 다음 메시지를 살폈다.
이번 것도 허접 주신이 보낸 메시지였다.
[악신의 사도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금으로서 이룰 수 없는 위업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스킬이 강화됩니다!]
…잠깐.
멈춰!
멈춰어어어어!
왜 이걸 강화하는데?!
야!
아니. 아르마디님!
왜 그런 짓을 하려 하십니까!
내가 이를 악물고서 당신의 적을 격퇴했잖아요!
이룰 수 없는 위업이라며!
그럼 제대로 된 보상을 줘야지 왜 날 엿 먹이려고 그러는데?!
그 아래를 보는 게 너무도 무서워서 차마 고개를 아래로 내릴 수가 없었지만 어찌하겠는가.
이미 결과가 나온 것을.
그래도 칼을 허접견이 아니라 허접이라고 불렀던 걸 보면 패널티가 약화된 걸 수도 있잖아.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자.
여태까지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마다 배신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는 거잖아.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르마디님.
당신의 장난감에게 이 이상의 고난을 선물하지 말아주세요.
그리 속으로 기도를 하며 아래를 내린 순간.
[보상 : 메스가키 스킬의 패널티 감소]
난 그래도 이불에 머리를 박았다.
아아아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르마디님.
이 불신한 신자는 항상 당신을 모욕하고 위협했지만 당신께서는 이런 신자에게도 자비를 내리시는 군요.
여태까지는 항상 당신의 뜻을 의심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 순간을 바라보고서 여태까지 많은 고난을 내리셨던 거군요!
아아. 아르멘.
축일마다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금도 내겠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애들도 교회에 데려가겠습니다!
칼? 프레이? 비시?
말만 하십시오!
제가 바로 당신의 신자로 만들겠습니다!
아르멘!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 메시지를 내리고 나니 마지막 메시지였다.
자아. 이번 거는 뭘까?
여태까지의 경험상으로는 슬슬 억까가 나올 차례인데.
항상 기분이 하늘까지 치솟았다가 바닥으로 내리 꽂는 게 패턴이잖아.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을 거다.
나의 기분은 지금 하늘을 뛰어 넘어 대기권을 돌파해 우주로 올라섰다.
무중력 상태에 들어선 나를 바닥으로 이끌어낼 수 있겠냐!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라!]
[아카데미의 중간고사에서 1등을 차지하십시오!]
[보상 : 인벤토리 기능 해금]
[실패시 : ???]
당연히 억까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메시지를 읽어 내리던 나는 아무런 함정도 없는 글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너무 무난하지 않아?
허접 주신. 너 매도당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내 입에서 욕지거리 들으면서 입꼬리 올리는 거 아냐?
그런데 왜 이번에는 자제하는 거야?
아니 고맙기는 한데.
정말 감사하기는 한데요.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잘해주기 시작하면 좀 불안하거든요?
이 다음에 대체 무슨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이게 폭풍전야인지 아니면 내 행복으로 향하는 레드카펫인지 확신할 수가 없잖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억까를 해주는 편이 나았을 거야.
그랬다면 마음 편하게 아르마디를 욕하면서 어떻게 몸을 비틀면 좋을지를 걱정하면 그만이니까.
근데 이제는 무슨 억까가 나를 덮칠 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제기랄.
뭐지?
뭘까?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거?
그거야 이미 생각하고 있던 일이니까 상관없어.
거기서 더 악화 되더라도 어떻게 대응할 수 있어.
그렇다면 인간관계랑 관련된 거?
이미 호감도 70인 사람을 두 사람 만들라는 퀘스트가 있는데 이 이상 뭐가 나올 수 있나?
혹시나 사람이 추가되더라도 아서나 페이비 쪽으로 돌아서면 그만이라서 문제없어.
아예 불가능한 건 역시 평판 쪽인가.
근데 그건 무리야.
나한테 아카데미 내의 평판을 요구한다면 난 그냥 때려치울 거야.
그게 아닌 다른 평판이라면 어떻게든 비벼 보겠지만…
걱정을 하고 있자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새로운 걱정들이 생겨났다.
모니터 너머로 캐릭터를 키우고 있었다면 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란 말이지.
그래. 괜한 걱정 하지 말고 지금 당장에 해야 할 일이나 하자.
어차피 억까를 당하더라도 그 때 가서 해결방법을 생각하면 되는 거야.
걱정을 할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나아.
그래. 일단은 레벨작이랑 숙련도작부터 하자.
*
페이비는 달빛처럼 빛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메이스를 바라보았다.
알른 가문의 영지에서 일을 하던 요한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 메이스는 먼 옛날 세상을 구원한 용사일행 중 하나였던 성기사 루엘의 것이라 했다.
루엘의 메이스.
성기사 루엘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던 물건.
지난 이백년 동안 많은 이들이 찾아 헤맸지만 그 끝자락조차 보지 못했던 것.
수많은 사기꾼들이 이게 루엘의 메이스라 자랑스레 소리치다 목이 베였던 성물.
요한의 보고에 따르면 알른 영애께서 신의 계시를 받고서 이 물건을 찾아내셨다 하셨지.
오늘이 오기 전까지 페이비는 그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에 아무리 대단한 역사가 담겨 있다 하더라도 물건은 물건이다.
신께서 누군가를 이 물건에 인도하셨다면 그 사람에게 이 물건을 이용해 이루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일 터이니.
누군가의 손에 성물이 들어갔다 해서 부러워 할 이유는 없었다.
이전의 페이비는 그리 생각했다.
허나 요즘 들어서 페이비의 마음속에는 점차 자그마한 미혹들이 생겨났다.
평생토록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자꾸만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어째서 알른 영애께만 신께서 말을 걸어주시는 걸까.
관심을 주시는 걸까.
신경을 써주시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던 알른 영애께 왜 이런 선물을 주시고 나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빛을 나누어 주시려는 걸까.
어째서.
왜.
그런 생각을 하다가 페이비는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휘젓더니 가슴 앞에다 두 손을 모았다.
자신의 검게 물들어버린 생각을 회개하기 위해서.
페이비는 세상물정이라는 단어를 말할 줄 알게 되기도 전에 예언에 따라 주신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연고도 부모도 뭣도 없었으니까.
교회가 페이비를 들이기 위해 지불한 대가는 고아원에 준 은화 1개뿐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교회에서 성녀로써 키워졌다.
다른 사람이 어찌 여길지는 모르겠으나 페이비에게 그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녀로써 받아야 하는 교육도.
참아야 하는 여러 가지도.
해야 하는 많은 일들도.
페이비에게는 그리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신께서 이래서 자신을 성녀로 간택하셨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페이비의 유일한 고민은 자신만이 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단 것이었다.
아르마디께서는 자신의 사도를 두지는 않으시지만 그렇다 하여 아예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분은 아니다.
교회의 고위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아르마디께서 주신 계시를 얻고 이 길을 택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페이비는 단 한 번도 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성녀라고 불리면서.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 여겨지면서도.
세상에 신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면서도.
단 한 번도.
그렇지만 여태까지 페이비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신께서는 다 뜻이 있으실 테니 때가 되면 말을 걸어줄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페이비는 조금씩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혹시 신께서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실까?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푸느라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틈이 없는 거 아닐까.
그런 의심이 차오를 때 페이비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들고 있는 메이스와.
신의 축복이 담긴 목걸이와.
자신만만하고도 얄미운 그 웃음이.
페이비를 아래로 내려다보고 비꼬는 그 말투가.
“페이비. 너 왜 이러는 거야. 이래서야 회개를 하는 게 아니잖아.”
페이비는 자신을 다그치듯이 이야기를 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르마디님. 제발 저에게 계시를 내려 주세요.
흔들리는 어린 양에게 길을 알려주세요.
제가 미혹을 떨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세요.
그리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를 하던 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교회의 문을 열고서 들어온 사람은.
“안녕하세요. 허접 성녀님.”
방금 전까지 페이비가 열렬히 생각하고 있던 그 얼굴이었다.
페이비는 그를 보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른 영애님.”
*
뒷골목에서 괴한을 만났던 사건 이후로 조이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대로 멈춰서 있을 수는 없다. 과거에 매몰되어서 벌벌 떨고 있어서는 평생토록 알른 영애에게 은혜만을 입고 살 게 분명해.
그럴 수는 없어.
알른 영애는 언제나 고난 속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실 터.
그 분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과거에서 벗어나 알른 영애가 고난 앞에 섰을 때 그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알른 영애님.”
그래서 조이는 루시를 찾아왔다.
실례스럽지만 한 번의 은혜를 더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를 통해 은혜를 갚기 위해서.
“뭔데? 얼빵 영애?”
“제가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