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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1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 없거든….”


아티샤가 운을 띄웠다.

‘몇 달 전이었나….’ 라는 말로 시작된 이야기.


“마을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이 죽은 채로 발견됐어…. 처음에는 몬스터들이 으레 하는 영역 다툼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죽은 몬스터를 발견한 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사냥을 나섰던 사냥꾼들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잦아지고, 그들도 쉽게 사냥할 수 없는 강한 몬스터들이 사체로 발견되는 일도 많아졌다.

그쯤 되자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아티샤는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대를 꾸렸고, 아티샤를 필두로 한 조사대는 머지않아 이 사태의 원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쉽게.

거대한 몸집과, 몸을 감싼 단단한 비늘.

한 쌍의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마치 폭풍 같은 바람이 일었고, 날카로운 발톱은 사냥감의 가죽을 손쉽게 찢어버렸다.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쩍 벌린 아가리에서 일렁이는 검붉은 불꽃이었다.


“‘크루모의 그림자’…. 우린 그걸 그렇게 불러….”

“…크루모?”


그 이름이 갑자기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크루모라는 이름은 아르디나 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야, 어렸을 때부터 심심찮게 듣던 이름이니 당연하지.

옛날이야기 속, 아르디나 대륙을 절망과 비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악룡.

그것의 이름이 크루모였으니까.

그리고 악룡 크루모는 그라시드의 도움을 받은 지그리드에 의해 토벌되었다.

원래 건국사라는 건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 다소 과장되기 마련이라지만.

크루모가 지그리드에게 토벌되었다는 사실은 절대 과장도, 거짓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아티샤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되는 이름이었다.

수백 년 전에 죽은 악룡의 이름이 여기서 갑자기 왜 나온단 말인가.

아티샤는 추가 설명을 요하는 내 눈길을 알아챘다.


“진짜 크루모였다면 여긴 이미 폐허가 됐을 테니 아마도 진짜는 아닐 거야….”


락시아에서 건너온 그녀도 크루모의 이야기는 아는 듯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크루모라고 한 거야.”

“크루모라고 안 했어…. 크루모의 그림자라고 했지….”

“그거나 그거나.”


크루모의 그림자든, 크루모의 어쩌구든.

중요한 건 그 이름이 왜 나오냐지, 그 뒤에 붙는 말이 아니다.


“자기가 크루모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는걸…. 그렇지만 역시 믿을 수 없어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어쩌면 정말 크루모가 되살아난 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의 힘은 전성기 때의 크루모에 한참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의 힘이 그때와 같았다면, 자신의 죽음에 분노하여 길길이 날뛰며 아르디나 대륙을 파괴하기 위해 날뛰었을 테니까.

이야기 속 크루모와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엔 그것이 지닌 힘은 꽤나 강했다.

같지만 다르다.

그렇기에, ‘크루모의 그림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아티샤가 설명했다.

“크루모의 그림자라.”

말로만 들으면 감이 잘 안 오는데

한쪽 뿔이 잘렸다고 해서 보는 눈까지 퇴화한 건 아닐 테니 이름값을 어느 정도 하는 놈 아닐까.

나는 길게 늘어진 옆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는 건 그것 때문이야?”

“응…. 내가 자리를 비우면 놈이 쳐들어왔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으음.”


그 정도 힘이 있었다면 진작 쳐들어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무엇보다, 한 명이 사라지만 망하는 마을이라니.

어떻게 봐도 바람직한 구조가 아니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문득 드는 기시감에 잠시 생각을 멈췄다.

…어라.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지?

얼마 전에 멸망한 나라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래서 망한 건가?

“사정은 알겠어.”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믿으라느니, 별일 없을 거라느니, 그런 소리를 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본 아티샤는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런 소리를 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런 열정만능주의적 발언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나 다은은 우리 둘과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금방 갔다 오면 괜찮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의견을 피력하는 다은.

당연히 그녀의 의견은 빛에 버금가는 속도로 반려되었다.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질 수 있냐는 말과 함께.

시무룩해진 다은을 토닥여준 나는 아티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언제쯤 자리를 비울 수 있는데.”

“글쎄…. 그놈이 사라지거나 다른 곳에 둥지를 틀기 전까진 무리가 아닐까…?”


확실한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말이었다.

살기 위해 락시아를 떠나 아르디나 대륙에 정착한 이들이니,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더군다나 이쪽이 일방적으로 부탁하는 입장이니 강요할 수도 없고.

그래, 숙원.

그들이 바라 마지않는 숙원을 이루어 주는 거니 일방적인 부탁은 아닐 수도 있지.

그러나 나는 아직 그들에게 숙원을 이루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작정 내 입장을 밀어붙였다가는 ‘생각이 바뀌었어…. 안 갈래….’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아티샤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는 자꾸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달려드는 다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


“그놈을 없애면 되겠네.”

“응…?”

“크루모의 그림자인지 뭔지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무리라며. 그러면 그놈을 없애면 해결되는 문제잖아.”


문제의 원인을 제거해서 문제를 없앤다.

간단한 해결법이잖아.

그러나 아티샤는 이 쉬운 해결법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쉬운?”

그러고는 묘하게 피로감이 짙어진 얼굴을 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림자를 토벌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야….”


아티샤가 잔에 든 내용물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차가 아니라 술을 마시는 것처럼 호쾌하게.


쨍!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는 그녀의 손은 아까보다 조금 더 거칠었다.


“결과만 말하면 무리…. 우리는 그놈을 잡을 여력이 없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직 쳐들어오지 않고 있지만, 마족들도 놈을 토벌할 능력이 없었다.

진척도 없고 퇴보도 없는 지지부진한 대치 상황.

그것이 크루모와 마족의 현 상황이었다.

아티샤의 설명을 들은 나는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네가…?”


못 믿겠다는 눈치로 나를 보는 아티샤에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손가락 위에 피어오르는 분홍색 마나.


탁.


그대로 손가락을 휘두르자 찻잔의 손잡이가 떨어져 나왔다.


“마나에 색을 입혔다고…?

아티샤가 경악하며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이전에 그녀가 보인 게 ‘네가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라는 느낌의 순수한 불신이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단순히 건방진 꼬마가 아니었네….”


중얼거리던 아티샤가 평정을 되찾았다.

“어때. 가능성이 좀 보여?”

“너 같은 강자가 도와주겠다면 환영이지….”


역시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좋다니까.

옛 조상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나는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그 누군가는 다은이었고.


“악룡의 그림자라니…. 너,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저번에 카나가 그랬잖아. 드래곤은 이기기 쉽지 않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어?”

“그, 레인 버팔로 때….”

“으응. 그랬던 거 같기도.”


그 말을 들으니 그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좀 다르게 말했던 거 같긴 한데, 큰 맥락으로 보면 같은 의미니 수정할 필요는 없겠지.

크루모라는 이름값에 짓눌린 모양인지 다은은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진짜 드래곤이었으면 그렇지.”


직접 봐야 확실해지긴 하겠지만 아티샤의 말만 들으면 진짜 드래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아티샤를 비롯한 마족들이 진작 짐을 싸고 도망쳤거나 이미 궤멸당했겠지.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 아니야?”

“그렇긴 하지.”


나는 순순히 다은의 말을 인정했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순 없잖아.”


이대로 팔짱을 낀 채로 놈이 다른 곳에 둥지를 틀기만을 기다리는 건 요행을 바라는 것밖에 더 되겠어?

언제 다른 곳으로 갈지도, 하물며 갈지 말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요행을 바라며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야.

그리고-


“궁금한 게 생기기도 했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놈을 직접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를 크루모라고 칭했다는 걸 보면 하급 몬스터들과 다르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 같으니 대화를 시도해 볼 법 하지 않을까.

만약 대화를 거부하면 뭐….

몸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바뀌겠지.


툭툭.


“카나 무서워….”


애꿎은 검집을 툭툭 건드리고 있으니 다은이 벌벌 떨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정말로 무서운 게 뭔지 보여줄까.

내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다.

호들갑을 떠는 게 얄밉긴 한데, 지금은 기강을 잡을 때가 아니니까.


“주의할 점 있어? 특이 사항이나.”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아티샤가 관찰을 통해 알아낸 바를 나에게 공유했다.

비행이 가능하다, 움직임이 엄청나게 빠르다, 마기를 두르고 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등등.

이야기를 듣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만 들으면 와이번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비행할 수 있지만 마법을 못 쓰는, 드래곤을 닮은 몬스터?

이거 그냥 와이번 아닌가.

그러나 아티샤는 고개를 저었다.


“덩치가 엄청나게 커…. 일반적인 와이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흐응.”

“그리고 브레스를 내뿜을 수 있어….”

“확실히 와이번은 아니네.”


브레스는 드래곤의 전유물.

고작 비룡종인 와이번이 드래곤의 전유물인 브레스를 뿜을 수 있을 리 없다.

드래곤이라고 보기엔 마법을 못 쓰는 점이 석연치 않고, 와이번이라고 치기엔 브레스를 뿜을 수 있는 게 마음에 걸리고.


“자세한 건 직접 보면 알겠지.”


나는 아티샤에게 들은 정보를 머릿속에 잘 정리해서 넣었다.


“언제 갈 거야…?”


다은과 달리 아티샤는 나를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은근한 기대감을 품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일.”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잖아.

굳이 질질 끄는 것보다 후딱 끝내는 편이 여러모로 낫겠지.

“그런 거라면 오늘 당장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티샤의 소심한 태클은 못 들은 척 넘겼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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