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1
<여아야. 그 페이비라는 아이 말이다.>
페이비에게 메이스를 받고서 돌아오는 길.
교회에서 빠져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할배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왜요?’
<많은 흔들림을 겪고 있는 것 같더구나.>
‘페이비가요?’
할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페이비라는 사람은 거대한 나무같은 사람이니까.
그 어떤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나무처럼 굳건한 사람.
자신의 거대한 그늘 아래에서 모두를 쉬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설령 몇 개의 뿌리가 썩더라도 아무런 흔들림 없이 더 높은 곳으로 자라날 수 있는 사람.
그게 페이비다.
그녀의 개인 스토리상에서 수많은 고난이 닥쳐왔음에도 한 번도 얼굴 찌푸리지 않고 성녀다운 모습을 보여줬던 사람이 아무 시련도 없는데 흔들릴 리가 없잖은가.
<그리고 말이다. 그 아이가 너를 질투하는 것 같았다.>
‘에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배. 음해를 하려고 그래도 그럴 듯 한 걸 말해야죠.
페이비와 질투는 너무 먼 단어잖아요.
내가 게임을 하면서 걔를 몇 번이나 공략해봤는데.
성녀님께서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왜 할배는 자기랑 아무 관련도 없는 여자애를 나쁜 년으로 만들려고 그러는 거에요.
<여아야. 본인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있느냐?>
‘…진짜로 페이비가 절 질투하고 있다고요?!’
허?
왜?
나한테 질투할 요소가 어디 있지?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페이비가 날 질투할 요소가 있나?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왜요?’
<그대에게 아르마디의 은총이 내린 것이 부러운 듯 했다.>
그 부분인가.
하긴 평생토록 신을 신앙해 온 자신은 아무런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깽판을 부리던 메스가키가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 걸 보면 속이 뒤집어지긴 하겠지.
나 같으면 좆같은 변태 주신 새끼. 내가 너 믿나 봐라. 하고 말았을 테지만 페이비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면 이런 상황은 게임 속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네.
게임 속의 아르마디는 유저에게 결코 말을 걸지 않으니까.
아르마디의 사랑을 받는 유저를 보았을 때 페이비가 어떻게 행동하는 지 나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추측할 수는 있다.
그녀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알기에.
‘괜찮을 거에요.’
페이비가 헤맬 수는 있다.
흔들릴 수도 있다.
성녀의 직함을 달고 있고 그 누구보다 성녀에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만 페이비는 괜찮을 것이다.
그 끝에 언제나 극복을 하고서 웃음을 짓는 것이 성녀 페이비라는 캐릭터니까.
나는 암울하기 그지 없는 개인스토리가 끝났을 때에도 밝게 웃던 그녀의 모습을 믿었다.
<그렇다면 좋을 테지만.>
‘걱정 마세요. 언제 제가 하는 말이 틀린 적 있어요?’
<…그것도 그렇구나.>
‘그보다 할아버지. 제가 여기서 더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나 이야기 해봅시다.’
지금은 이게 더 시급한 문제다.
앞으로 아르마디의 사도라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위협이 닥쳐올지 모르니까.
당장 나크라드는 내게서 아르마디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에 본래의 계획을 무시하고 날 죽이기 위해 달려온 것 아닌가.
앞으로 이러한 일이 얼마나 더 많이 생길지 모른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내가 강해지는 게 최선이다.
무슨 변수가 생겨날지 몰라서 벌벌 떠는 것보다는 무슨 변수가 생기더라도 박살내겠다는 마음을 먹는 게 낫지 않나.
<그대는 지금도 충분할 정도로 강하다만.>
‘이걸로 부족해요.’
단순한 신체 스펙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키워서 보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싸움의 기술은 다르다. 이건 단순히 노가다를 한다고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중요한 순간마다 할배의 판단을 어느 정도 빌리고 있다. 허나 이래선 안 된다.
나크라드와 싸움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할배의 말을 기다리고 움직여서야 느리다.
할배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할배와 똑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전 죽고 싶지 않거든요.’
<…흐음. 알겠다. 내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을 해보마.>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리고 하나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무어냐.>
‘아카데미에서 들었던 수업들 다 기억하고 계시죠?’
아니 글쎄. 퀘스트로 중간고사에서 1등을 차지하라는 게 나왔지 뭐에요?
전 아카데미 필기 수업을 들을 때 대부분 책상과 입맞춤을 하면서 지냈단 말이죠.
그렇다 보니 여태까지 배운 게 뭐냐고 물어보면 음. 이나 어. 같은 대답밖에 못한단 말이에요.
할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 이겁니다!
<하아. 여아야.>
‘넵!’
<제발 수련 할 때 보이는 열정 중 10분의 1이라도 공부에 투자해주면 안 되겠느냐? 내 말하지 않았느냐. 귀족으로써!…>
내 뻔뻔한 부탁에 한숨을 내쉬던 할배는 이윽고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할배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던지라 나는 그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어차피 도와줄 거잖아요 할배?
당신이 츤데레라는 건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해뒀다고요!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프레이를 데리고서 훈련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에 조이가 날 찾아왔다.
어제 보건실에서 지겹도록 감사 인사를 했으면서 또 고맙단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니겠지?
진짜 그럴 생각이면 메스가키 스킬로 고맙단 생각을 날려 버릴 테다.
그리 생각을 하며 조이의 말을 기다렸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내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였다.
“제가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어… 응?
뭐라고?
강해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마법사인 조이가 나한테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그를 위한 조언을 얻고 싶다면 나보다 믿음직스러운 곳이 많지 않나?
아카데미의 다른 교수들이라거나,
파트란 가문의 인맥을 이용해 초빙한 교사라던가.
물론 난 조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소울 아카데미에서 키워본 캐릭터가 어디 근접 캐릭터뿐이겠어?
나는 소울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전 직종의 육성법을 다 외우고 있는 고인물이라고.
단지 내게 저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궁금할 뿐이다.
‘왜 저에게 그런 부탁을?’
“얼빵 영애. 진짜 얼빵한 생각밖에 못 해? 왜 기사에게 마법사가 도움을 청하는 거야?”
“마법에 대한 가르침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단지 당신의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조이가 하는 말은 대충 이해했다.
내게 진 목숨의 빚을 갚기 위해 내 옆에 서고 싶다.
그러니 내가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는 거지?
이걸 조금 바꿔서 이야기하면.
‘저랑 파티하고 싶으신 거죠?’
“헤에~ 얼빵 영애. 나랑 파티하고 싶은 거야? 나한테 놀림당하는 게 실은 좋았던 거구나? 변태 영애~ 징그러워~”
“…뒷 말은 그렇다치고. 알른 영애님과 같은 파티가 되고 싶은 건 사실입니다.”
조이가 파티원이 되는 거야 환영할 일이지.
그녀는 게임 속에서도 좋은 성능을 지닌 마법사였으니까.
파티 컨셉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위력적인 후위를 두고 싶을 때에 조이는 언제나 우선순위에 들어가는 캐릭터였다.
전투를 할 때마다 딜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 내 입장에서 조이가 파티에 들어오겠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파티원이 되고자 하신다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파티원이 되고 싶다고 사정사정하면 들어줄 수 없는 건 아닌데 말야. 허접한 겁쟁이 영애. 너 던전에 들어갈 수 있어?”
이게 문제다.
조이는 과거 연금술사의 던전에 떨어졌던 사고 때문에 던전에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
아무리 조이가 뛰어난 성능을 지닌 캐릭터라 하더라도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면 무용지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난 조이를 파티원으로 받아줄 수 없다.
내가 가만 바라보며 대답을 촉구하자 조이가 입을 달싹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요?’
“얼빵 영애. 내가 너~무 좋은 건 알겠지만 허세 부리면 곤란해. 이번엔 정말 실금할 지도 모른다구?”
“다른 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알른 영애가 곁에 있다면 분명… 괜찮을 거에요.”
내가 있으면 괜찮을 거다.
조이가 조심스레 내뱉은 그 말에 나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호감도 70을 넘었다는 문구를 보았을 때도 정말 기뻤지만 내 최애캐가 나를 의지하고 있음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이 기쁨을 참는 게 불가능했다.
‘제가 있으면 괜찮은 거군요!’
“아핫♡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거야? 허접~ 겁쟁이~ 밤에 내가 없어서 화장실에 못 가는 건 아니지?”
조이가 앞에 꼭 모은 두 손이 부들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바랐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어떻게 웃음을 참으란 이야기인가.
그렇게 숨이 차도록 한참을 웃고 나서야 진정한 나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갤 숙이고 있는 조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음. 이건 좀 너무했을 지도.
‘알겠어요. 조이. 같이 던전에 들어가죠.’
“알았어. 나 없인 아~무것도 못하는 아가 영애잖아? 옆에서 보살펴 주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대답을 하는 조이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조이. 지금 후회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늦었어.
들어올 땐 마음대로 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고.
고인물 파티의 일원이 되겠다고 이야기를 한 이상 조이 너는 내가 바라는 수준까지 올라와 줘야겠어.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치만 얼빵 영애. 내가 널 공짜로 보살펴 줄 수는 없잖아? 조건이 있어.”
“뭐죠?”
‘제가 시키는 대로 끝까지 따라와 주세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끝까지. 허접마냥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이 세상이 게임일 적에는 동료 NPC의 훈련 스케쥴을 일일이 지정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방향성을 지정해 주는 게 최선이었지.
그렇지만 여기는 현실이다.
게임의 시스템이 가로 막고 있던 걸 난 아무런 부담없이 할 수 있다.
예전엔 기껏해야 좋은 스킬을 배우게 만들고 좋은 아이템을 끼워주면 그걸로 끝이었는데 이젠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조이라는 보석을 세공할 수 있게 된 거라고.
이런 상황에 흥분하지 않을 고인물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을 거다.
지금 내 머릿속에 어떤 계획이 그려지고 있는지를 모르는 조이는 팔짱을 끼더니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냈다.
“저. 조이 파트란을 뭐라고 생각 하시는 거죠? 제가 그렇게 쉬이 포기할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정말요?’
“진짜? 자신 있어? 허접한 얼빵 영애는 절~대로 못 견딜 텐데?”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게요.”
조이의 눈에 담긴 결연한 의지를 본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이야기를 한다면 나로서는 만류할 수 없겠네.
아아. 어쩔 수 없지.
내 최애캐인 조이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지만 자기가 저렇게 하고 싶다는 데 어떡하겠어.
굴려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