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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2

그것은 어느 순간 눈을 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나는…

그것을 포근하게 감싸안은 어둠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나는 크루모….

그러자 그것의 머릿속에 감정들이 흘러들어왔다.

분노, 공포, 슬픔, 비탄, 절망….

여과 없이 흘러들어오는 감정들.

그것은 그중 가장 강렬하고, 가장 격렬한 감정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 감정의 이름은 분노였다.

모든 것을 불태우려는 듯이 이글거리는 이 분노의 근원은 어디일까.

불현듯, 그것의 눈앞에 무언가가 스쳤다.

그것이 느끼는 분노처럼 뜨겁게 이글거리는, 붉은색의 무언가.

제 몸을 가르던 붉은빛을 떠올린 그것의 숨이 일순간 멎었다.

-….

후욱-

죽음의 공포.

차가운 사슬에 휘감긴 의식이 저 깊고 어두운 구렁텅이에 처박혀 희미해지다가-

끝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흩어지는 공포.

그것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감히…!

그것의 안에 분노가 다시 차올랐다.

-감히 나를 이 꼴로 만들다니…!

개미만도 못한 버러지들이 감히!

그것의 입에서 이글거리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쏘아진 검붉은 분노는 바위조차 녹아내릴 정도로 강렬했다.

당장이라도 그것을 차가운 어둠에 처박은 버러지들을 찾아 찢어 죽이고 싶다.

비탄과 절망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에 취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아직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철 같은 비늘도, 그 어떤 명검보다 날카로운 발톱도 없다.

그러니, 일단은 힘을 길러야 한다.

그것은 자기를 휘감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을 번뜩였다.

다시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를 때를 기다리며.

* * *

“카나.”

“…!”

보고 싶은 얼굴.

하지만 이젠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얼굴.

그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도, 뺨에 난 커다란 흉터도.

모두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가리….”

아니.

혼자 남겨진 후 얼마나 후회했던가.

나를 낳기만 했을 뿐인 작자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대체 아빠라는 두 글자가 뭐가 그리 거북하다고 그렇게 피해 왔는지.

이제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아빠.”

“….”

내 부름에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두 팔을 벌렸다.

“…아빠!”

딱딱하지만 따뜻한 품.

나는 다시는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 온기에 몸을 내맡겼다.

고대하고, 바라왔고, 염원했던 일.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다.

아빠가 떠난 후 얼마나 외로웠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무뚝뚝하게 대해서 미안했다든지.

산더미처럼 쌓인 말을 고르고 고르던 나는, 결국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 모든 걸 아우르는 한마디를 토해냈다.

“보고 싶었어….”

아빠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성국에 가서 에델을 만났어.

에델이 말하는 대로, 락시아에 가서 마족들의 숙원도 이루어줬어.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렇게 아빠를 다시 볼 수 있게 됐으니 이제 상관없어.

마치 내 마음속 넋두리를 들은 것처럼, 아빠는 팔을 뻗어 내 등을 토닥였다.

그 따스한 토닥임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나.”

“…응?”

“행복하니?”

“…응.”

다정한 목소리가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간의 노고가 보상받는 느낌.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수만 있다면-

“내 삶을 뺏어놓고, 행복하니?”

“…!”

다정한 목소리와 따스한 눈빛은 어디에도 없다.

남은 것은, 나를 경멸하며 내려다보는 혐오감 어린 얼굴뿐.

차가운 얼음물을 끼얹은 듯, 몽롱했던 정신이 급격하게 부상했다.

“…나, 카나!”

“하, 하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걱정스레 쳐다보는 다은의 얼굴을 본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꿈…이었구나.’

꿈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가쁘게 뛰던 숨이 서서히 진정됐다.

“세상에, 이 식은땀 좀 봐… 아주 등이 푹 젖었네!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 응, 그럴지도.”

“괜찮아? 따뜻한 거라도 줄까?”

“…괜찮아.”

당장이라도 따뜻한 물을 가져올 것처럼 오두방정을 떠는 다은을 만류했다.

악몽…이라면 악몽이겠지.

아빠가 나오는 꿈을 악몽이라고 생각하다니.

차오르는 죄책감에 구역질이 나면서도,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던 얼굴을 떠올리니 사고가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 되겠어. 아티샤한테 말하고 오늘은 그냥 쉬자.”

“그럴 필요 없어. 괜히 호들갑 떨지 마.”

“카나야!”

다은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나는 내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내 단호한 의지를 느꼈는지, 강한 어조로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가 방법을 바꿔 이번엔 부드러운 목소리로 회유에 나섰다.

“컨디션 안 좋으면 다른 날로 미루는 게 낫지 않겠어? 몸도 안 좋은데 나섰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기분이 안 좋은 거지 몸 상태는 문제없어.”

“그래도….”

“그래도는 없어.”

“…알았어. 그래도,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미루는 거야. 알겠지?”

“그래도는 없다니까.”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다은은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강단을 부렸다.

결국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하고 물러났다.

강제성이라곤 전혀 없는 약속이 그렇게 달가운 건지.

다은은 한층 안심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러면 아침부터 먹으러 갈까?”

“…아침?”

“응! 밥도 안 먹고 싸우러 갈 순 없잖아. 밥은 중요하다구! 아무리 귀여운 카나라 해도 밥을 안 먹는 건 봐줄 수 없어.”

“아니, 나도 굶을 생각은 없는데….”

나는 땀에 젖어 축축한 옷을 팔락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데 갈 필요 없이 여기서 먹으면 되잖아.”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받았으면 집주인이랑 같이 먹어야지.”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잊고 있지 않아?”

“응? 잊고 있다고?”

뭐를?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놓친 걸 말해줄까 고민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뭐, 꼭 집주인이 음식을 대접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여차하면 우리가 대접하면 되니까 다은의 말대로 같이 먹는 것도 괜찮겠지.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찝찝한 옷을 벗어 던지고 평소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더 예쁜 옷을 입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은의 나지막한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환복을 마친 나는 그녀와 같이 문을 나섰다.

영주의 관저치고 작은 집이었던 터라 금방 식당을 찾아갈 수 있었다.

“아, 두 분. 오셨어요?”


“셀린! 일찍 일어나셨네요.”

“안녕….”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셀린과 아티샤가 우리를 반겼다.

늘 그렇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던 셀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나 님의 안색이 어두우신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악몽을 꿨대요. 심한 악몽이었는지 자는 와중에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끙끙 앓더라고요.”


“카나 님이… 악몽을요?”


“좀 의외죠?”


“…그, 이런 말씀 드리려니 죄송하긴 하지만, 네.”


“아하하. 그 심정 이해해요. 카나는 늘 강한 모습만 보이니까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상상이 잘 안되긴 하죠.”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응? 그냥 간단한 아침 인사.”

“음….”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다은이 눈을 내리깔며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 말투는 뭐야.”

“경건하지 않았어?”

“전혀.”

에델도 그런 말투는 쓰지 않았어.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건 에델이 이상했던 것 같기도 해.

경건한 말투를 바란 건 아니지만, 신이 그렇게 경박한 말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지구의 문명과 문화를 공부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실리아 세계에 없는 말들을 서슴없이 쓰더라.

정작 지구 출신인 나는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들인데.


“셀린은 뭘 하고 계셨어요?”


“정화자 일족분들의 의사소통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오, 안 그래도 그거 신기했어요. 언어가 달라도 말이 통한다니….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말이 아니라 뜻이 통하는 거야…. 말이 아니라 말에 담긴 마나를 통해 뜻을 읽는 거니까….”

“말에 담긴 마나요?”

“생명체는 늘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흘리거든…. 우리는 마나와 마기에 민감하니까 읽어내는 게 익숙한 거야…. 반대로 마나에 뜻을 실어 전달하는 것도 익숙하고….”

“그래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거구나….”

셀린과 다은이 하는 말이 뭔지는 몰라도 아티샤가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말할 때 흘리는 마나를 통해 그 사람의 뜻을 읽는다니.

상당히 신기한걸.

나도 할 수 있으려나?

따라 해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지금까지 들은 설명만으로 아티샤를 따라하는 것은 무리였다.

시험 삼아 마나를 피워냈던 나는 나를 쳐다보는 세 쌍의 눈동자를 느끼고 다시 마나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대신 아티샤의 말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제외한 둘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아티샤.

아티샤의 목소리는 나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 듣고 있으면 졸음이 절로 쏟아졌다.

어쩌면 악몽을 꾼 탓일지도.

“하아암….”

새어 나오는 하품을 참지 않으며 졸음과 맞서 싸우고 있으려니, 셀린과 다은이 쑥덕거렸다.

“카나 님이 많이 졸리신가 봐요.”


“어린애들은 원래 잠이 많잖아요.”

“어린애라 하지 마….”


“아, 미안. 하품하는 카나가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응? 잠깐만.”

다은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성큼 다가온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몸을 뒤로 쭉 뺐다.

“카나야. 혹시 내가 방금 그라닉으로 말했어?”

“…응?”

나른한 아티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덩달아 나른해져서 별 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아르키쉬로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성공한 건가?

…이렇게 쉽게?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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