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사라져 버린 시체 너머, 어두운 건물 입구가 마치 괴물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쿵. 쿵. 쿵.
그 건물 속에서 땅을 울리는 커다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짙어지는 혈향.
갑자기 느껴지는 스산한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키고, 사신이의 손을 꾸욱 맞잡았다.
어둠 속에서 불길한 붉은 빛이 번쩍였다.
땅울림 소리에 맞춰서 위아래로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그 불빛은 악마의 눈빛처럼 보였다.
‘사신이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이렇게 생각해도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둠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실루엣은 거대한 곰 인형 모양의 로봇이었다.
피를 잔뜩 묻히고 나타난 곰 인형은 어둠 속에 반쯤 잠겨서 흉흉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르릉.
쇠가 쓸리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곰 인형의 앞발에는 눌어붙은 내장 때문인지 핏물이 덩어리져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지만, 달리는 것처럼 절로 숨이 가빠졌다.
무서워!
쿵!
그리고 그 피투성이 팔 한쪽으로 문을 짚고서 서서히 전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포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등장.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던 곰돌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스르륵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
왜 저래?
설마 저거 도망가는 건가.
회색 사신은 곰돌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눈을 빛내면서 건물 안으로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저럴 땐 도망가는 장난감을 쫓는 고양이 같네.
“하하, 하하하.”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상황이 우스워져서 왠지 웃음이 났다.
역시 사신이랑 있으면 안전해!
***
괴물이 나타났다.
눈을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본질을 꿰뚫는 눈빛.
격이 다른 괴물이었다.
이를 악물고, 최대한 빠르게 괴물에게서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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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괴물은 나 같은 약자에겐 관심이 없을 테니, 도망가서 몸을 숨기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
어두운 방에 몸을 감추고, 문을 닫아걸었다.
눈에서 나는 빛을 가리기 위해 양 눈을 가리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통.
밖의 철문에서 뭔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아니겠지, 설마.
통통통.
밖의 철문에서 뭔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
드디어 간 건가?
“….”
이제 갔겠지?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주변을 둘러보자, 내가 들어올 때랑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다.
하, 다행이야.
통통통통통통통통통.
안도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갑자기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설마.
소리를 듣고 다시 시선을 돌리자.
철문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고, 괴물이 거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찾았다! 라고 외치는 것 같은 잔혹한 미소를 베어 문 괴물이.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속으로 절규하며 반대쪽 문을 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콰당.
하지만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양쪽 다리가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괴물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멀쩡한 양손으로 몸을 뒤로 밀었다.
괴물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서.
그그극. 그그극.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양다리가 멀쩡할 때도 뿌리칠 수 없었는데, 지금은 더욱 불가능하겠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방심한 포식자에게 의외의 일격이 되길 빌면서.
전력이 담긴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펀치를 날리는 순간 괴물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갑자기 내 시야가 반 바퀴 돌았다.
뒤로 쓰러지고 있는 몸통이 보였다.
머리와 양다리를 잃은 나의 처량한 몸통.
어느새 괴물이 다가와서 내 머리를 두들겼다.
통통통통통.
그리고 점점 시야가 좁아지더니, 영원한 어둠 속에 잠겼다.
***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곰돌이가 죽었다.
곰돌이의 파괴 조건은 <머리와 몸통의 분리.>였다.
어찌 보면 불쌍해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별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구라도 곰돌이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걸?
곰돌이의 양손은 피와 내장 조각으로 범벅이고, 전신을 핏물로 뒤집어쓴 흉악한 몰골이었으니까.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가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처량하게 기어다니는 곰돌이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곰돌이는 팔을 들어 올려 나를 내리찍기까지 했었다.
이제까지의 느릿느릿한 곰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민첩한 속도.
하지만 유령화로 가볍게 피해주고 곰 인형의 머리와 몸통의 연결 부위를 유령화로 잘라냈다.
잘린 목에서는 검은색 점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사막에서 봤던 그 점액이다.
검고 냄새나고 기분 나쁜 액체.
하지만 아쉽게도 그 액체의 양이 너무 적어 보였다.
이래서야 황금 사신이를 실수로 빠트릴 수가 없겠네.
곰돌이한테서 희미하게 그 냄새가 날 때부터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섭섭한 마음을 안고 예린이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 예린이가 호들갑을 떨며 반겨줬다.
“와, 사신아 돌아왔구나?”
하지만 내 표정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 사신아 무슨 일 있었어? 왠지 표정이 뚱해 보이는데….”
예린이는 내 볼을 콕콕 찌르면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예린이의 걱정 속에서 왠지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여기를 감시하는 것 같은 느낌.
오브젝트가 아니라 인간의 시선인데, 도대체 누구지?
***
공장 구석에 위치한 비밀 공간.
평범한 사람은 용도를 추측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온갖 전자 장비들이 즐비했고, 방의 한쪽에는 온갖 CCTV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그 CCTV 화면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화면에 비친 처참하게 박살 난 곰돌이 인형.
감시 화면을 보는 남자들은 잘린 곰돌이 머리를 보면서 왠지 자기 머리 같다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특급 오브젝트로군. 2급 정도로는 상대가 되질 않아. 저런 오브젝트의 춤을 보면서 따라 추는 민간인들의 심리는 이해할 수가 없군.”
“아 저도 그거 보고 기가 차더라고요. 회색 사신이랑 연관된 대형 사건이 몇 갠데, 그런 식의 반응인 건지 원….”
CCTV와 망원경으로 푸딩 공장의 주차장을 감시하고 있던 남자 두 명은 갑자기 나타난 회색 사신 때문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공장을 격리해서 사고사를 유도하는 작전은 오랜 시간 철저하게 계획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회색 사신은 검토된 적이 없는 예상외의 돌발 상황이었다.
“회색 사신이 나타나서 계획의 변경이 필요할 것 같다. 최악의 경우 목표 중 하나를 포기한다.”
“이대로 확보해 둔 ‘물건’만 회수해서 빠져나가도 괜찮을까요? 의뢰인이 싫어할 텐데….”
고민을 거듭하던 무뚝뚝한 남자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작전을 속행한다. 다만 수단을 바꾼다. 오브젝트 격리 실패로 인한 사고사가 제일 좋지만, 어쩔 수 없군.”
그는 길쭉한 가방을 열고는 그 안에서 그 크기가 심상치 않은 총을 꺼내 들었다.
커다란 스코프가 달린 저격총이었다.
“공장에 아직 다른 오브젝트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회색 사신이 나타난 이상 어쩔 수 없겠죠.”
저격총을 설치한 남자가 스코프로 주차장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저격으로 제임스를 처리하고 나면 통역사랑 연구원도 같이 처리해야겠군. 쏘고 나면 바로 빠져나가야 하니까, 나머지 장비들 좀 준비해 둬.”
하지만 동료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음?”
“커… 커억.”
아무런 반응이 없는 동료가 이상해서 스코프에서 눈을 뗀 남자가 마주한 것은 목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잔뜩 뚫린 채, 목을 부여잡고 죽어가는 동료였다.
그리고 그 뒤 편에서 사납게 노려보는 회색 사신.
어떻게 여기를 알아챈 거지?
남자는 꽤 당황한 상태였지만 행동은 신속했다.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서 회색 사신을 향해서 발포한 것이다.
퉁퉁. 퉁.
소음기가 장치된 권총에서 총탄 3발이 뿜어져 나왔다.
몸통 두 발, 머리 한 발.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서 만든 대 오브젝트 처리용 탄환.
죽지 않는 괴물도 불태워 죽이는 무기였다.
총알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색 불꽃이 회색 사신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에 불이 붙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화난 표정의 회색 사신은 그대로 다가와서 남자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활활 타오르던 하얀 불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잠잠해졌고, 회색 사신은 감정을 추스르는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좁은 공간 안에, 짙은 피 냄새가 가득했다.
갑자기 예린이를 죽인다는 말에 흥분해서 모조리 다 죽여버렸네.
주변을 살펴보니 이 남자들의 정체나 소속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는 없어 보였다.
이런 나쁜 인간들은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아쉬웠다.
남자들이 머물던 방안에는 온갖 전자기기들이 즐비했는데, 척 보기에도 불법적인 일을 하는 데 사용하는 물건처럼 수상쩍게 생긴 것들투성이였다.
그중에 조금 다른 느낌의 물건이 하나.
아마 이게 나쁜 인간들이 말하던 ‘물건’이 아닐까?
고풍스러운 가죽으로 만든 서류 가방.
정교하게 꾸며진 모습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가방의 재질 자체가 뭔가 특이한 느낌이었다.
오브젝트 같은데, 오브젝트는 아닌 느낌.
왠지 중요해 보여서 챙겼다.
그리고 그대로 벽에 구멍을 뚫고 예린이가 있는 쪽으로 뛰어내렸다.
감시하던 사람들도 처리했으니까, 푸딩 공장을 구해야지.
***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편하게 누워있는 제임스는 갑자기 눈을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조용하군.”
제임스의 말에 통역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금세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네요? 곰돌이가 건물 철거하는 소리가 안 나요.”
제임스는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전화한 지 1시간도 안 지나서 강철 곰 인형을 처리했다고? 뭔가 이상하군. 물리적으로 말이 안 돼.”
“그럼 또 뭔가 함정을 판 걸까요? 우리가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거나?”
제임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관리실 문으로 다가갔다.
“차근차근 시간을 들이면 우리를 높은 확률로 처리할 수 있는데, 그런 함정을 팔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럼 지나가던 선비가 우리를 긍휼히 여겨 구해주러 왔다고 생각해도 괜찮겠지.”
갑자기 제임스가 입에 손가락을 대면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뭔가 들리지 않나?”
제임스처럼 천장에 귀를 기울이자, 작게 소리가 들려왔다.
[푸딩.]
[푸딩.]
통역사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그 괴물 토끼들이?”
통역사의 말과 동시에 관리실의 환풍구에서 분홍색 로봇 토끼들이 쏟아져 나왔다.
[푸딩!!!!!!!!]
요리사 모자를 쓰고 거품기와 계량스푼을 든 귀여운 토끼 로봇들이었다.
“도망쳐!”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제임스와 통역사는 관리실 문을 박차고 황급히 도주를 시작했다.
날카롭게 갈린 거품기와 창처럼 뾰족한 계량스푼을 피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