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짝폴짝.
투닥투닥.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황금 토끼 사신들의 공동 작업은 금세 끝이 났다.
열심히 작업을 하던 황금 사신들은 만들어진 푸딩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더니, 냉장고를 둘러싸고 앉아서 푸딩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냉장고의 숫자는 무려 5개.
황금 사신이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황금 토끼 사신이들의 작업을 보면서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황금 사신 정원에서 닌자 푸딩을 생산하는 계획은 성공적으로 보였지만 실패였다.
우선 너무 오래 걸려!
푸딩 냉장고의 숫자는 5개.
황금 사신에게는 충분한 숫자일지 몰라도 내가 볼 때는 전혀 아니었다.
냉장고의 크기가 황금 사신 사이즈라서 그런지, 냉장고에는 푸딩 그릇이 한 개밖에 안 들어갔다.
즉, 몇 시간씩 기다려 봐야 겨우 푸딩 5개밖에 안 나온다는 뜻이었다.
너무 적어.
적어도 너무 적었다.
해결 방안을 생각해 봐도 답이 없어 보였다.
푸딩을 다른 냉장고로 옮긴다?
재료도 딱 5개 분량만큼만 있는 듯 해서,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 토끼를 좀 더 사냥해야 하는 걸까.
지금은 조리모가 5개밖에 없는데, 토끼를 많이 죽이면 좀 더 많아지지 않을까?
황금 사신 몰래 5개의 푸딩을 빼돌릴 방법은 없을까?
푸딩의 완성을 기다리며 싱글벙글한 황금 사신들을 바라보며, 고민이 점점 깊어져만 갔다.
***
아무리 볼을 찔러도 반응을 해주지 않는 사신이의 볼살을 쪼물거리면서 2층에서 내려오는 남자들을 구경했다.
첫인상이 강렬한 2인조.
한 명은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고.
나머지 한 명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오묘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저 옷을 뭐라고 해야 하지? 좀 두껍게 만들어진 전신 수영복이라고 해야 하나?
황금 사신이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나쁜 사람들은 아닌 듯한데, 영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둘 중 한 명이 이 공장의 사장이라는 사람이겠지.
황금 사신에 대한 반응이 다른 점도 조금 웃겼다.
오묘한 복장의 남자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황금 사신이를 떼어내서 관찰하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놨다.
우는 남자는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황금 사신이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꺼림칙한 표정으로 사신이를 들어 올려서 통로 난간 위에 정중하게 올려놨다.
표정은 당장 집어던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토끼들을 갈아버린 황금 사신이가 무서워서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것처럼 보였다.
버림받은 황금 사신이는 난간에 앉아 시무룩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허공으로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 저 남자는 회색 사신이의 흉흉한 소문을 듣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닐까?
요즘 회색 사신 댄스 때문에 인식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았는데, 아직도 멀었구나.
회색 사신이의 귀여운 댄스를 보고, 전 국민이 회색 사신 팬클럽이 되는 날이 올 줄 알았는데!
감정이 북받쳐서 그런지 울음이 멈추지 않는 남자를 보고 이상한 복장의 남자가 그의 등을 팡팡 두들기면서 말했다.
“자자, 그만 울게. 위기가 지나갔으니, 자네에게 남은 것은 넉넉하게 선불로 지급받은 의뢰비뿐이 아닌가?”
“그렇겠죠? 이제 위기는 다 지나갔겠죠? 이제 밖으로 탈출하기만 하면 되는 거겠죠?”
그 말로 꽤 위로가 됐는지, 펑펑 울던 남자는 ‘의뢰비, 스포츠카….’라고 중얼거리면서 울음을 멈췄다.
오묘한 복장의 남자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펑펑 울던 남자는 내 품 안에 있는 회색 사신이 무서운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인사를 했다.
“반갑군! 반가워!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나는 이 공장의 주인인 제임스라고 하네.”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전까지 쫓기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멀쩡해 보이는 제임스 씨.
그리고 감사 인사를 하다가 쫓기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다시 울먹거리는 남자.
제임스는 시선을 내려서 내 품에 안긴 사신이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회색 사신을 실물로 보게 될 줄이야. 언젠가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제임스는 다시 시선을 올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눈을 계속 감고 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설마 우리를 구할 때 힘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던지?”
“저도 사신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별문제는 없을 거라 믿고 있지만,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
제임스는 한국에 공장을 세울 때부터 회색 사신을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은 한국에 회색 사신이 나타나기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제임스의 가문이 보유 중인 어떤 특별한 서적 때문이었다.
회색 사신과 똑같이 생긴 인물이 그려진 서적.
0번 서적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책이었다.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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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0번 서적은 특별했다.
제임스가 이뤄낸 업적의 30%는 이 서적 덕분이라고 할 정도로 특별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정말. 정말로 똑같이 생겼어. 내 가방만 잃어버리지 않았어도 비교해 볼 수 있을 텐데.”
제임스는 한탄을 담아서 말했다.
“혹시 잃어버린 가방이 이건가요?”
제임스는 예린이 내민 가방을 보면서 반색했다.
“이건 잃어버린 내 가방이 맞네! 정말 고마워! 도대체 어디서 찾은 건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사신이가 어느새 가져오더니 저에게 넘겨주더라고요.”
예린에게서 가방을 받아 든 제임스는 그것을 복잡한 방식으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예린이 봤을 때는 그저 고풍스러운 가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잠금장치가 생각보다 복잡해 보였다.
***
잠든 것처럼 반응이 없는 회색 사신을 품 안에 넣고 제임스가 가방을 열심히 조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드디어 열렸군.”
열린 가방 속에서는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가방은 오직 책 한 권만을 담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꽤 귀중한 책으로 보였다.
엄중한 잠금장치부터 해서, 꽤 커다란 서류 가방 전체를 책 한 권만을 위한 보관대로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낡은 책을 조심스럽게 펼친 제임스는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는 ‘여기 있었군.’하고 작게 말하더니 페이지를 펼쳐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정말 똑같지 않나?”
제임스가 내민 페이지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잔뜩 적혀있었고, 그 한쪽 구석에 정성스럽게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옅은 푸른색 머리카락.
조금은 짙은 푸른색 눈동자.
생기가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의 그림이었다.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예린의 눈에 더욱 관심이 가는 요소는 그 그림이 표현한 대상이었다.
회색 사신이가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회색 사신과 닮아 있었다.
온통 회색인 사신이와는 달리, 제대로 인간인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회색 사신이 성장한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건가요? 정말 잘 그렸네요.”
“그런 식상한 그림이 그려진 책을 이렇게 엄중하게 보관할 리가 없지 않나? 놀랍게도 이 그림은 회색 사신이 나타나기 전부터 있었다네.”
“네? 사신이가 있기 전부터요? 그럼,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가요?”
사신이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라니!
만약 있다면 만나보고 싶었다.
“이 그림의 모델에 대한 의견은 가설은 많지만 확실한 건 하나도 없네. 적어도 100년도 넘게 이전 인물이니까,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는 없겠지.”
“아, 아쉽네요. 만약 있었다면 보고 싶었는데.”
제임스는 내 반응을 보더니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반응이 조금 이상한데, 설마 0번 유물에 대해서 모르는 건가?”
“0번 유물? 그게 도대체 뭐죠?”
“음? 이상한데. 한국 오브젝트 협회에 산하 연구소로 알리라고 공문을 보냈었는데….”
표정을 잔뜩 구긴 제임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Something’s fishy.”라고 말한 것 같은데.
뭔가 수상하다고 한 건가?
뭔가 의심쩍은 표정을 짓던 제임스는 그 표정을 지우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 나머지 이야기는 공장을 벗어난 뒤에 하도록 하자고. 어차피 이 공장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제임스가 그 말을 하는 순간, 품 안에 안겨있던 온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사신아?”
회색 사신이가 갑자기 앞으로 순간 이동하듯이 뛰쳐나가더니 제임스의 책을 강탈했다.
그리곤 책을 양손으로 쥐고는 가만히 책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왠지 사신이의 빛이 좀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황금 사신 정원을 바라보던 중, 갑자기 불꽃이 느껴졌다.
내 가슴 속에 있는 장작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장작.
황금 사신처럼 내게서 파생된 것도 아닌 전혀 별개의 장작.
눈을 뜨니, 한 남자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뭐지?
장작을 가진 책이라니.
나는 홀린 것처럼 달려들어 그 책을 손에 넣었다.
책을 손에 쥐자, 장작이 조금씩 늘어나는 감각이 느껴졌다.
책에서 불꽃이 흘러들어와서 내 가슴 속 장작의 크기를 점점 키웠다.
느리지만 끝없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