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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5

갑자기 뛰쳐나가 책을 양손으로 꼭 쥔 사신이의 몸에서 황금색 불꽃이 타올랐다.

책이 불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그걸 쥐고 있는 사신이에게까지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떡하지?

책을 강제로 떼어놓아야 하는 건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제임스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회색 사신은 특별하군.”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옆을 돌아보니 제임스는 자세히 살펴보라면서 회색 사신을 가리켰다.

“회색 사신이 불에 탄다기보다는 회색 사신이 불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그러고 보니 책에서 번진 불이 회색 사신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왠지 사신이의 얼굴도 편안해 보여.

“보통 오브젝트가 저 책에 닿으면 고통스럽게 불타서 결국 재가 되어버렸지. 끊임없이 재생하는 오브젝트들도 저 불에 닿으면 재생을 못 해. 그런데 회색 사신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제임스는 ‘아직 가설이지만, 어쩌면 회색 사신은 오브젝트가 아닐지도 모르겠어.’라고 작게 덧붙였다.

“내가 설계하고 미국에서 생산 중인 대 오브젝트 탄환도 저 책의 불꽃을 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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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 상태인 회색 사신을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거야 나도 모르지. 저런 반응을 보인 오브젝트는 처음이라서 말이야. 보통 오브젝트들은 저 책을 찢어버리려고 하거나, 두려워하는데 회색 사신은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

역시 계속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건가.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사신이가 황금색 불 속에서 조금씩 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데?

***

무한한 장작!

장작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기분이 드는 내게 장작을 제공하는 물건은 꽤 매력적으로 보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작이긴 한데, 너무 적었다.

한 번에 흘러들어오는 양이 너무 적어서 별로 쓸모가 없어 보였다.

시간 대비 흡수량을 비교하면 1/100 예린이 정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이 책보단 나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 사이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알아서 두려워하거나 귀여워하니까 말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를 대비한 비상식량 정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별로 좋아 보이질 않는다.

실체를 가진 물건은 가지고 다니기 번거로워!

유령화를 자주 하는 내 입장에서 유령화보다 저 비상식량이 가치 있는지를 따지자면 당연히 유령화 쪽이 훨씬 좋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세희 연구소 격리실에 비치해 두고 심심할 때마다 집어 먹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맛이 없어.

불꽃 속에 담긴 감정이 맛이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이지?

책은 인간이 아니니까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없네.

한가지 감정만 담긴 순수한 장작.

인간이었을 때랑 비교하면 먹지도 못하는 플라스틱을 빨아먹는 기분이다.

이걸 먹느니, 그냥 연구소 밖을 나가서 사람 하나 깜짝 놀라게 하는 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장작은 역시 예린이가 최고야.

나는 책에서 들어오는 장작을 끊어내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이 쓸모없는 책을 집어 던졌다.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가 던진 책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황금 토끼 푸딩을 전부 독점하는 건 최후의 계획이다.

그러니까 이제 푸딩을 더 얻으러 가야 해.

공기 중에 느껴지는 악취를 생각해 보면 대충 어느 쪽에 살인 토끼들이 있을지 감이 잡혔다.

악취가 흘러나오는 공장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아마 저 악취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곳에 토끼들이 살고 있겠지.

***

책에서 흥미가 떨어졌는지, 공중에 휙 던져버린 사신이는 공장 중심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아직 푸딩 공장 점거 사태가 끝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사신이가 이렇게 열심인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그 푸딩,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구나.

저 무심한 표정의 사신이가 사실은 푸딩을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재미있었다.

제임스는 책을 받아 들자마자, 가방을 조작해서 정성스럽게 보관하기 시작했다.

“자자, 언제까지 여기가 안전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 빨리 탈출하자고.”

제임스의 탈출하자는 소리에 나는 공장 중앙을 빤히 바라보는 사신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사신이는 이번 푸딩 공장 사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제임스는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회색 사신이라도 공장을 탈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사신이가 처리하지 못할 오브젝트는 없지 않을까요?”

제임스는 뭘 좀 모르네, 회색 사신이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는데!

사신이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지 머리 위의 안테나가 살짝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도 공장 탈환은 힘들어. 공장 중앙에 골치 아픈 녀석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이야. 한국인들이 더 잘 아는 오브젝트지. 지금 공장을 차지한 오브젝트는 그 유명한 ‘아귀’라네.”

“아귀요? 송파구 싱크홀에 빠진 아귀에 갑자기 여기에는 왜…?”

“물론 그 아귀는 아니지. 하지만 공장에 있는 오브젝트는 아귀 아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닮은 꼴의 오브젝트더군.”

살랑살랑 꼬리치듯이 흔들리는 사신이의 안테나를 보면서, 반박했다.

“아귀는 이미 회색 사신이 물리쳤었던 것 아닌가요?”

제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지금 공장을 점거한 아귀의 아종은 아귀랑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인 녀석이야. 그리고 아귀처럼 퇴치가 가능해도 문제란 말이지.”

“퇴치말고 다른 문제가 있나요?”

“우리의 목적을 상기해 보게. 아귀의 퇴치가 목적이 아니야. 공장의 탈환이 목적이지. 회색 사신이 아귀를 처리할 때 송파구가 어떻게 됐는지 잊었나?”

“싱크홀이 생겼죠. 아, 그러면 공장이 무너져 버리겠네요.”

“그렇지. 그렇게 되면 처리하는 데 성공해도 탈환은 실패한 셈이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타당한 의견.

하지만 사실 우리들의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대화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회색 사신이의 안테나가 바로 섰다.

뚜방뚜방.

그리고 사신이는 그 귀여운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사신이의 모습을 가리켰다.

“어쩔 수 없군.”

제임스는 가방을 들고 회색 사신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소심해 보이는 남자는 그 모습을 보더니 제임스에게 따라붙었다.

“사장님? 저희끼리 먼저 탈출하면 안 되는 걸까요?”

그 남자는 사신이를 따라가는 나와 제임스를 보며 당황한 듯한 말소리를 냈다.

“그러기에는 아직 공장이 너무 위험해. 토끼 인형들이 꽤 많이 남아있으니까, 어쩔 수 없어. 사실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는 셈이지.”

제임스의 흉흉한 이야기에 소심한 남자는 크게 낙담하더니, 터덜터덜 우리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

0번 서적이 들어있는 가방을 단단히 쥔 채, 회색 사신을 따라서 공장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공장 깊숙이 들어갈수록 기분 나쁜 피 냄새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들어오는 사람을 겁에 질리게 만들기 위해 배치한 듯한 인테리어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사람의 내장이나 살점 같은 것들이 시선이 닿는 곳마다 걸려있었다.

살점을 얇게 펼쳐서 나름의 무늬를 만들고 걸어 놓은 것들은 기괴한 태피스트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나름대로 감탄하고 있었다.

“신기하군.”

그저 로봇에 불과했던 토끼 인형들이었는데.

비틀리기는 했어도 어떠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인테리어를 구축하다니!

전혀 예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설계한 로봇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토끼들을 오염시킨 그 검은 액체가 원인인 걸까?

통역사는 새하얗게 질린 채, 마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만간 또 기절할 것 같아 보이는군.

기절하면 이번에도 내가 짊어지고 뛰어야 하겠지.

푸딩을 포장하던 물류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들을 반겨준 것은 갈기갈기 찢긴 푸딩 상자들이었다.

푸딩 상자들이 내용물을 토해낸 채 널브러져 있었다.

푸딩들은 모두 뜯겨 바닥에 흩뿌려지고 토끼 발자국 모양으로 짓밟혀 있었다.

그 흔적들은 토끼들의 푸딩에 대한 증오를 느끼게 했다.

회색 사신은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무참하게 버려진 대량의 푸딩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예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회색 사신을 쓰다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회색 사신은 분명 무표정한데, 굉장히 슬퍼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이것도 일종의 정신 오염인가?

내용물을 쏟아낸 푸딩 용기에는 갈아버린 살덩어리들이 대신 들어차 있었다.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회색 사신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토끼 인형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토끼 인형들이 눈을 빛내면서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회색 사신이 양팔을 좌우로 뻗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황금 사신들.

작고 통통 뛰어다니고, 오브젝트는 뼈도 남기지 않는 흉포한 황금색 메뚜기떼가 토끼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

인간 푸딩을 만들던 토끼들이 모두 죽었다.

승리의 순간이지만, 승리의 주역인 황금 사신이들은 오히려 슬퍼 보였다.

주변은 조용하지만, 통곡이 가득했다.

인간 푸딩들을 보면서 포롱포롱 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는 황금 사신이들 때문이었다.

푸딩 용기 앞에 다들 주저앉아서 손도 못 대고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너무 구슬프게 울고 있어서 마음이 불편해질 정도였다.

“그래, 그래. 괜찮아.”

그래도 좀 쓰다듬어 주면 울음이 좀 그치길래, 돌아다니면서 황금 사신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황금 사신과 달리 회색 사신은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뭘 보고 있지?

나도 그런 사신이의 시선을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뭔가가 있어.

둥실둥실 뭔가가 천장 근처 높게 떠 있는 것 같은데?

거품에 둘러싸인 채 하늘을 날아다니는….

푸딩?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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