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7
커즈 뉴먼은 분명 부드러운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를 보고 있는 내 속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메스가키 스킬아. 굳이 거기서 이마가 퇴보하고 있다는 걸 지적해야 했었니?
소울 아카데미 세상에서도 대머리는 결코 칭찬이 아니다.
우리 가문의 대머리 기사가 대머리소리를 웃어넘기는 건 그 사람이 유쾌한 거지 대머리가 자랑스러운 게 절대 아니란 말이다.
사탕발린 말을 해도 모자란 상황에 상대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들어가다니!
당황해서 다음 말을 고르고 있으려니 커즈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까마귀의 인장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좆밥 당주님. 몰랐으면 제가 말을 꺼냈을까요? 모발만큼 생각도 짧으시네요.”
에라. 모르겠다.
커즈가 칼침을 놓으려 하더라도 칼이 막아주겠지 뭐.
“놀랍군요. 뉴먼 가의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는 정보인데.”
원래는 그렇지.
근데 나는 이 세상 바깥에서 온 사람이거든.
내가 이 게임에서 모르는 건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맨날 이런 소리를 지껄이다가 예상외의 사건이 터져서 개같이 구르기는 하지만 어지간한 정보는 다 알고 있다 이 말이야!
어쩌면 커즈 너보다 내가 그 인장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 물건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어.
“그 물건은 뉴먼 가문의 은인에게 주어지는 물건입니다.”
‘아드님의 목숨을 구해준다면 은인이라 할 만하지 않나요?’
“허접한 약골 영식의 목숨줄을 건져 줄 건데 그걸로는 모자라나요? 좆밥 당주님은 쫌생이시군요?”
“물론 그는 은인이라 할 만 합니다만. 가벼이 드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소리지요.”
무덤덤한 목소리 사이로 탁자 위에 올려둔 손등을 툭툭 건드리는 손가락이 보인다.
“최소한 영애께서 제 아들의 목숨을 구원해주신 후에야 오고 갈 수 있는 이야기란 것이죠.”
‘저도 물건을 받고 나서야 설명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좆밥 당주님. 여기서 누가 고개 숙일 입장이죠? 적어도 전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머리카락처럼 지성도 잃어버리신 건가요? 푸훗.”
내가 바라지 않았음에도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커즈 뉴먼의 표정에는 한 치의 미동도 없다.
알새틴도 조금은 짜증난 기색을 보였는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뒷세계의 귀족이라는 건가.
내 입가에서 흘러나오던 웃음이 그치고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간 후 커즈가 긴 숨을 내뱉었다.
“알른 영애님. 당신께선 진정으로 아그라의 저주를 해주할 방법을 들고 계십니까?”
‘네.’
“그런데요.”
“그를 맹약의 신 아래에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물론이에요. 전 좆밥 당주님과 달리 음침하지 않거든요.”
당연히 맹세할 수 있지.
아그라의 저주를 해주 할 방법이라면 수도 없이 많이 알고 있는 걸.
그 중에 하나만 알려주면 되는 거잖아.
“과연.”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제 제안은 이렇습니다. 알른 영애님께서 제 아들을 치료해 주신다면 저도 기꺼이 까마귀의 인장을 드리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진짜.
물건부터 내놓으라고 물건부터.
당신 아들내미를 치료할 방법을 알려준 후에 입을 싹 닫아버리지 않을 거라고 내가 어떻게 확신하냐고.
을이면 을답게 내 아래서 설설 기란 말야.
손익을 가지고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속으로 투덜대고 있으려니 뜸을 들이던 커즈가 재차 입을 열었다.
“맹약의 신께 맹세하고서 말이죠.”
허? 그래? 이럼 이야기가 다르지.
맹약의 패널티가 유저 입장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귀족 가문의 당주된 입장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맹약을 어긴다는 것은 실로 커다란 불명예다.
아무리 뉴먼 가문이 뒷세계에 뿌리를 내린 곳이라 할지라도 대외적인 이미지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당주가 맹약을 어겼다는 소문이 나봐라.
그런 불명예를 껴안은 곳과 그 누가 거래를 하고 싶어 하겠는가.
더욱이 뉴먼 가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다른 가문에게 물어뜯을 구실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생각해보면 맹세하겠다는 저 말은 내게 까마귀의 인장을 주겠다는 소리와 동일하다.
어떻게든 내게 줄 것을 줄이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대신 영애께서도 맹세해 주시겠습니까? 제 아들을 치료해 주겠다고?”
‘네. 그럴게요.’
“어렵지 않죠. 좋아요. 허접한 맹약의 신께 맹세드리죠.”
좀 더 치열하게 이야기가 나눠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커즈 뉴먼에게 자기 아들이 지닌 목숨의 가치가 크긴 한가보네.
<맹약을 나눌 셈이냐?>
‘그게 제일 빠르고 정확하지 않아요?’
<물론 그렇지. 허나 그대도 알겠지만 맹약이란 신중하게 걸어야 하는 것이다.>
‘네? 그게 무슨.’
<정확히 어떤 맹약을 할지 정하는 데에 꽤나 긴 시간이 걸릴 거란 거다.>
그러니까 서로 합의 하에 계약서를 쓰는 그런 느낌이 될 거란 거죠?
‘할아버지!’
<안다. 찬찬히 의논을 해보자꾸나.>
전 할배만 믿을 게요! 나 이렇게 머리 쓰는 거 질색이란 말이에요!
*
“당주님.”
맹약을 끝마치고서 소울 아카데미를 떠나 가문으로 돌아오자마자 커즈를 연기했던 그의 심복이 입을 열었다.
“무어냐.”
“정말 그 여아에게 까마귀의 인장을 줄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별 수 있나. 그리 깐깐히 맹약을 정했는데.”
오만하고 건방져서 정치적인 거래에는 익숙하지 않을 줄 알았거늘.
루시 알른은 언제나 커즈의 예상을 한참 뛰어 넘었다.
맹약에 사용할 조사 하나까지도 명확히 지정하는 모습이란.
어지간한 기사 가문의 당주도 그만큼 깐깐하진 않을 것이다.
생긴 것은 철없는 꼬마아이처럼 생겨서는 그 안에 든 것은 궁중의 능구렁이와 같구나.
허나 그대도 한 가지는 예상을 못한 듯 하더구나. 루시 알른 너는 내가 까마귀의 인장을 주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 생각했겠지.
허나 내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대는 말했다. 내 아들을 치료하겠노라고.
이를 잘만 해석하면 우리 가문으로 찾아와 내 아들을 치료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나의 아들은 아내를 닮아 미색을 지니고 있거든.
아무리 건방진 꼬맹이라도 조금은 관심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야.
후흐. 연을 맺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이거지. 암.
내어 줄 것을 내어주고 얻어낼 것을 얻어낸 커즈는 가벼이 웃음을 짓고는 심복에게 말을 건넸다.
“루시 알른이 말해준 대로 탐색을 해보거라. 그녀의 말이 옳다면 그 곳에 아들을 구할 방책이 있겠지.”
“예. 알겠습니다. 사람을 풀어 탐색대를 구성하겠습니다.”
커즈는 그 이상으로 자세히 지시를 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설명을 들은 심복이 어련히 잘 일을 해낼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그럼 바로.”
“아. 잠시.”
“말씀하시지요.”
“모발에 좋은 약재를 좀 알아보거라.”
항시 일과 관련된 이야기밖에 하질 않던 당주의 입에서 나온 사적인 요구에 심복은 슬며시 고갤 들었다가 시선을 피하는 당주의 모습을 보곤 다시 고갤 숙였다.
“…알겠습니다. 당주님.”
심복은 자기 주인의 부끄러움을 지적할 정도로 눈치 없는 자는 아니었다.
*
‘진이 빠지네요.’
<이 정도면 빠르게 끝난 거다. 길 때는 몇 년에 걸쳐서 하나하나 논의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진짜요?’
<그대도 배우지 않았나. 역사서에 나와 있느니라.>
그으런 걸 배웠던가? 잘 기억이 안 나네.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잊어버린게냐?>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럼 어떤 사건인지 읊어보거라.>
내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할배의 잔소리가 귓가에 내리 꽂혔다.
하지만 나도 할배의 잔소리를 오랫동안 들어왔던 사람.
할배를 손에 넣고 나서부터 매일 같이 한소리를 듣던 입장에서 대처법을 알고 있다.
바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
다른 생각이나 하자.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목걸이지.
버로우 가문의 목걸이.
커즈 뉴먼이 맹약을 끝마치고 나서 선금이라면서 주고 간 물건.
이것만 있으면 열등 공자님의 호감도를 쌓는 건 너무도 간단하다!
이 목걸이를 건네준 다음에 거기에서 파생된 퀘스트를 함께 클리어 하기만 하면 그 뒤로 자칼 버로우의 마음은 열린 문이라고!
그럼 빌어먹을 허접 주신이 준 퀘스트를 바로 클리어 할 수 있고 말야!
이번에는 허접 주신이 뭘 주려나.
그래도 허접 무능 주신이 보상을 줄 때는 제대로 주니까.
괜한 소리를 하면 꼴받음을 견딜 수 없는지 내 입을 닥치게 만들긴 하지만 그거야 내가 입만 다물면 되는 거고.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자칼 버로우를 만나러 가야지.
기대되네.
<여아야! 내 말 듣고 있느냐?!>
‘네에~’
듣고는 있어요.
머리에 새기지 않을 뿐.
*
다음 날. 아카데미의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자칼 버로우를 만나기 위해 독서실로 향했다.
열등공자님께서는 자신이 아카데미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항시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람.
비록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질투하기는 하지만 그 열정만큼은 분명 진짜다.
일반적인 학생들이라면 잠시 휴식을 취할 지금도 열등 공자께서는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것은 자기 인생을 내던져가며 노력을 해봐야 그 모든 노력이 아서에게 밀린다는 거지만.
어쩌겠어. 그게 캐릭터 성인데.
원망을 하고 싶다면 이 게임을 만든 게임사를 원망해야지.
독서실의 문을 열고서 열등공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창문 바로 옆의 책상.
그 곳에 열등 공자가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채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칼의 반대편에 앉으니 그가 슬며시 고갤 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열등공자님.”
아. 이럴 줄 알았어.
네가 다른 사람을 멀쩡하게 부를 리가 없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난 자칼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고서도 별 당황하지 않았다.
“왜 굳이 와서 시비를 거는 거지? 알른 영애?”
‘드릴 것이 있어서요.’
“열등공자님이 보면 침을 흘릴 걸 찾아서요.”
나는 품 안에서 장신구 상자를 꺼내 보였다.
자칼은 그 때까지도 표정을 조금도 풀지 않았다.
그저 심드렁하게 상자를 쳐다볼 뿐.
“이건 뭐지?”
‘잘 보세요.’
“잘 봐요. 열등 공자님. 바보같은 소리를 내게 될 테니까요.”
“하아. 그래. 할 게 있으면 빠르게 말하고 사라져라. 내 방해를 하지 말고.”
말하는 어투에 가시가 잔뜩 박혀 있는 걸 보면 날 좋아하진 않는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 아카데미에서 날 좋아하는 사람보단 싫어하는 사람이 훠어어어어얼씬 더 많을 테니까.
거기에 더해서 자길 열등공자라고 부른 인간을 어떻게 좋아하겠는데.
그렇지만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
내가 장신구 상자를 슬며시 열자 자칼 버로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하.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이게 뭔지 알 수밖에 없겠지.
네가 이걸 어떻게 잊겠냐.
‘마음에 드시죠?’
“멍청한 표정을 지으시는 걸 보면 마음에 드시나 보네요. 열등공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