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세희 연구소 보안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평소라면 피곤해 보이는 직원 몇몇만이 졸음을 참고 자리에 앉아 있을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이례적으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직원들이 잔뜩 있었다.
물론 세희 연구소이니만큼 업무를 열심히 하느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직원들은 팝콘까지 꺼내 들고 마치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CCTV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CCTV 화면에는 황금 사신이 푸딩을 짊어지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이 비치고 있었다.
연구소 직원들은 고양이나 강아지 동영상을 보는 느낌으로 감상 중이었다.
“황금 사신이 귀엽네. 한 마리 데려가고 싶다.”
“나도.”
늦은 밤, 조명조차 꺼져서 어두운 복도를 뚜방뚜방 걸어가는 황금 사신.
황금 사신은 최대한 사방을 살피면서 몰래몰래 다니고 있었지만, 사실 이런 어두운 밤에 황금 사신이 숨는 것은 불가능했다.
황금 사신은 회색 사신처럼 빛이 나니까!
빛 한 점 없는 복도는 은은하게 빛나는 황금 사신이 흘리는 빛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순조로워 보이던 황금 사신의 즐거운 여정은 갑자기 커다란 난관에 부딪혔다.
길이 막혔어!
당황한 황금 사신의 눈앞을 커다란 강철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거침없이 뚜방뚜방 걸어 다니던 황금 사신은 갑자기 길이 사라지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고 있었다.
“자정을 지나면 일부 구간에 차단벽을 내리는 걸 모르고 있었나 보네요.”
“하긴 황금 사신이는 저녁만 되면 금세 잠들던데, 지금 시간이면 보통 자고 있었을 테니까 모르겠지.”
닫힌 문 주변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돌아다니는 황금 사신.
통과할 수 있는 틈 같은 것을 찾는 것 같았는데, 오브젝트 표준 차단벽에 그런 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회색 사신이었으면 진작에 차단벽을 찢어버린 뒤, 유유히 푸딩을 들고 자기 갈 길을 갔겠지만, 황금 사신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열어줄까요?”
“야, 그거 걸리면 감봉 정도로는 안 끝날걸?”
“그래도 너무 안타까워요.”
황금 사신은 다른 길을 알지 못하는지, 차단벽 근처를 계속 서성이고 있었다.
철문을 똑똑 두들기기도 하고, 차단벽 위를 기어오르기도 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황금 사신은 푸딩을 끌어안은 채 슬픈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서아 부소장이 마련한 고성능 CCTV는 그런 황금 사신의 얼굴을 똑똑히 잡아내고 있었다.
“아, 몰라. 열래요!”
슬픈 황금 사신을 보다 못한 보안실 직원 중 한 명이 막무가내로 차단벽을 조작해서 올려버렸다.
쿠르릉.
커다란 소리가 울리면서 차단벽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
황금 사신은 푸딩을 바라보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푸딩….
빨리 먹어야 맛있는데.
하지만 애착 인간에게 향하는 길은 커다란 강철 벽으로 막혀 있었다.
간단히 뚫어버릴 수 있는 강철 벽.
하지만 인간의 물건을 부수면 인간이 슬퍼하니까 황금 사신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쿠르릉.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강철 벽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황금 사신은 슬픈 표정을 순식간에 지우더니 후다닥 강철 벽을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애착 인간에게까지 이제 정말 금방이야!
***
세희 연구소 소장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한 시간이었지만, 나는 소장실에 남아서 학생 때처럼 책을 붙들고 있었다.
아, 이러다가 죽겠네.
이거 3개월만 공부해서 딸 만한 시험이 아닌데?
관련 업계 종사자는 생각보다 따기 쉽다고 하던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나는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니었나?
속으로 이런 법이 탄생하게 된 배경인 ‘데일리 오브젝트’ 녀석들에 대한 나쁜 말을 속으로 잔뜩 하면서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러던 중 소장실의 문에서 ‘콩콩’하는 귀여운 소리가 났다.
서아의 무서운 노크와는 완전히 다른 귀여운 소리.
문을 살짝 열어보니, 피자를 내밀 듯이 푸딩을 내밀고 있는 황금 사신이가 보였다.
황금 사신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푸딩을 받아들였다.
이거 다들 맛있다고 하던 푸딩이네.
먹어 보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바빠서 먹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
“푸딩 가져다준 거야? 고마워.”
황금 사신이를 얼굴 가까이 두고 슥슥 쓰다듬었지만, 황금 사신이는 왠지 우울한 표정으로 내 눈 밑을 쓰다듬었다.
아 설마 다크서클?
설마 피곤해 보여서 걱정하는 건가?
“그래, 그래. 다 괜찮아. 오늘은 푸딩만 먹고 쉴 테니까.”
푸딩을 뜯고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황금 사신이에게 한입.
그리고 나도 한 입.
오랜만에 공부하느라 힘들었는데, 황금 사신이가 헤실헤실 웃는 걸 보니 기운이 났다.
왠지 자격증을 딸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네.
오늘은 푸딩 먹고 자고, 내일부터 열심히 해야지!
***
하늘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푸딩들을 바라보면서 공장 바닥에 누웠다.
“아, 어떡해. 큰일 났어.”
예린이는 멀리멀리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푸딩 거품들을 보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인가?
그냥 전 국민이 공짜 푸딩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데.
그나저나 오늘은 너무 힘들었다.
아귀 아종과 육탄전을 벌이면서 장작 낭비하기.
황금 사신 정원을 무리하게 빨리 전개해서 장작 낭비하기.
아귀 아종을 굳이 공간 조작으로 찌그러트려서 처리해서 장작 낭비하기.
장작을 너무 썼더니 피곤해.
다 내가 시간을 끌다가 생긴 낭비라서 자업자득이었다.
콕콕.
힘들어서 널브러져 있는 내 뺨을 황금 사신이 찌르고 있었다.
마치 나도 먹으라는 것처럼 푸딩을 내밀면서 볼을 콕콕.
황금 사신이 떠다 주는 푸딩을 받아먹으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푸딩들을 바라보니 나름대로 편안하고 좋았다.
이제 세희 연구소에 푸딩이 들어오겠지?
힘들었지만 앞으로 먹을 맛있는 푸딩을 생각하면 절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히히.
이번에 직접 처리한 오브젝트는 2기.
살인 곰돌이 로봇이랑 아귀 아종.
하지만 얻은 능력은 전무.
둘 다 육체파 오브젝트라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리 근육이 우락부락한 오브젝트를 파괴한다고 해서 근육이 생기거나 한 적은 없었다.
특히 이번 아귀 아종은 근육이 정말 대단했는데, 한 번쯤 근력 관련 능력도 얻어보고 싶긴 했다.
근력이 부족하니까 병도 못 따서 예린이가 열어줘야 하는데, 불편해.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겹치기로 병목을 날려버릴 수밖에 없다.
옴뇸뇸.
황금 사신이들과 같이 옹기종기 모여서 푸딩을 먹고 있었더니, 예린이가 다가와서 우리들을 불렀다.
“자, 이제 연구소로 돌아가자!”
내가 쳐다보기만 하고 움직이질 않으니까, 예린이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고양이처럼 들려서 차량에 안착.
그리고 순식간에 출발해 버렸다.
점점 멀어지는 푸딩 공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황금 사신을 실수로 빠트릴 만한 점액이 있었는데, 힘들어서 까먹고 있었네.
살짝 아쉬웠다.
***
제임스는 어느새 아침 해가 보이는 호텔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긴 하루였다.
회색 사신이 공장에서 떠난 뒤, 제임스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워낙 많았다.
회색 사신이 떠난 뒤, 공장 내부에 숨어 있을 수도 있는 오브젝트를 찾아내기 위해서 오브젝트 처리반을 불렀다.
기절한 통역사를 병원으로 보내고, 공장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이제, 거품 푸딩 유출 사태로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서 변호사를 만나고, 잘 아는 기자들을 만나서 신문 기사도 좀 내고, 등등.
긴 하루였지만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호텔 방에서 한숨 돌리던 그때, 스마트 워치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은 중국에 사는 ‘친구’.
시대착오적인 닌자들을 이끄는 남자.
“전화는 오랜만이군. 갑자기 전화라니 무슨 일이야?”
[….]
“문제가 있긴 했지. 역시 한국에서 공장을 세우기 무섭게 사고를 가장한 습격을 당했어. 자네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한국에 공장은 안 세웠을 거야.”
[….]
“회색 사신? 만났지, 이렇게 빨리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뭐, 확실히 0번 유물과 관련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아.”
[….]
“이번 사건은 모르겠어. 뭔가 시기가 공교롭기는 한데, 한국은 워낙 이런 사고가 잦으니까, 뭐라고 판단할 수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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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그럼. 다음에는 만나서 보자고, 친구.”
제임스는 전화를 끊고는 침대 위로 누웠다.
왠지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
도착!
푸딩 공장을 떠나서, 드디어 세희 연구소 사신이의 격리실에 도착했다.
품 안에는 말랑 따뜻한 잠든 사신이.
사신이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몸을 기울여서 침대 위에 같이 누웠다.
사신이가 오늘은 엄청 피곤했는지, 차 안에서 과자도 안 집어 먹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아귀랑 싸운 뒤부터 가슴에 불꽃 밝기도 좀 줄어들었고 졸려 보이긴 했지.
품에 안긴 사신이는 꿈을 꾸는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약간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나저나 격리실에서 보니까 확실히 차이가 느껴졌다.
사신이가 하얘졌어.
그 책을 만진 뒤부터 살짝 하얗게 변했는데,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