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고 있었다.
어둡고 칙칙한 꿈.
현실처럼 생생하고 현실과 다른 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꿈.
다만 황금 나무를 처리하고 얻어낸 수면 유도 능력이 이곳이 꿈속인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황무지에는 부서진 오브젝트들의 잔해가 가득했다.
메마른 대지와 건조한 공기.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황금 사신 정원’인 것 같았다.
황금 사신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소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었다.
부서진 오브젝트의 잔해에서 검고 끈끈한 물질이 스며 나오고 있었는데, 마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잔해 주위에 고여 웅덩이를 만들었다.
오브젝트들만이 잔뜩 부서져 있는데도,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섬뜩한 배경에서 익숙한 모습의 사람들이 보였다.
검은 복면, 검은 옷을 입은 닌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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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바퀴벌레처럼 지평선 끝까지 계속 이어지는 닌자들의 무리.
그들은 텅 빈 옥좌를 향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옥좌는 파괴된 오브젝트들의 잔해로 만들어진 옥좌였다.
옥좌는 그 주인이 없어 텅 비어있는데도, 특유의 섬찟한 느낌과 함께 지배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닌자들은 경건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옥좌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옥좌의 주인을 향한 경외심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웅얼거림.
혀가 없는 닌자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찬송가가 시작되었다.
가사도 없는 노래였지만, 거기에 담긴 경외의 감정만큼은 확실하게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경외와 숭배!
알 수 없는 전능감이 장작 속에서 퍼져나갔다.
꿈속인데도 장작이 감정을 먹고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장작을 가득 채우는 전능감을 만끽하던 도중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보니, 왕좌 위에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새까맣고.
새빨간.
음울해 보이는 나의 모습이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꿈이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너는 여기로 오지 말라고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꿈을 이루는 공간이 뿌옇게 흐려지고 유리처럼 갈라지며 깨지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생소한 하늘이 보였다.
하늘 위에는 검은 화염으로 불타오르는 달과 무지개처럼 형형색색의 7개의 달이 빛나고 있었다.
***
갑자기 사라진 온기에 눈을 떠보니, 품속에서 잠든 사신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사신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봐도 사신이가 보이지 않아서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사신이는 이런 깊은 밤중에 아무 이유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이상하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자 드디어 사신이가 보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연구소 뒤뜰.
하늘 위의 달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사신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과 한쪽 손을 하늘 위로 쭉 뻗고 달을 바라보는 모습.
마치 소설이나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
어두운 밤, 나무와 잔디를 배경으로 달을 올려다보는 사신이는 꽤 분위기가 괜찮았다.
그런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신이를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이 멋진 시간의 단면을 사진으로 바꿔서 영구히 보존했다.
찍은 사진을 검토하다 보니, 한가지 바뀐 것이 눈에 띄었다.
지금 보니까, 사신이의 색깔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네?
약간 하얗게 변한 사신이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어!
색이 변해서 약간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야.
***
[이번 푸딩 사태가 우려에 비해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요? 어떻게 된 걸까요?]
[초기에는 거품이 터지고 푸딩이 떨어지며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되었습니다만….]
부소장실은 TV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큰일로는 번지지 않을 것 같네요. 특히 제임스 대표가 우리에 대한 언급을 하나도 안 하고 ‘오브젝트 점거로 인한 공장의 동작 오류’라고만 해서 다행이죠.”
서아 언니의 담담한 말.
사실 이번 사건으로 부소장실로 끌려가서 죽기 직전까지 말로 얻어맞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서아 언니는 별다른 잔소리 없이 넘어가 주었다.
분명 어깨 위에 앉아서 서아 언니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는 황금 사신이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황금 사신아!
요즘 서아 언니가 화가 좀 줄어든 것 같아.
“오히려 문제는 얘네들인데….”
“아….”
서아 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시체처럼 널브러진 황금 사신이 5마리.
앙증맞은 조리모를 쓰고 토끼 귀가 돋아나서 2배로 귀여워진 황금 사신이들이었다.
손가락으로 찔러도 무반응.
들어 올려도 축 늘어지고, 액체처럼 힘이 하나도 없었다.
10,000배 혹은 그 이상으로 혹사당한 불쌍한 황금 사신이들.
회색 사신이가 별 관심을 안 주는 걸 보면 내버려 두면 알아서 기운을 차릴 것 같기는 했지만, 보기만 해도 너무 안쓰러웠다.
처음 봤을 때는 황금 사신이가 과로사를 해버린 줄 알았다.
원래 숨을 안 쉬는 아이들이니까, 움직이질 않으면 시체처럼 보여서 진짜 깜짝 놀랐었다.
다행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푸딩을 살짝 떠서, 입에 가져다 대면 야금야금 턱을 움직이면서 오물오물 먹기는 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서아 언니 개인실에 옮기고 보살펴 주는 중이었다.
옴뇸뇸.
손바닥 위에 황금 사신을 눕혀두고 푸딩을 천천히 먹였다.
아, 너무 귀여워!
돌봐주기만 하는 건데도, 너무 귀여워서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서아 언니도 엄청나게 집중해서 사신이를 진심으로 돌봐주고 있었다.
서아 언니가 서류를 볼 때 말고도 저렇게 집중하다니….
평화로운 세희 연구소의 일상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세희 언니가 안 보이네?
***
잊힌 시대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 웅장한 홀.
중앙에는 웅장한 모자이크가 바닥에 펼쳐져 있었는데, 타일로 이루어진 복잡한 형상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과 본 적 없는 설화를 담은 그림이었다.
<인간은 신을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필요로 했다.>
<신은 잔혹했지만, 인간을 지켜주었다.>
제3 연구소장은 그 모자이크에 적힌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모자이크를 둘러싼 최고급 목재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은 금과 은으로 상감 처리되어 표면이 부드럽고 은은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모자이크를 둘러싸듯이 배치된 원형의 탁자 위에는 마치 수상쩍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것처럼 흉흉한 것들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금으로 된 접시에 올려진 갓 발려진 두개골.
은으로 된 그릇에 올려진 피가 아직도 흐르는 정체 모를 심장.
그런 것들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모자이크를 한참 내려다보던 제3 소장은 곁에 서 있던 집사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다른 세계의 문화도 꽤 풍취 있지 않나? 그래, 무슨 일이지?”
“제임스를 대상으로 한 공작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래, 결국 완전히 실패해 버렸군. 이제 제임스는 한국에서도 열화된 연금술을 마구 퍼트리겠지. 대책이 필요하겠어.”
담담해 보이지만, 잠재된 분노가 그 안에 있었다.
“분명 아귀에게도 쩔쩔매던 것이 회색 사신 아니었나? 도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제임스의 짓인가? 아니야, 아직 그 정도 기술은 없을 텐데.”
모자이크 위를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며 중얼거리던 제3 연구소장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좀 더 보고할 사항이 있겠지. 왜 실패했는지 조사한 결과도 나오지 않았나? 이야기해 봐.”
집사는 몇 가지 사진과 서류를 제3 연구소장에게 넘겨주더니 보고를 시작했다.
“주변 CCTV 등을 볼 때, 회색 사신 외의 외부 개입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데이터를 종합해 보면 회색 사신이 아귀를 처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연구소에서는 회색 사신의 전투력 재평가가 시급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제3 연구소장은 집사의 보고를 듣더니 평소와는 달리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그게, 그따위 게 아귀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을 리가 없어.”
“하지만, 현재까지 얻어낸 정보에서는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는 결론이….”
제3 연구소장은 집사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옆으로 밀치더니, 집사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서 모자이크가 장식된 홀을 빠져나갔다.
“다시, 다시 한번 더 조사하라고 해. 이번에는 엉터리 조사 결과를 가져오지 않아야 할 거야.”
고개를 돌려서 엄포를 놓은 제3 연구소장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
사막화로 모든 건물이 사라진 강서구.
까치산 연구소에서 시작된 재난은 강서구 전체를 사막으로 뒤바꿔 버렸다.
그 피해는 막대했다.
강서구는 서울에서도 사람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 지역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 이재민들을 위한 캠프는 강서구 인근, 양천구에 만들어졌다.
사막화 당시 죽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캠프에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캠프에 절대로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보슬보슬.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 비가.